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는 십자가 로마서 1장 10절 20절
2008.10.11 14:17:01 조회5088
로마서 1장 10절 20절 부끄럽지 않는 십자가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저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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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속담에는 1·년을 내다보는 사람은 ‘밀’을 심고, 10년을 내다보는 사람은 ‘나무’를 심지만, 100년을 내다보는 사람은 ‘사람’을 심는다. 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중 하나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준비하지 않습니다.
‘임기응변’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다 보니, 즉흥적으로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곧 또 다른 곳에서 땜질한 부분이 터져서,
실속이 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 근심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길때에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길을 열어 달라고, 매어 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고비가 넘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자기 길로 바쁘게 살아갑니다.
이러한 신앙을 ‘제자리 걸음 신앙’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의 달을 맞이하여, 나의 신앙을 점검하며, ‘제자리 걸음 신앙’보다는 ‘성장하는 신앙’, 복음의 진보가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복음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오늘날 세계는 유럽, 서양, 영미 세계가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오늘의 서양이 있게 한 사람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사도바울의 법이해, 윤리, 그리고 세계관은, 오늘날 서양의 법, 윤리, 세계관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러한 사도바울의 중요한 부분들이 함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사람에 대한 평등한 이해를 제시하였습니다.
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그 당시 헬라인은 스스로를 문명인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인이 아닌 사람은 야만인이라고 하여, 똑같은 인격적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당시 헬라인들은 지혜를 숭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리섞은 사람은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요즈음도 이러한 생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미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자들은 무시합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평등하고 귀한 존재임을 교훈 하였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섞은 자...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귀한 생명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날 세계를 떠 받치고 있는, 사도바울의 중요한 사상들은,
사실, 복음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위대한 사상들은, 다름 아닌, 사도바울의 신앙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즉 사도바울이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때에, 사도바울은 세계를 새롭게 세워나가는 위대한 사상을 세워 나갈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는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오늘날도 복음에는 세상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을 찾지 않아서 그렇지, 복음속에는, 오늘날도 세상의 구할, 지혜와 능력이 숨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처럼,
오늘날도 복음을 전하고, 복음속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 복음속에서, 참 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13절에는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만, 그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배편이 막힙니다. 길이 막힙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이것은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쉽게 자기합리화를 하고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막히면 돌아서라도 악착같이 힘을 써서, 복음이 열매 맺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요즈음 ‘디지털치매’라고 하는 신종 용어가 있다고 합니다.
디지털기기에 자신의 기억을 저장해 두고, 디지털기기를 이용하여 지적인 활동을 하다보니,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전화번호, 10개 20개 정도 외우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전화번호를 그렇게 많이 외우는 사람들이 잘 없습니다. 다 핸드폰에 저장하고, 사람이름을 눌러서 찾아서 전화를 겁니다.
옛날에는 암산도 하고 주판을 하면서, 금방 계산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계산 할 일이 있으면, 전자계산기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핸드폰의 단축키가 없으면, 전화도 못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계산기가 없으면 계산도 못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도 이렇게 뒤걸음질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옛날에는 박해가 심했습니다. 예수 믿으려면, 생명을 걸고 믿어야 했습니다.
또 복음을 전파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는 텔레비전만 켜먼, 설교가 나옵니다. 라디오만 켜면 찬송이 나옵니다.
전도도 전도지만 전해주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분명 좋은 복음의 통로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장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한 관심이 있기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도바울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복음 전파하는 것을, 로마교회 성도들이 잊지 말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은 복음에 대한 관심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가까이만 두는 복음이 아니라, 수고로이 내것으로 만들어, 내가 고백하고, 나의 신앙으로 만들어 나가는,
복음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2. 복음에 대한 기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6절 17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요즈음 어머니들이 이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며느리는? -좀도둑
딸은? -예쁜 도둑
아들은? -큰 도둑 이라고 합니다.
은근히 가져가고, 예쁘게 가져가고, 대놓고 가져가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하는 행동은 도둑이나 다를게 뭐있겠느냐?는
사랑의 푸념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16절에 사도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부끄러워 할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모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을 부끄러워 하던 어린시절을 잊어버릴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안기라도 하면, 싫다고 화를 내는 것이 어린이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장군처럼 멋있게, 번쩍 거리는 값옷을 입고, 나쁜 사람들을 죽이고 승전가를 부르시면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잡혀서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갖은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나를 향하여 창을 들고 있는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
한사람이라도 할수만 있다면 더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참으시며 죽어가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부끄러워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과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메시야인가 고개를 저었던 것입니다.
자 과연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것이 부끄러운 것입니까? 우리를 구하시려고, 죽으셨는데, 과연 그것이 어리섞은 것입니까?
6.25 동란때, 중공군이 몰려와서, 추운 겨울에 모두가 덜덜 떨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미국 사진기자가 급하게 차를 모는데 언듯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차를 멈추고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에 찾아 보니, 다리 밑에서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얼른 가보니, 한 여자분이 엎드려 있는데, 그 추운 겨울날, 알몸으로 엎드려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여보세요 말을 붙혀보니...벌써 꽁꽁 얼어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갓난아이 목소리는 어디서 낫지? 하며 살펴보니... 이 여자분 품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갓난아이는 얼마나 옷을 많이 감고 있는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피난을 하다가, 어머니가 산통이 와서, 다리밑에가서 해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력을 모두 소진한 어머니는, 힘이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죽기전에 자기의 옷을 벗어, 태어난 갓난아이가 얼어죽지 않토록 하려고,
싸고 또 싸고...그러면서 자기는 그만 얼어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안타까운 모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고 합니다.
갓난 아이를 살리고 죽은, 이름없는 그 어머니....
그 어머니가 다리밑에서 죽었다고, 부끄럽다고 하겠습니까?
그 어머니가 다리밑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어리섞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합니다. 이름없는 그 어머니의 사랑...
자신은 죽으면서 아이를 살려낸 그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고, 이렇게 살아나서, 세계와 어깨를 겨누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 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할수 없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예수님의 오래참으심은 약하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시려는 사랑의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사도바울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났고, 우리의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는 말씀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래서 이 17절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깨어지고, 또한 루터 마저도 이 말씀에 크게 은혜를 받고, 종교개혁의 횟불을 높이 들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즐거워 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분명히 고백하고, 이 믿음위에 확실하게 살아가는,
십자가 신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복음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9절 20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시장입구 옷가게에 앵무새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아주머니가 그 옷가게를 지나칠 때면, 이 앵무새가 소리를 지릅니다.
“아줌마 살빼요.~~”
“아줌마 살빼요.~~”
않그래도 살이 쪄서 스트레스인데, 앵무새까지 그러니까 너무너무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그가게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앵무새 단속 좀 하세요.. 않그래도 살쪄서 그런데, 앵무새가 그러니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아세요?”
다음날 시장에 갔는데, 어떻게 했길래, 앵무새 가만히 있습니다.
앵무새는 이 아주머니를 보고도 꾹 참고 말을 아낍니다.
시장을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 뒤를보니 앵무새 조용히 말합니다.
“아줌마..”
이 아주머니가 긴장을 하고 귀를 귀울이니까? 한마디를 더합니다. “말 않해도 알지?”
사실 말해야만 압니까?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말 않해도 다아는 사실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 오르는 것은, 꼭 말로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누구나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직접 볼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19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듬어 알수 있도록, 생명의 신비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주의 질서를 보여 주셨습니다.
태어나면 죽고, 하나님 앞에 가야만 하는 것을, 더듬어 알수 있도록 힌트를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20절에는 말씀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은총의 파편들이 자연모든 만물 가운데 있기에,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살아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때, 핑계할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노회 미자립교회 선교대회에 잘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선교대회하는 동안, 저는 특별하신 목사님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서울대학 공학과를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금성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계시다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키도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학력도 우리나라 최고가는 대학을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연구원으로 일하는데, 눈이 침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병원에 갔더니, 눈 뒤편에 염증이 왔는데, 고칠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시신경이 하나씩 죽어갑니다. 하루가 지나면 더 어두워 집니다. 이틀이 지나면 더 어두워 집니다.
그리고 얼마후 완전히 시신경이 죽어서 맹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기면 뭐합니까?
서울대학을 나오면 뭐합니까?
앞이 않보이니, 이제는 화장실도 혼자서는 못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잘나갈때는 예수님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바뻐서, 하나님 만나는 시간조차, 아깝끼 까지 합니다.
하나님께 나올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력 하나만 거둬 가셨는 데도...
서울대학 나온것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오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되기 전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심지어는 불치병에 걸리고, 죽게 되었을 때에야...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허망한 것, 부질없는 것을 가지고 애지중지하며,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될 때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낙망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빛을 보고, 복음을 쫓아 살아가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컴퓨터 지식으로, 다른 맹인들을 위하여, 점자 프로그램, 점자 성경, 점자 사전 등을 만들어 보급하시고, 또 맹인선교회를 만들어 많은 맹인들을 도우면서
누구보다도 밝고 즐겁게 살아가시고 계십니다.
“태어날때는 순서대로 태어났지만, 죽을때는 순서대로 죽지 않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어느 노인대학 표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늙었다고 괄시 말아라. 늙었다고 먼저 죽는 것이 아니니...
마지막 까지 배움을 길을 놓지 말아라“고 하는 것이, 그 노인대학 교훈이 라고 합니다.
죽음앞에서 핑계하는 것 만큼 어리섞은 일도 없다 하겠습니다.
또한, 심판대 앞에서 핑계하는 것 만큼 어리섞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 신앙으로 지혜있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 가고 있습니까?
복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십자가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능력, 나의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핑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말론적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 성도님으로,
바울이 서양역사를 신앙위에 세워 내었던 것 처럼...
복음을 통하여, 가정을 세우고, 나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은혜의 한주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