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건강한 성도 누가복음 11장 1절 3절
2016.03.02 10:59:15 조회2457
누가복음 11장 1절 3절 매일매일 건강한 성도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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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워서 겨울이 안끝날것 같은데, 조금씩 조금씩 따뜻해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주간도 은혜 가운데 잘 보내셨습니까?
술 취한 두사람이, 철길을, 기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앞에서 기어가던, 친구가 뒤를 돌아보며 말을 합니다.
\"친구야, 사다리가 왜 이렇게 길어?\"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야~ 빨리 가자. 뒤에서 엘리베이터 올라오고 있어.\"
술취한 사람이라면, 진짜 그렇게 할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되는 유머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자기의 용량을 넘어서면, 어떤 건강한 사람이라도 탈이 나게 됩니다.
그것이 술이던
그것이 운동이던
그것이 욕심이던..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그릇, 자기만의 한계, 자기만의 용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높혀 가고, 늘려가야지...
단기간에 갑자기,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탈이 날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한계에 넘어선, 과도한 성장이, 빚어낸 명암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경제학자들이, ‘지속가능한 성장’ 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도하게 한꺼번에 성장하고, 각종 부작용에 시달리기 보다는
부작용 없이, 지속가능하게, 계속하여 성장하는 모델을 찾아야 된다...그런뜻이 아니겠습니까?
사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무리에 무리를 해서 억지로 하다가 보면,
부작용이 생기고,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답은 정해져 있다.
1. 매일매일 신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오늘말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오늘 말씀의 배경을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면,
제자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켜 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는데, 예수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오늘날도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듣게 됩니다.
저기 영이네 집은, 족집게 과외를 하는데 우리도 해야 되는 거 아닐까요?
저기 철호네 집은 땅을 100평 샀다고 하는데, 우리는 집을 사야 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을 볼때에, 비슷하게라고 하지 않으면,
나만 뒤처지고,
나만 손해보고
나만 뒤떨어지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불안해 합니다.
제자들도 좀 비슷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니까, 곧 바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기도를 배웠다는데,
예수님 우리에게도, 멋있는 기도문, 세로요한의 제자들 못지않게, 더 좋은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보통 학생들은 공부하기 싫어 하는데, 오늘 말씀보내까...경쟁심이 발동이 되니까...불안감이 발동이 되니까...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를 배우겠다고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자 기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떤분의 기도를 들으면 너무너무 은혜롭습니다.
기도하는 말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 전체가 영적으로 힘이 느껴지고, 하나님께서 귀를 귀울여 주고 계신다는 느낌이, 느껴지기 까지 합니다.
야곱이 꿈을 꿀 때,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된다고 하지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이 우리에게 내려오고,
이것이 바로 기도의 신비한 능력,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의 기도는 말은 너무너무 멋있습니다. 단어, 문장이 문법적으로 완벽합니다.
하지만 뭔가 빠진것 같은 차가움과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말은 너무너무 좋은데, 왜 기도에 힘이 없고, 기도의 능력이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까?
기도는 겉모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내가 있는가 하면,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귀울여 주시지 않는 기도는, 허공의 메아리가 되고, 중언부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는 예배는, 가인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적 예배, 잘 짜여지고 모든 것이 화려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지 않는 예배는 실패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짤막하게, 제자들에게 기도의 핵심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써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로써 가장 기본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는 의외로,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믿음..
매일매일 믿음...
찬송가에도 있습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하며 ...”
매일매일 음식을 않먹으면, 아니 한끼라도 음식을 않먹으면 몸은 바로 배고품을 느낍니다.
매일매일 음식을 않먹으면, 몸에 이상이 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매일 음식은 먹으면서, 매일매일 기도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음식을 먹으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은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육체의 양식은 꼭 있어야 되는줄 알면서
매일매일 영의 양식은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않고,
매일매일 육체의 건강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영이 건강은 중요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매일매일 신앙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번 사순절에 매일매일 기도생활을 하자고 기도표도 나누어 드렸습니다만,
왜 부활절 전에, 사순절기간 매일매일 기도생활을 하자고 하느냐 하면, 매일매일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절 그냥 맞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고난주간 그냥 맞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매일매일 기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 말씀 보지 않고, 갑지가 부활절 맞으면
부활의 그 은혜, 부활의 그 감격이, 나에게 있겠습니까?
아마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은혜, 부활의 확신, 주시려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믿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보니, 예수님은 주셔도 내가 받지 못하고,
도마처럼 부활의 확신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내 가요,
예수님 손에 못자국을 직접 만져 보고, 예수님 허리에 창자국을 직접 만져 보고,
확인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절대로 인정할수 없고요...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나를 다시 살려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데,
절대로 그것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신앙이 없으니, 중요한 그때에, 나의 마음깊은 곳에서 의심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것도 의심하고
내가 구원 받는다는 것도 의심하고, 확신이 않갑니다.
구원의 확신은, 감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셔야 받는 것이요, 매일매일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고서,
그때 내 맘대로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의심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믿음이 갑자기 생기겠습니까?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데,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주님께 너무너무 친한 사람처럼 내가 예수님을 대할수 있겠습니까?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갑자기, 한꺼번에, 벼락치기로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수 밖게 없습니다.
매일매일 신앙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2. 허망한 욕심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아가씨가, 약속시간에 늦어서, 허둥지둥 옷을 입다가,
빨래줄에서 빨간목도리를 발견하고 좋아보여서 두르고 나갔다고 합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의 빨간 목도리의 상표를 보니까 이상합니다.
“영창 피아노”...... ‘피아노 건반 덮개’ 였다고 합니다.
급작스럽게 서두르다가 황당한 경우를 겪는 것은, 생활의 에피소드 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 전체가, 허망한 욕심, 과도한 욕심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포츠, 얼마나 좋습니다. 몸을 건강하게 하면, 정신도 건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좋은 ,스포츠가 도박으로 바뀌어, ‘불법 스포츠 도박’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낚시도 그냥 낚시를 않합니다. 가장 무거운 물고기를 잡은 사람에게 상품을 주는 낚시를 합니다. 사행성 이라고 하지요. 국어사전을 보면, 요행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행자가 요행행입니다.
왜 이렇게 좋은 것들이 나쁘게 변하고 있습니까?
사회가 허망한 욕심, 과도한 욕심으로 가득차다 보니, 개개인의 판단력이 무디어 집니다.
개인들도, 허망하고 과도한 욕심의 풍조 속에, 살아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잔뜩 기대 하였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라면, 그 기도를 잘 배워서, 엄청난 축복, 엄청난 응답을 받아야 되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것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무 소박합니까?
아니 너무 야망이 작고, 꿈이 작은 것입니까?
시편 128편 1절 2절에는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생활 잘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복이 너무나 소박합니다.
나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입니다.
나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때, 그 사람을 보고, 네가 복되고 형통하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나 좋고 복된 것을 주십니다.
나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열심히 수고하면, 그곳에부터, 무궁무진한 축복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축복을 주실 때, ‘너는 복에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수 있겠습니까?
롯은 아브라함 보다 더 좋은,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척박한 땅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매일매일 믿음의 길을 갑니다.
롯은 매일매일 죄악의 길을 갑니다.
그랬더니 점점 차이가 벌어지게 되어서, 때가 되자,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롯은 불바다에서 겨우 목숨만 건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자손들이 많이 태어나고, 아브라함이 살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축복의 땅이 되어 졌습니다.
지금 당장의 현실만 보면, 분명 롯은 축복의 땅이요, 반대로 아브라함은 척박한 땅입니다.
하지만 매일매일 시간이 흐를때, 나중에 보니, 롯은 저주의 땅이 되었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척박한 땅은 축복의 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왜 이렇게, 허망한 욕심, 과도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까?
지금 당장의 현실만 보고,
현재적, 표층적, 시야만 가지고 있다보니,
깊게 볼줄 모릅니다. 조금후를 볼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를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하면, 한꺼번에 다 해결 됩니다.
조그만 하면, 큰 이익을 안겨 드립니다.
단기적 적으로 쉽게 되면, 부작용이 있을수 밖에 없는데,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안단물만 마시면, 다 해결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교회에 오면, 다 해결됩니다.
신천지 오면 천국갑니다.
아니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천국가는 것이지, 무슨 신천지에 가야 천국간다.
말이 안되는 나쁜 미혹이 아닐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어떻게 보면, 세례요한이 빈들에서 예수님 오시는 것을 준비하였던것 같이
한적한 곳에서 우리가 열심히 예배드리는 것은, 바로 매일매일 경건생활, 꾸준한 경건생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할때, 정말 나의 몸에, 나의 영혼에 유익이 되는
단기간에, 극단적으로, 사행성과 같은, 미혹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바로 그 믿음..
내손이 수고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며,
매일매일 믿음의 길을 갈 때,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 자리가 무궁무진한 하나님께서 귀귀울여 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형통의 길, 축복의 길의 출발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부활절이 하루하루 다가오듯이, 우리도 예수님께서도 하루하루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먼저 준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준비하지 못하고, 부인하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드렸던 여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않된다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인정하지 않고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세여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것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절대로 못믿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믿음의 준비를 않으면..
고난주간 되어도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네 먼산에 구경하듯...지나가게 됩니다.
그 당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먼산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고난주간에 그럴수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며 걸어가시던 그길을 직접 걸어가보니까....
또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 자리
예수님께서 내려져서 들어가던 그 무덤을 보니...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했다고 천사가 말하던, 그 자리를 만나고서는, 나도 모르게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부활절 되어도 나는 못믿겠네,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였는데, 그때만 못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부활절이 되어도 예수님께 관심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똑같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주님 십자가 따르는 사람이 주님 제자요..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이, 나중에 주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허망하고 과도한 욕심에 잡혀있는 세상을 뒤로하고, 매일매일 예수님을 향하여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사회는 과한욕심과 허망한 요행이 일반화 되고, 풍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사순절 기간동안
매일매일 영의 양식을 먹고, 영의 체질이 바뀌어..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고,
아브라함 처럼 이시대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건강한 체질, 건강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