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과 구원의 방법 마태복음 21장 1절 11절
2008.03.14 18:39:59 조회4746
마태복음 21장 1절 11절 이원론과 구원의 방법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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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려주일, 이번주간은 고난주간, 그리고 이번주 금요일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밖히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거룩한 사건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하늘의 사건이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고 은혜로운 하늘의 사건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땅에 내려오셔서, 가장 참혹한 십자가 위에 오르셔서, 말할수 없는 고통을 짊어지고,
그 거룩하고 은혜로운 하늘의 사건을 다. 이루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할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은혜로운 하늘의 보좌도 있에서
거룩한 목소리로 소리처 선포하시는 방법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하늘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구름을 타시고 내려오셔서
너희들은 구원되었다고 말씀하시고 방법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구원을
하늘에서 구원을 이루신게 아니라, 땅에 찾아오셔서 이루셨고,
하늘의 보좌에서 이루신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십자가에서 이루셨다고 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구원은 전적으로 신비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맞아드리는
신앙고백의 날이라 하겠습니다.
1. 거룩한 구원을 우리에게 오셔서 이루셨습니다.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어느날 코끼리와 개미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큰 코끼리 등에, 개미가 붙어서 길을 가는데, 다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코끼리가 다리를 지나가니까, 다리가 흔들 흔들 거립니다.
다리를 다 지나자, 개미가 코끼리에게 말합니다.
“야 코끼리야, 우리가 함께 거너니까, 다리가 흔들 흔들 한다. 그지...?”
조금 있으려니, 사자들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코끼리가 가니까, 사자들이 일어서서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러자 개미가 또 코끼리에게 말합니다.
“야 코끼리야, 우리가 함께 가니까, 사자도 도망간다. 그지...?”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개미가 말합니다.
“야 코끼리야, 우리가 함께 가니까, 너무 좋지, 앞으로도 항상 우리 함께 다니자...알았지...?”
다리가 흔들리는게, 개미 때문이겠습니까? 개미가 없이, 코끼리 혼자만 갔어도, 다리는 흔들렸을 것입니다.
사자가 도망간것이, 개미 때문이겠습니까? 개미가 없이, 코끼리 혼자만 갔어도, 사자는 도망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가기 때문에, 평안하고, 형통하고, 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가기 때문에, 평안하고, 형통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존되어 잇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께 의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니요,오히려 죄중에 있던 우리를 귀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늘보좌에서 일어서서, 이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려 세상에 찾아오실 때,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아 달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외면과 핍밖에도 불구하고, 참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진노하시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 십자가에서 오히려 죽기 까지, 이 땅에서 참으셨고,
더욱이,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어 놓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인 것 입니다.
무조건 적이고, 제한이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늘의 구원을 주시려고, 땅에 찾아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9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그때 아마 세가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아무 이유도 없이, 예수님이 오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냉냉하게,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맞아드리지도 아니하고, 방관자가 되고, 구경꾼이 되어, 예수님이 오심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마지막으로 적극적으로, 9절에 말씀처럼,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고,
또 소리를 높혀서 외칩니다. 호산나, 호산나......‘호산나’라는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외치면서 환영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은혜를 주시려고, 찾아오십니다.
우리 집에, 내 사업장에, 내 마음속에....
어떤 사람들은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우리집에 오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집에 하늘은혜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위하여, 집을 청소합니다. 않좋은 것들은 내다 버립니다.
먼지 쌓인 곳들은 깨끗이 청소합니다.
그러면서 준비할 때, 내 마음이, 우리집이 얼마나, 깨끗하게 되겠습니까?
또 그래서 예수님께서 좌정하시고, 하늘의 은혜를 베푸실 때,
내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형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문을 꼭 닫아 놓습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겨우 문을 열어주는데, 그래서 어렵게 찾아 오셔도,
온집이 더럽고, 먼지가 가득한 경우도 있습니다.
자 그곳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히 이루어지겠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을 사모하고,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위하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거룩한 뜻을 이루려 하십니다.
2. 거룩한 구원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졋습니다.
5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입술의 십계명이란 글이 있어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1. 이 귀한 입으로 희망을 주는 말만 하겠습니다.
2. 이 귀한 입으로 용기주는 말만 하겠습니다.
3. 이 귀한 입으로 사랑하는 말만 하겠습니다.
4. 이 귀한 입으로 칭찬하는 말만 하겠습니다.
5. 이 귀한 입으로 좋은 말만 하겠습니다.
.........
10. 이 귀한 입으로 향기로운 말만 하겠습니다.
입은 하나입니다.
거룩한 입이 따로있고, 죄악의 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입으로, 좋은 말, 향기로운 말,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면,..... 거룩한 입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입으로, 나쁜 말, 상처주는 말, 악한 말을 하면.....죄악의 입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형식에 빠지게 될 때, 외식하는 사람들 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 따로있고, 죄악된 것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음식도, 굽이 갈라지로 되새김질하는 음식은 거룩합니다.
비늘이 없고 물고기, 되새김질 하지 못하는 짐승은 부정합니다.
바리새인은 거룩합니다.
세리는 부정합니다.
그렇게 나누다 보니, 안식일은 거룩합니다.
평일은 대충대충 거룩하지 않습니다.
하늘은 거룩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자리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의 십자가를
대속하시려고, 저주의 십자가에 오히려 올라 가셨습니다.
이것이 희생이요, 말할수 없는 은혜요, 우리를 향한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원론적인 외식함에 서 있을때, 우리는 깨끗하고 편한, 십자가만을 찾는 우를 범 될수 있습니다.
주일날 대표기도 하는 것은 거룩하고, 현관 로비에서 안내하는 것은, 부정합니까?
식당에서 커피마시는 것은 거룩하고, 주방에서 설거지 하는 것은, 부정합니까?
주일날 예배는 거룩하고, 평일, 혼자서 기도하고 말씀보는 것은, 부정합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다시, 현과 로비에 대신 서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다시한번,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방에 설거지 하러 들어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의 십자가로 거룩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요즈음 연예인들, 얼마나 이혼을 자주하는지, 결혼 한달 만에 파경은 뉴스꺼리도 않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최고 기록은, 결혼 12일 만에 이혼한 사례고, 더 최고의 기록은 8개월만에 이혼인데, 다행한 것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 결혼생활을 해줄만한, 자격이 없더라고 하면서, 이혼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자격이 있으면 해주고, 자격이 없으면 해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당연한 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구원받만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으로 먼저, 예수님께서는 오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만 하기 때문에, 섬겨주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먼저 섬겨주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예수님께서 씻겨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려 온것이 아니라, 섬김려 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조건없이 배풀고 섬기는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원론적인 유혹, 형식주의, 외식함이 무엇인지, 우리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라도,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뜻은 세워지게 되엇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남편을 조건없이 존경해주고, 아내를 조건없이 사랑해 줄 때, 그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조건없이 사랑할 때, 그 가정은 거룩한 가정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조건없이 존경해주고, 사랑해줄때,
우리교회는 거룩한 예수님이 교회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거룩한 구원은 순종할 때 이루어 집니다.
2절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종려주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 보고, 말합니다.
“맞으편 마을로 가면, 나귀가 있을 것인데, 끌고 오너라,
내가 나귀를 타고 들어가야 겠다.“
그럴때, 제자들이 말씀 드릴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나귀새끼는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요?
예수님, 흰백말을 마련해서, 타고 입성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항상, 살아갈 때, 이 두가지는 충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생각, 성령님의 뜻과, 나의 뜻이 항상 충돌합니다.
거룩함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스가랴서 9장9절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나귀를 타셧습니다.
에수님께서는 입성하셔서, 잡히시기 전날밤, 순종의 기도를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밤세워 기도하시게 되는데,
얼마나 걱정 되었는지, 땀이 맺히다가, 피가 나와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시며,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를 순종하고, 그 십자가를 달게 질때, 그때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 주신 십자가를 안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권사님들의 기도, 장로님들의 눈물....
자 그것이 거룩한 기도요, 거룩한 눈물이요, 거룩한 신앙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거룩한 구원을 이루려, 저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거부하고, 문을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난 많은지 모릅니다.
멸망의 자리인줄도 모르고, 소돔과 고모라 같은 죄악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이러한 시대에,
거룩한 자리에 서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세워 나가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생각하며,
거룩하게 보내는, 한주일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