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누가 있습니까 사도행전 19장 1절 13절
2008.07.19 15:25:47 조회5207
사도행전 19장 1절 13절 뒤에 누가 있습니까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
어떤 한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그것도 주일날,
술이 잔뜩 취하여서, 교회의 문을 마구 두드리며,
막무가내로 교회에 들어가려 했다고 합니다.
마침 이 모습을 본, 관리집사님이, 급하게 뛰어와서 묻습니다.
\"아니 이 양반이, 이 아침에 누구를 만나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그러자 술취한 사람이 말합니다.
“네...나 말이예요...예수님을 만나로 왔습니다. 왜요...”
그러면서, 본당 문을 막흔들어 됩니다.
관리집사님이 급한 김에, 그 앞을 막아서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분으니, 딴데 가서 알아 보세요..\"
상황은 급하지만, 지킬 건 지켰어야 되지 않았나,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날 우리시대는 너무나 바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것은 오히려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우리를 세우는, 지켜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가정, 신뢰, 사랑, 믿음, 신앙....
바뻐서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놓치면 않될 것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두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술하는 사람. 성령의 사람 바울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마술하는 사람은, 바쁜 이시대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 소중한 것이 따로 없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됩니다. 이것도 따라하고, 저것도 흉내내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믿음은 배우지 않고, 귀신쫓는 것만 따라하려고 하였던 사람이,
바로 마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성령의 사람,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제일 귀한줄로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례를 베풉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대적하는 악한 사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분명한 차이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사람, 바울에게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병든 마음이 고쳐집니다. 강팍한 사람들이 새롭게 변합니다. 귀신이 쫓겨 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 마술하던 사람들도 따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을 향하여 말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명하니 귀신아 물러가라..”
마침, 옆에 있던 스게와의 일곱아들들도 덩달아 따라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명하니 귀신아 물러가라..”
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따라한다고, 비슷하게 보인다고, 성령님의 역사도 동일하게 나타났겠습니까?
비슷하지만, 가짜 짝퉁 상품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비슷해서 삿지만, 품질이 형편없어서 다시보니까? 짝퉁 가짜 상품이었던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하게 흉내내는 사이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경건의 영성, 섬김의 영성, 그리고 능력의 영성은 따라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그럴듯 해도, 곧 들통이 나고 만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술하는 사람들이 외첬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명하니 귀신아 물러가라..”
그럴때, 악귀가 나타나서 말합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
그러면서 악귀가 달려들 때에, 마술하는 사람들이, 스게와의 일곱아들들이, 악귀에게 사로잡혀서, 미쳐서, 옷을 벗고 도망다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참혹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진정한 경건과 헌신과 기도는 없이, 경건한 척, 헌신하는 척, 기도하는 척 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의 고백은 없이, 예수님의 능력만 누리고자 하는, 욕심만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차이는 한가지입니다.
그 뒤에 누가 있느냐 ?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바울 뒤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럴때, 바울은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이 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술하는 사람뒤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럴때, 사단에게 사로잡히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7월들은 수련의 달입니다.
나의 신앙을 점검하고, 나의 신앙을 더욱 성장시키는 수련의 달입니다.
예수님의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만을 붙잡는,
신앙을 다시한번 세워야 하겠습니다.
1. 건강한 사람, 신앙의 사람은 내 뒤에 예수님이 계시는 사람입니다.
4절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을때 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신들을 소개할때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좀더 물어 보았습니다.
성령님을 아는가? 그러니까 성령님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아는가? 그러니까 예수님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본은 없이, 결과만 거두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없이, 형통만 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 세례만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부인하면서도,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데로, 남을 판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섬김이 없습니다. 헌신이 없습니다.
나만 옳고 나만 높습니다. 나만 좋으면 최고이고, 나만 만족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자기의’에는 ‘이기주의적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런분들 뒤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교만과 허위만이 가득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는 다 똑같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히게 되어집니다.
그렇지만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병원심방을 하게 되었는데, 은퇴하신 교장선생님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얼굴에 병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입은 돌아가고, 한쪽 볼은 완전히 내려앉아서 잘라내었습니다.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특수효과를 보는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는 딸이 한명있었습니다. 나이는 벌써 50대 초반,
얼마나 아름답고 예절바른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혼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은퇴하신 교장선생님은 딸에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문학을 가르치고, 시를 가르치고,
하지만 대리고 오는 남자는 번번히, 마음에 않들어하며 퇴짜를 놓았습니다.
“저런 녀석과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그러다 보니, 이 딸의 나이가 50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나이많은 따님 여집사님은,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를 망친 아버지...
나의 인생을 망치 아버지...
그러고 한참 아버지를 미워하다가, 아버지가 병으로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완전히 변해버린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모습은 사라지고, 너무나 흉측하고 불쌍하게 변한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용서하며 심방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딸이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겠다고, 늦게서야, 후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도바울이 요한의 세례만 받고, 이젠 됬다고 하며, 거기에 멈추어 서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세례요한이 고백을 전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내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은 세례요한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볼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뒤에 오시는 예수님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흥하고, 자신은 망하여야 되겠다고 까지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까지 예수님을 향하여 고백할수 있었겠습니까?
근본이 원칙에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예비하는 사명위에 바로 서 있을때, 세례요한은 가는길이 분명하였습니다.
하는 일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흔들림 없이 외칠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을때, 흔들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상황이 좋아지면, 모든 행복은 자기의 것인양, 좋아하고 교만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인양, 슬퍼하며, 좌절 절망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주...
일어나 걸어나 내가 새힘을 주리라..
일어나 걸어나 내 너를 도우리...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내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분명히 바라보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2. 건강한 사람은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9절에서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장마철이라 비도 내리지만, 몇일 가지 않으면, 정말 뜨거운 여름날이 시작될것 같습니다.
겨울보다 당연히 여름이 좋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뜨거운 여름날을, 건강하게 잘 보내어야 하겠습니다.
배탈이라도 나면, 아주 애를 먹게 됩니다.
더위라도 먹게 되면, 밥맛이 뚝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뭐니뭐니 해도, ‘밥이 보약’이라는 옛말이 하나 틀린것 같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밥맛이 좋습니다.
밥이 맛있기 때문에, 잘 먹어서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아무 반찬이라도 맛있고, 밥맛이 있고, 밥을 잘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의 척도 중에 하나는, 밥맛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에도, 밥에 비유되는 상징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말씀의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9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 꿀과 송이꿀 보다 더 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열심히 하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9절 상반절에는 그 반응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그렇습니다.
얼마나 귀한 복음...이 복음을 전하였는데, 사람들이 반응이 냉담합니다.
다들 얼음처럼 마음이 굳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다.
자 이럴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뒤에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기대하였던 되로, 결과가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담하고 딱딱한 상황과 맞추치게 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사도바울은 신앙이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더욱더 말씀에 의지하여, 변함없이 말씀으로 살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9절 하반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더욱 궁리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을 잘 전할까? 하여,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어 놓습니다.
“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여기에서 두란도 서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열심히 전하게 될 때, 좋은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를 2년동안 꾸준히, 할때에,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해 보고, 않되는 것 같다고 하며, 곧 낙심하는 잘 못을 범해서는 않되겠습니다.
2년 3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할줄 아는, 오래참음의 은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 이렇게 될 때, 더욱더 변화는 크게 진행되어 집니다.
10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에 손은 능력의 손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커피의 프리미엄’이라 자부하던 스타벅스가 최근의 실적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는 한국에서 100호점을 열면서, 문화를 오감의 커피로 전한다고 자신만만 하였는데는, 그 스타벅스 커피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스타벅스커피는 지난 4년간, 커피 이외에, 영화와 음반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더욱 잘될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엄청난 실적 악화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스타벅스’는 회개하고, 영화와 음반 사업을 정리하고, 다시 핵심사업이었던, 커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경영학에서 핵심을 놓치면, 근본이 흔들린다는 말있습니다.
심지어는, 요즈음 경영학에서는 핵심을 소홀히하면 위기를 만난다고 까지 쓴소리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내가 건강하다고, 잘 된다고, 딴딴하게 굳어져서, 말씀을 멀리하면 않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도 예수님, 둘째도 예수님..
잘 되어도, 심지어는, 잘 않될때까지도, 오히려 꾸준히, 말씀대로 살아갈 때..
길이 열리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잘되어도, 않되어도, 심지어는 꽉 닫혀도,
끝까지 말씀으로 살아갈 때, 길이 열리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사도바울의 손에는 능력이 임하기 시작하였던것 같이..
이르듯, 사도바울은 말씀으로 인내하고, 수고의 댓가를 지불할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단과 수련의 기간을 소홀히 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오늘날도 길을 열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믿음의 사람, 성장하는 사람은, 끝까지 말씀으로 살아갈줄 아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혼란한 시대입니다.
내 뒤에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계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말씀으로 살아가는 믿음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분명한 믿음위에 설때에,
믿음이 성장하고, 생활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김포상도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