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길, 더 귀한 삶 로마서 14장 16절 18절
2007.10.06 21:02:18 조회4602
로마서 14장 16절 18절 더 높은 길, 더 귀한 삶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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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갓 상경한 할머니가 택시를 잡았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묻습니다. \"노량진까지 차비가 얼만감?\"
택시 기사가 슬쩍이 보고, 봉잡았다고 생각하고, 흐믓해 하며, 말합니다. \"5만원인데요.\"
시골할머니가 깜짝 놀랐습니다. 차비가 비싸도 너무너무 비쌉니다.
정신을 가다듬은 시골할머니가 다시 말합니다.
\"그럼, 짐은 얼만감?\"
택시기사는 인심이라도 쓰는 듯 시원스레 답합니다. \"아, 짐은 당연히 무료지요.\"
그러자 이 할머니는 얼굴에 화색을 돌며 말합니다. “분명히 사람은 5만원, 짐은 무료야?”
“네.....그렇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하더랍니다.
\"아, 그럼 나는 지하철 타고 갈텐게,~ 이 짐만 좀, 노량진까지 옮겨나 주더라고!\"
사람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살아간다고 하지만,
생활의 목표와 중심이 뒤바뀔때, 그 생활은 불행으로 이어지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만,
한때는, 관광성수기 때, 바가지 씌우는 상술이 일반화된 적이 있었습니다.
않 살수 없어서 사면서도, 관광객들은 속이 상하고, 않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상인들은 바가지 씌워서 돈을 버니까? 얼마나 매출이 올라가는지 모릅니다.
조금만 있으면, 곧 부자가 될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해 부터는, 관광객 수가 뚝 떨어집니다.
결국 한해 바가지 하려다, 그곳 전체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상권이 죽어버리는, 참담한 결과가 일어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도 중요합니다. 기관도 중요합니다. 교회생활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예수님이 없이, 다른것을 세울때,
단기적으로는 목표가 이루어 지는 것 같습니다. 잘되고 형통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 생명을 잃어버리고, 능력을 잃어버리고,
모래성 처럼 허물어 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 기관은 무엇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까?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는 로마교회를 향하여 보낸, 사도바울의 편지가 되겠습니다.
그 당시 로마교회는 막 부흥하기 시작하는, 신도시 교회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로마는 세계의 수도 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로마로 모여들었습니다.
문화도, 생활도, 권력도, 모두 로마로 집중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문이 않나서 그렇지, 로마교회는 큰 교회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교회에 다니는 사람 가운데에는, 유명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 재력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선후로 따지자면, 예루살렘 교회가 모교회이고, 안디옥 교회 같은 교회들이, 형님뻘 같은 교회입니다.
하지만 규모로 볼때에, 또 활동하는 것으로 볼 때에,
로마교회가 얼마나 무섭게 성장하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 로마교회를 사도바울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죄인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크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바울사도께서, 우리 로마로 오신단다...
이제 바울사도가 오시면, 우리 로마교회에는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자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편지를 보냅니다.
들뜬 마음은 가라앉히고, 오히려 복음의 더 큰 부흥을 위하여,
냉철하게, 로마교회를 향하여, 질문합니다.
로마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 있습니까?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로마교회가 있다보니, 로마교회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는 로마교회는 과연 무엇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건물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사람들과 친목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도데체 로마 교회는 무엇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로마교회가 되십시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나는 신앙생활 하면서, 무엇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생활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생활을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열심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남은 있으되, 예수님은 만나지 않습니다.
기쁨은 있으되,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생활이 있다면,
현대의 바리새인이 될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5 말씀입니다.
어떤 소녀가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아저씨와 연결되어,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소녀가장에게, 와서 필요한 것을 사 줍니다.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줍니다. 학용품을 사 달라고 하면, 학용품을 사 줍니다.
어느날, 이 소녀가장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필요한것을 주는, 이 분은, 그래 틀림없이 아버지가 분명해...
그때부터 이 소녀가장은 이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아저씨는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소녀가장은, 어른 그 아저씨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가족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저에게 유산으로 무엇을 남기실 건가요?’
이 소녀 가장은, 유산은 커녕, 씁쓸하게 그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란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딸처럼 흉내도 쉽게 낼수 있습니다.
하지만 딸 흉내를 내었다고, 어떻게 유산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법적으로 양자녀가 되어야, 유산을 받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를 성령님이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만약 로마교회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만 채워져 있다면, 당장 버리십시오...
로마교회여!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세워 나가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생활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생활하려면, 먹고 마시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먹고 마시는 것만 있어서는 않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속에 성령충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그속에 있을때,
그 생활은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학교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는데, 교실안이 시끄러워 집니다.
그러자 반장이 일어나 한마디 합니다.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괜찬으니까, 떠들지 말고, 아예 밖으로 나가!”
그러자 앞에 앉아있던, 선생님이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직위와 직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식과 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형식적으로, 데마는 사도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도 다녔습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가 핍박을 받으며, 옥에 갖이게 되자, 데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도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도망가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데마는 말씀의 사람이 아니라, 말씀의 사람처럼 흉내내는, 거짓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되고 부흥한다고 하는데, 겉모양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진실되게 세워나가는,
신앙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까?
18절 말씀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지난 주간, 시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찰회에 잘 참석하여, 우리교회의 아름다운 소식들을 잘 보고 하고, 또 우리교회에 필요한 사항들을 잘 청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몇일 후에, 김이봉원로목사님이 전화를 하십니다.
“이목사님, 시간되면, 컴퓨터 좀 봐주세요. 이게 왜 이런지 잘 모르겠네”
자 그래서 컴퓨터도 가르켜 드리고,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좀 한적한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갈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돌아올때, 오던 길과는 다른길로 들어서다가, 그만 잠깐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김이봉원로목사님도 헷갈려 하십니다.
저는 어디가 어딘지로 모르겠습니다.
차에 에어콘을 틀어도,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매칩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이정표가 나타났습니다.
“일산 오른쪽 방향”
그러자 김이봉원로목사님이, 힘을 얻으셔서, 말을 합니다.
“보라 맞지...오른쪽 방향으로 우회전 하라...”
그래서 저도 질새라 대답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딱 맞게 잘 왔습니다. 돌아온게 아니고, 본래 길로 잘 온거네요”
인생의 길에서도, 이정표를 보아야 합니다.
이정표를 보면서, 길을 점검하지 않을때, 사람은 인생의 길을 헤메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정표는 무었입니까?
1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이정표를 점검하지 않고, 내 맘대로, 내 입장에서 신앙생활 할때,
그 신앙생활은 길잃고 헤메는 신앙생활이 될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정도, 나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때,
내 행동과, 내 말씨를 점검하지 않고, 내 맘대로 살아갈 때,
거기에 사고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한 초등학교 어린이가, 자기집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어린이가 자살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이가 실수를 하였는데, 그것을 알고,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서 야단치며, 아이에게 말합니다. “ 너 집에 가서, 한번 보자..”
그리고 아버지는 퇴근하여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는데,
들어오는 아버지가 모습을 보고, 아들은 안절부절 하다가, 뛰어내리고 말았습니다.
경찰서에 와서 아버지는 멍하니 말하였다고 합니다.
“ 너 집에 가서 한번 보자..”고만 말하였는데....
“ 너 집에 가서 한번 보자..”고만 말하였는데.... 그 말 때문에 우리애가 뛰어내리다니...
이 아버지가, 평소에 자기의 말과 행동을, 조금이라도 살피고 고쳤더라면,
자기 말 때문에 아들이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이 얼마나 무서워 하고 힘들어 하는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내가 화나는 데로, 내 기분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초등학생 아들은 아버지가 한 말이 무섭고 힘들어,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차라리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도바울을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자’는 자기 맘대로, 자기 편한데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받는 분을 생각하고, 항상 살피고 점검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이 점검되지 않을때, 주님 앞에, 교만과 태만의 죄를 범하는 실수를 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소비적 영성활동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인본적 친교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만남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만날때에, 비로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canon 기준, 도그마, 정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기준이 되는 예수님의 말씀대은 도외시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는 것을 쫓아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는 생활대로 살아갑니다.
그 생활은 아주 위험한 신앙생활이요, 심지어는 ‘비신앙’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사람이, 자기 기뻐하는 것을 쫓기 시작할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건강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명예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권력과 재물을 더 소중이 여기고, 그것으로 기쁨을 삼게 되어 집니다.
얼마나 무서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보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보다, 내가 기쁨을 얻는 생활을 우선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에 손을 뻗었고,
시날 평지에서는 바벨탑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이정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하지 않고, 막 나갈 때,
그 때는 느끼지 못합니다.
속도를 내면, 속도감이 즐겁고,
죄를 지으면, 스릴도 넘치고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 먹게 될 때, 에덴동산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은 무너지고, 언어가 혼란하게 되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점검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렇게 하는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일까?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시편 147편에는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전도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니...”
시편 37편에는 말씀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님을 선택한,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 세상것은 아니, 세상이 가지지 못한 신령스러운 것 까지, 얻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고 서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3. 선한 것이 비방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자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더 큰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성공하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 존경받는 것 보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더 성공하고,
나로 인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더 높혀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활은 내가 부끄럼 당하지 않고,
내가 자존심 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로, 선한것이 비방받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을, 삶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집사님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지 모릅니다.
한번은 찾아와서 말합니다.“목사님, 제가 개인적으로 40일 작정 새벽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어느날 새벽기도 하는데, 이 집사님이 않보입니다.
이 집사님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목사님 38일째 늦잠을 자고 말았는데, 40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그래서 제가 “다시 시작하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더니, 다시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시 40일을 시작하여, 작정 새벽기도가 끝나더니, 또 찾아와서 말씀합니다.
“목사님, 개인적으로 백일 철야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열심히 하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더니, 백일동안 저녁마다, 교회에 와서 철야기도를 합니다.
백일 철야기도를 다하고 나서, 찾아와 조용히 말합니다.
“목사님. 사실 저는, 밤무대에서 키타를 치고 있습니다.
또, 룸에 들어가 술먹는 사람들을 위하여, 밴드로 반주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열심히 해 보니, 이게 다 예수님 영광가리는 일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밤무대 서는 거, 그만 두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당장 밤무대를 그만두니,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운 내색한번 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하더니.......
어렵지만, 잘 이겨나가, 조그만 분식가게도 열고,
또 안수집사님이 되어, 오후 찬양예배에서, 찬양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여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많이, 복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건강과, 내 시간과, 내 이익이 손해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대입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생활입니다.
요즈음으로 하면, 수천만원하는 옥합을 깨뜻려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여인처럼,
얼마나 귀합니다. 나의 시간, 나의 이익, 나의 건강, 나의 재물까지,
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깨뜨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인 것입니다.
선한 것이 비방받지 않도록,
예수님 영광가리지 않고, 예수님 이름 높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가끔씩은 이정표를 보면서,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바르게 가고 있는지, 내가 길을 잘못 들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을 힘쓰고 있습니까?
예수님 영광 가리지 않고, 예수님 이름 높이려....
옥합을 깨뜨리며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람들로부터도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대로 더 높은길, 더 귀한 삶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