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꼬 사도행전 2장 36절 47절
2008.03.29 19:16:23 조회5654
사도행전 2장 36절 47절 어찌할꼬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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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있는 이름중에, 늘 자신을 봐 주기를 원하는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넌센스 문제입니다.
정답은 바라바....바라바... 나만 바라보라는 음역에서 나온 답이 되겠습니다.
또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이름중에, 시험만 치면 모두 100점을 받는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넌센스 문제입니다.
정답은 미리암....미리암....‘미리 다 알기 때문’에 시험만 친면 100점이라는 유머입니다.
오늘 오후에 진행되는 ‘부활의달 기념 성경퀴즈대회’ 맛을 한번 보았습니다.
지난 주일, 부활절은 너무나 은혜롭게 보내었습니다.
될수만 있다면, 모두 나와서, 함께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은혜의 주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부활절도 중요하지만, 부활절 다음에, 신앙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왜 부활절 다음에 신앙생활이 중요한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몸의 힘도 문제이지만, 마음의 에너지도 문제입니다.
에너지의 방향이 잘못되어, 교만과 태만으로 흐를때, 사람은 넘어지게 될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실 때, 제자들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신 권능의 모습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럴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 알아서 아시겠지...하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가만히 있어도, 예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시겠지...그렇게 손놓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을 볼때, 사도들은, 더욱 복음의 증인이 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아가는, 철저한 믿음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은 사도들에게 임하여, 더욱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부활절을 은혜중에 잘 보내었습니다만,
더욱 믿음생활을 잘 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능력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1. ‘어찌할꼬’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37절 3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타성과 교만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지름길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12 에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지금 처럼 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교만한 생각.....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하는 태만한 생각은, 결국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만하고, 태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고, 또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에는 나무에 달리는 것을 저주라 하는데, 어떻게 저주의 자리에 서는 사람이, 우리의 메시야가 될수 있느냐?
또 율법대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아무일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날에도 사람을 살리시고 고치시는데,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메시야가 될수 있느냐?
그리고 교만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또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 않겠는가?
자 이 말씀들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증인이 되면서,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전합니다.
여러분들이여. 성경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리섞게 십자가에 못밖 았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이며,
그 예수님께서는 이제 부활하셔서, 우리의 심판의 주가 되셨습니다.
자 이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찌 할꼬.... 우리가 어찌할꼬..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았는데...우리가 어찌 할꼬......
요즈음 중국에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난징에는 ‘눈물 방’이라고 하는 신종산업이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울고 싶어도, 울움을 잊어버린 시대가, 오늘 우리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울고 싶어도 분위기가 않잡히는 문화가 우리의 문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곳에 가면, 바로, 마늘, 고춧가루, 심지어는 최루가스가 나와서, 펑펑~ 울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합니다.
요즈음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우는 것을 보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너냐고....억울해 하는 것은 쉽게 보는데...
정말 내가 잘못 되었다고, 어찌할꼬 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성경에는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찌할꼬 하며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
또 눈물을 흘리며 상한심령으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구역장님이었는데, 얼마나 점잖은지 모릅니다.
평소에도 꼭 시간을 정하여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하였는데, 하루는 찾아와서 기도부탁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 아들이 돌아왔는데... 우리 아들을 위하여, 기도부탁을 드립니다....’
깜짝 놀라서 물어보았습니다.
‘집사님. 기도 많이 하시잖아요...그래, 어떤 기도제목 이신가요?’
이 집사님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똑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큰 증권회사에 입사를 하였는데, 승진을 하였습니다. 승진을 하니까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같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아들 얼굴 보기가 어렸습니다.
어느날, 증권가에 찬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관리하던 증시가 뚝뚝 떨어집니다.
떨어진 것을 매꾸려고, 사채를 빌렸습니다.
그런데 사채이자가 얼마나 불어났는지, 몇천만원 빌렸다가, 수억원 하는 집을 다 날리고도, 아직도 이자를 갚으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내로 부터는 이혼을 당하고, 사채업자들에게는 협당을 당하고...
집을 다 잃고, 도망다니다가...임대주택에 사는 어머니에게 찾아와서...
“어머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머니 나는 죽고 싶어요...”
그럴때, 이 집사님 아들을 안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제 기도해 보자...그래 이제 하나님께 기도해 보자...”
다음 주일, 이 집사님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목사님...우리 아들이, 교회 나와서 예배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다음주일, 이 집사님 찾아와서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아들을 협박하던 사체업자들이, 오히려 지명수배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아들도 예전처럼, 다시 성경말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는, “어찌할꼬” 하는 자리입니다.
마음이 찔려, 어찌할꼬 하는 그 자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아무렴 어떠냐고, 찬송도 잊어버리고, 기도도 잊어버리고, 말씀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나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나의 모자람을 볼줄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직 괜찬타고 할것이 아니라...
먼저 기도의 재단을 쌓고, 어찌할꼬 하고, 먼저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믿음에는 선물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어찌할꼬’ 하는 다음에야...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은혜가 시작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 충만을 위하여, ‘죄의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자리’로써 ‘어찌할꼬’ 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2.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생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42절에서 43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죠다시’ ‘보이런던’,‘언더우드’ 유명했던 ‘패션브랜드’ 이름들입니다.
한때는 너무나 유명했는데,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진, 상표들입니다.
저도, 논노패션의...마르시아노 바바리가 그렇게 멋있게 보여서, 돈을 아껴서 구입한 적이 있는데...요즈음 보면, 얼마나 촌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사야 40:8에는 말씀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당시 그리스인이 되는 것을, 문화인이 되는 것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또 로마인이 되는 것은, 출세하는 것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화적으로은 헬라의 각종 문화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또 돈을 주고라도 할수만 있으면, 로마인이 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살아야할, 새로운 삶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찬식에 참석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말씀도 봅니다. 찬송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세례받은 사람이 3천여명...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제 세상과는 다르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혀 세상과는 다르게, 복음으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사도들이 가르치는 성경말씀을 배웁니다.
성도들이 되어, 서로 교제합니다.
또 모여서, 떡을 떼며, 오르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예수믿는 사람들은 문화가 바뀌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음식,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게 믿음생활 하며, 그것을 기쁨으로 삶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끔씩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세상의 친구들과 얼마나 틀린지....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집사님과 함께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자동차에 기름이 다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는데...
주유소 직원이, 교회마크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와서, 옆에 앉아 있는 집사님에게...말합니다. “목사님...얼마를 넣어 드릴까요? ”
목사님이 얼른 대신 말합니다. “ 3만원만 넣어 주세요”
그러니까 직원이 말 하더랍니다. “아... 사장님이 계산하시는가 보지요?”
그래서 이 목사님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집사님은 목사님으로 보이고....자신은, 사장님으로 보였다니....
내 얼굴이 사장님 얼굴인가?
오늘 말씀에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다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사도의 가르침에 귀를 귀울이고,
성도로써 교제하고,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하는 것을 힘쓰고...
자 이렇게 교회 다웠더니... 교회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43절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교회가 교회 다울때, 하나님의 교회에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과 능력이 나타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 다울때,...
성도가 성도로써 살아갈 때...
성도에게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과 능력이, 나타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스러운 말씨는 쓰면 않되겠습니다. 저주스럽고, 악한 말씨는 사탄이 기뻐하는 말씨입니다.
마음이 정한바 되지 못하여, 바람에 나는 겨와같이 흔들리는 것은, 악인의 마음이라고, 시편 1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롭고, 복되고, 거룩한 것은 전혀 없으면서, 어떻게 거룩하고 복된것이 담겨지기를 바랄수 있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을때,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헬라의 문화도 아니요. 로마의 풍습도 아닙니다.
세례받고, 말씀듣고, 기도하고,
성도들이 떡을 떼며, 믿음으로 교제할 때...
기사와 표적과 능력이 나타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3. 칭송을 받게 되는 믿음입니다.
46절 47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자 이렇게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으로 살아갈 때,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다고, 존경받는 것 보셨습니까? 아니요..특검을 당하고, 불려다니고, 신문에는 거의 뒷집 아저씨 대우도 못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권력이 많다고 존경받는 것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아무도 존경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관계에는 4가지 패턴이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나죽고 너 죽자’의 관계입니다.
저는 실예를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않믿는 사람들이 부부싸움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나 살고 너 죽어라’의 관계입니다.
범죄 심리...아니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사회의 내면화된 심리가, 바로 이 심리가 아니겠습니까?
셋째는 ‘나 살고 또 너도 살자’는 관계입니다.
새로운 대안으로, 상생, 번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패턴에서는 아무리 잘해도, 절대로 존경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인간관계 패턴이 있습니다. 바로 ‘나 죽고 너는 살고’의 관계입니다.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나는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관계입니다.
존경은 이 관계에서만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그렇습니다. 네 번째 관계패턴은 ‘하나님 나라’에 ‘관계패턴’ 이라 하겠습니다.
네 번째 ‘관계패턴’ 있는 곳에는 존경과 사랑이 시작됩니다.
교회에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네 번째 관계가 지배할 때, 존경과 사랑과,
점점 더 성도의 수가 더하는 역사가 일어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부터 하라..동시에 하자...뭐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던, ‘나는 죽고 너는 사는’ 인관관계가 시작될때..
부부간에 존경과 사랑이 시작됩니다.
가정에도 존경과 사랑이 시작됩니다.
오늘 초대교회가 그랬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나는 죽고 너는 사는 관계’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함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을 찬미하고, 온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히려 지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어찌할꼬’ 하는 믿음으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곳에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존경받게 됩니다. 칭송받게 됩니다.
아니,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을 살아갈수 있게 됩니다.
자 그런한 복된 삶을 향하여,
힘있게 출발하는
귀한 믿음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