누가복음 24장 33절 49절 구원의 빛줄기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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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의 기원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서 손에 들고, 예수님을 환영한 것에 연유합니다.
종려가지를 꺽어서 환호하는 것은, 본래 큰싸움을 이기고 승리의 개선을 할때, 맞이하는 이스라엘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성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큰 싸움에서 이기시고 승리하시는 메시야로, 환영한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열열한 환영을 받으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만왕의 왕으로, 만군의 주로써 주일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들어나게 됩니다.
월요일에는 성전을 정화 하십니다.
화요일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논쟁하십니다.
수요일에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려고 모의를 합니다.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성찬식을 하십니다.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큰 환영의 날인 동시에, 고난주간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왜 고난주간의 정점이 성금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순간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원에 대하여 살펴 보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숨겨두는 특성이 있다.
어린이들은 제일 아끼는 장난감이 있다면, 그 장난감은 제일 안전한 곳에 숨겨 둡니다.
만약 나에게 별돌만큼이나 크고 묵직한 골드바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숨겨둡니다.
수억원이나 되는 골드바를, 방바닥 아무렇게나 딩굴도록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튼튼한 금고를 사서, 그 속에다가 꼭꼭 숨겨두지 않겠습니까?
또한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골드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도록 숨기지 않겠습니까?
만약 나에게 골드바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고, 그러다가 도둑이라도 들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야기가 좀 길어집니다만, 그래서 남미에는 부자일수록 허름한 옷을 입는다고 합니다.
남미는 우리나라 보다가 치안이 않좋습니다.
멋있는 옷을 입고가면 나쁜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고, 심지어는 강도를 맞는 일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미에서는 부자일수록 허름한 옷을 입습니다.
부자일수록 허름한 차를 탄다고 합니다.
필리핀에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도를 잘 맞는다고 하지요..
한국사람들은 겉모습을 너무너무 잘 꾸미니까, 당연히 주목을 받게 되고, 급기야는 한국사람들은 저렇게 잘 입고 다니는걸 보니까, 분명히 돈이 많을것이다....그래서 일본사람 중국사람 미국사람보다가도, 한국사람들이 범죄의 표적이 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을 숨기지 않고,
순진하게 중요한 것을 잘 들어내다 보니까,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의 자리는 구원이 완성된 자리 라고 말씀드릴수 있겟습니다.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중요한...우리를 위한 구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가? 살짝 엿볼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알수는 없습니다. 그 구원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에 꽁꽁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그 귀한 구원의 빛이 살짝 빛나고, 들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1. 십자가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두통이라고 하지요? 갑자기 머리가 아프면, 머리가 아픈것이 멈추는 것이, 소박하지만, 그 사람에게 시급한 구원 입니다.
하지만 두통약 먹고 머리가 나으면 다시는 머리가 않아프냐? 아닙니다. 또 아플때가 옵니다.
아픈것은 언제고 반복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하는 구원이 다양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들은 이세상에서 임시적이고 한시적 구원을 반복하여서 받으며 살아갑니다.
해결되었다가, 또 문제가 생깁니다.
해결되었다가, 또 문제가 반복됩니다.
그덯다면 궁극적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받으면 다시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 구원은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 해결되는 구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에서 발견할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때,
십자가 밑에서 올려다 보던 사람들은, 구원하라고 예수님을 비웃고 힐란하였습니다.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그 말은 뒤집어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하는, 구원의 실패하는 사람이 아닌가?
구원이 무엇이냐?
라고 질문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럴때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쉽게 구원을 ‘구원의 빛’을, ‘구원의 실체’를 보여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고 회개하는 것은 아지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불신앙의 자리에 섭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향하여, 비웃으면서 방금 했던 그 말을 하던 관리들,
예수님을 향하여 괴롭히던 로마군인들..자 과연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받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매우 높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핍박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진고초 당하시시며 이루신 그 귀한 구원을, 함부러 아무 사람에게나 값없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아무리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구원을 보이라.’‘구원을 나타내라.’ 하여도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구원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구원을 찾고 찾으며,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구원을 보이시나, 기대하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철저하게 감추어 졌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그렇게 전도할 때, 퉁명스럽게 “저는 예수님께 구원 안받아도 괜찬아요. 저는 십원이 있으니까요..” 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신령한 환상을 보여주시고, 귀중한 응답을 내려주시고 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해 주시고,.....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기는 커녕, 예배드릴줄로 모르고, 심지어는 복음을 거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신령한 것들이 주어질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호기심에, 아무리 찾고 찾는다고 하여도, 그 사람은 도무지 찾을수 없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꼭꼭...그 사람에게는 감추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전혀 믿음도 없고, 예수님을 핍박하던 구경꾼들이
우리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기심과 장난같이 ‘구원을 보이라’,‘구원을 나타내라’고 할때
예수님께서 구원을 나타내어 보이시겠습니까? 절대로 구원을 나타내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은혜는 믿음의 자격이 되는 사람에게 주신다.”X2
그런데, 오늘 그 참혹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빛을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구원받은 한편강도가 되겠습니다.
구원받은 강도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밖힌 두명의 행악자가 있었습니다.
39절에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 사람도 사실은 매우 다급하였습니다.
어떻게든지 그 십자가에서 구원을 받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다급합니까? 그래서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자 나쁜 행악자가 죽어가면서, ‘너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하라고 한다고’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은 구원을 감추십니다. 구원은 이런 나쁜 행악자에게 주려고 마련하신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때 믿음의 싹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반대편 강도입니다.
40절 41절 말씀..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즉 자신에 죄에 대한 분명한 인정과 회개와 예수님을 구주로 분명히 인정하는 고백의 믿음이 구원받은 강도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조건이 무엇이냐? 우리는 구원받은 한편강도를 보면 알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써의 자각과 회개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인정하는 믿음 이지요.
그러면서 중요한 부탁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42절 말씀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부탁은 우리 모두가 마지막날에 예수님께 드려야할 기도요, 간구요, 부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님 다시오실때에 나이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마지막 심판 때, 생명책을 보시고, 천국가는 사람을 부르실때, 나의 이름을 불러 주세요
사실, 이 한가지만 이루어지면, 그 사람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성공한 인생입니다.
완전히 승리한 인생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건강하고, 부자라도 마지막에 지옥에 가면,
거지 나사로가 볼때 부자가 지옥에서 절규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간단히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정말 알고 싶으면, ‘예수님 지옥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라는데 한번 보여주십시오’..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천국이 정말 좋은 곳이라는데, ‘예수님 한번 보여 주십시요.’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갔는데, 그 교회 정문 앞에 머리돌이 있는데 아무개 장로님 헌당..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중요해도 그렇지, 장로님 이름 세글자만 큼지막하게 교회 머릿돌에 적혀 있다니..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교회 장로님이 지병이 있어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수술하는 중에 심장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순간 난리가 났습니다. 긴급하게 조치를 하여 다시 심장이 뛰게 되었고, 겨우 수술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하면, 심장이 멈춰있었던 그 시간에 이 장로님이, 천국과 지옥을 보게 되신 것입니다.
이 장로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때 너무너무 생생하게, 천국이 너무너무 멋있습니다. 지옥이 너무너무 처참합니다.
깨어나고 난다음, 가족들에게 내가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 진짜 천구과 지옥이 있더라..
그리고 그 장로님이 내가 다시 천국가야 한텐데, 하나님의 집을 짓고 천국 가야 되겠다.
그리고 교회를 지어서 헌당했다고 합니다.
그 장로님은 그 후에도 천국에 가기를 그렇게 고대하며, 사시다가, 평안히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한편 강도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예수님께 간절히 부탁하였습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십자가에 달려서, 이제는 예수님 밖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만 부탁드릴수 밖게 없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간절하고 간절한 부탁.... 어쩌며 제일 중요한 부탁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이제 내가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내가 구원받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랬는데, 놀랐게도, 그렇게 꽁꽁 숨겨져 있는 구원,
그렇게 감추셨던, 그 귀한구원을,
예수님께서는 이 강도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43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구원받은 강도야..
이제 내가 곧 낙원에 들어갈텐데,
오늘 너가 나와 함께 그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강도는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낙원에 들어가실때, 그때 예수님 뒤따라 구원받은 강도가, 얼떨껼에 뒤따라 들어가면서,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기쁨에 겨워 어쩔줄을 모르며서
낙원에 들어가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얼떨결이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진정으로 회개를 하였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거룩한 모습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김포상도교회 모든 식구들도, 바른 믿음, 신실한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계시는 낙원에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그렇게 참혹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단 한번, 살짝, 구원의 빛이 비추었는데,
그 빛은 바로 구원받은 강도가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2.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렸습니다.
4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소의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함부러 못 보도록, 휘장을 쳐 놓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휘장을 찢으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놓으신 십자가를 통하여, 이제는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양식과 은혜와 축복을 직접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47절 말씀입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 모든 된일을 옆에서 지켜보던 백부장은, 다 알지못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사람의 사건이 아니요,
예수님은 의인이지만 죄인이 되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이구나..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고난주간을 보낼때, 구원의 빛을 보고, 구원의 빛을 맛보며 보내는 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예수님의 그 사랑, 그 은혜를 직접 체험하며 보내는 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음주 부활절에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알지못하는, 부활영생의 기쁨과 확신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올려 드리는 믿음의 구원받은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