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걸림돌 로마서 9장 30절 33절
2008.07.12 23:43:04 조회6730
로마서 9장 30절 33절 은혜의 걸림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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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학교에, 대단히 엄격한 교수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시험을 치는데..... 땡소리가 나도, 계속하여 답안을 적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이 학생을 무시하고, 교실을 나서는데,
이 학생이 황급히 답안지를 가지고 나옵니다.
교수님이 말합니다. “굳이 답안지 낼 필요가 없네, 학생은 빵점이야..”
그러자 학생이 말합니다. “교수님,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교수님이 단호히 말합니다. “학생이 눈군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자네가 대통령 아들이라고 해도, 나는 개의지 않는다네...자네는 무조건 빵점이야..”
학생이 정색을 하면서 다시 묻습니다.“ 교수님..정말 제가 누구인지, 정말 전혀 모른다는 말씀 인가요?”
교수님 근엄한 얼굴로 대답니다. “ 정말 나는 학생이 누군지 모른다네..”
그러자 학생이 씩~ 웃더니 말하더랍니다.
“교수님께서, 제가 누군지 모르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는 쑥...답안지 사이에, 자기 답안지를 쑤셔 놓고는 횡~하니 도망가 버렸다고 합니다.
누구나 급한 일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어려운 일 난처한 일....
어떤 사람은 재치와 지혜로 잘 넘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 난처한 일을 당할 때, 그 일을 수습하지 못하고, 크게 상처받는 사람들도 생기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걸림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셨습니다. 물론 이 바위는 예수님이 되겠습니다.
그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이 바위에 부딪쳐서 크게 깨어지고, 은혜의 길에서 탈락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오히려, 순전한 마음으로 믿음을 가질때, 거치는 바위는 걸림돌이 아니라, 은혜의 돌이 되어,
믿음이 반석위에 서게 되는, 의인의 삶, 복음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걸림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습니까?
똑같은 걸림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 나아가게 되었습니까?
7월달은 수련에 달입니다.
나의 믿음과 신앙이 더욱 자라고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마음의 넓이가 더욱 깊어지고 크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성숙한 사람, 믿음의 사람은, 걸림돌이 은혜의 돌이 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길에서, 걸림돌을 만날 때, 그 걸림돌을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상처받고 주저앉아서,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의 길에서 걸림돌을 만나서, 넘어지고, 상처받게 되지만,
툭툭~~ 털고 곧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 식구들은, 다 걸림돌에도, 툭툭~ 털고 일어나는, 마음이 넓고, 믿음이 깊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첫 번째로, 걸림돌을 믿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걸림돌을 시온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 걸림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전혀 달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이 걸림돌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행위로, 이 걸림돌을 맞이하였습니다.
믿음은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행위는 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 나의 힘, 나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지만 행위의 기준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할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너무나 간단한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를 의지하여 걸림돌 앞에 설때에는, 나의 능력으로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무릎에 생채기가 나고, 손바닥에서 피가 납니다.
그럴때, 주저앉아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울고 불고....걸림돌을 탓하면서, 한동안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에 의지하여 걸림돌 앞에 설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무릎에 생채기가 나고, 손바닥에서 피가 납니다.
하지만, 주저앉아서 울기만 하지 않습니다.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걸림돌을 탓하고 앉아 있지만 않습니다.
곧 일어 선다고 하는 것입니다.
걸림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당연히 누구나 만날 수 있습니다.
또 걸림돌에 걸리면,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 속에는 무엇이 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행위가 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이 더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믿음이 더 있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마음을, 믿음으로 더 채우시기 바랍니다.
나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때에는, 나의 눈으로 밖에는 볼수 없습니다.
나의 능력 만큼 만 생각하게 되고, 나의 힘 만큼만 성취할수 있게 되어 집니다.
성경에는 행위로 살았던 사람과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울왕과 다윗왕도 그들중에 하나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한번은 블레셋이 전쟁을 걸어 왔습니다. 그 유명한 골리앗 장군이 나왔습니다.
키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골리앗 장군의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뚝뚝 떨어집니다.
그대로 방치할때는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때, 어린 다윗에 골리앗을 쓰러뜨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사울왕이 이런 다윗에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 넌 어린아이인데,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 ” 그리고 무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칭찬해 주고, 나가서 싸울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사울왕은 친절하게도, 자신의 갑옷을 다윗이 입도록 배려를 해 줍니다.
사울왕도 신장이 만만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갑옷을 입은 어린다윗이 어떠 하였겠습니까?
이때, 다윗은 그 값옷을 다시 벗어 버립니다. 그리고 큰 무기들도 놓아 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평소에 목장에서 사용하던, 늑대를 쫓고, 곰을 죽이던, 물매를 들고 나아갑니다.
이때 다윗은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렇습니다. 칼과 창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하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면, 이기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힘이 없어 쓰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악하고, 죄가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치실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넘어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그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앞에 잇는 골리앗, 거대한 거치는 돌입니다. 그 돌 앞에서는 사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도무지 나아갈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의 손에는 물매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그 물매를 돌릴때,
골리앗의 거대한 몸은, 무서움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골리앗이 거대하였기 때문에, 더 쉽게 맞힐수 있는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은 승리할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에서 믿음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때, 거치는 돌을 뛰어 넘을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 긍정적인 마음에 머물러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알고, 칼과 창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으로 더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거치는 돌은, 믿음으로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능력과 나의 힘은 할수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능치 못한 것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거치는 돌을 맞이 하여야 하겠습니다.
2. 걸림돌을 은혜의 돌로 바꾸어야 합니다.
3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
세상 사람들은 걸림돌을 피하는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세상사람들은 걸림돌을 이기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아닙니다.
걸림돌을 믿음으로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더 나가서, 걸림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걸림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았던, 사도 바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는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로 걸림돌이었습니다.
이 걸림돌만 없으면, 참 좋을 테데, 번번히 이 ‘육체의 가시’ 때문에,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부끄럽기도 합니다. 스스로도 힘들고 고생스럽습니다.
또 무슨일을 하려면, 꼭 이 ‘육체의 가시’가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십시옵소서...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하십니까?
이렇게 괴롭기도 하고, 아쉬운 ‘육체의 가시’가 없으십니까?
누구나 한두가지, ‘육체의 가시’가 있기 마련입니다.
건강이 더 좋았으면,
돈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자식들이 속만 썩이지 않았으면....
누구나 한두가지, ‘육체의 가시’가 있기 마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또한, ‘육체의 가시’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이 ‘육체의 가시’만 없어지면, 너무나 좋겠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리라. 작정하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시옵소서’
자 어떻습니까? ‘육체의 가시’가 없어지는 더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까?
걸림돌이 없어지는 것이, 진정한 복이 되는 것 입니까?
사도바울이 간절히 기도할때에, 주님께서 응답을 주십니다.
그 응답을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렇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너무 괴로워 사도바울은 ‘사탄의 사자’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크게 깨달아, 사도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거치는 걸림돌 때문에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걸림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열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만약, 계속하여 그렇게 잘나고, 고집을 피웠다면, 그는 예수님을 훼방하는 죄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시력이 희미해 졌습니다. 세상의 권세를 버렸습니다.
그럴때에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뻐덕뻐덕한 나를 그냥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물을 붙고 이겨서, 부들부들 한 진흙이 되어질 때에, 마침내 사용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형체대로, 나를 빚으십니다.
그래서 보배로운 복음을 담고, 영원한 영생을 담을 질그릇으로 나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제는 질그릇도 그냥 질그릇이 아닙니다.
보배를 담은, 보배 그릇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는 ‘걸림돌’을 그냥 ‘걸림돌’ 이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시온에 서 있는 ‘바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걸림돌’이 ‘시온의 바위’가 되어 집니까?
세상으로 볼때는 ‘걸림돌’은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그냥 ‘걸림돌’일 뿐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보니 ‘걸림돌’은, 그 앞에서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 세워져 있는 ‘시온의 바위’ 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걸림돌’ 정도가 아닙니다. 얼마나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셨는지 모릅니다.
부끄러운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의 욕과 수치를 다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해 지심으로, 강한 세상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심으로, 세상의 강함을 이기셨습니다.
꺽어야,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질때,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제일 큰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낮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걸림돌’을 꺾을때,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걸림돌’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찾을때에, 예수님 안에서 내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승리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승리하였는가?
히브리서 11장은, 그 이유에 대하여, 단 한가지로 간략하게 적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모두, 믿음으로 거치는 돌에서 승리할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11장 끝부분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떤 ‘거친돌’들 앞에서 승리하였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 많은 ‘거친 핍박과 고난’ 을 맞닦드릴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고난속에서, 천국을 향하여 활짝 열려 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길 끝에 있는 ‘천국문’ 앞에는, 두손을 활짝 펴고, 맞이하시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은, ‘거친돌’ 위로 열려진 ‘천국길’을 볼수 있었기에,
구차하게 풀려나려 하지 아니하고, ‘순교의 길’로 찬송하고 기쁘게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고 순교하는 것이,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 입니다.
스테반 집사님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때에, 드디어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스테반 집사님이 눈을 들어 보니, 승리의 면류관을 들고 스테반 집사님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이 서계신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스테반 집사님이 말씀하였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리고 스테반 집사님은 천사의 얼굴로,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걸림돌’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걸림돌’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발견해 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혹시 ‘걸림돌’들이 있으십니까?
‘걸림돌’을 ‘은혜의 돌’로 바꾸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있는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찾아와 주십니다.
상처난 곳을 어루만져 주시고,
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이후로, 이제 혼자가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가는 길입니다.
걸림돌을 만나면,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넘어지십니다.
일어설때에는, 예수님께서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래서 ‘걸림돌’ 많은 이 길이, 이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은혜의 길이요..
천국으로 향하는, 믿음의 길, 천국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으로 ‘걸림돌’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걸림돌’이 있으면, ‘은혜의 돌’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그 길은, 천국길이 되어 집니다.
이제는 주님과 함께 걸림돌은 발고, 천국으로 향하여, 힘있게 걸어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