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자에게 맡겨 주십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 51절
2007.08.18 22:30:40 조회5082
마태복음 24장 45절 51절 믿는자에게 맡겨 주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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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100대 기업의 CEO의 평균 연봉은 5억3천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위 20대 기업의 CEO의 평균 연봉은 57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기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CEO의 능력에 따라서 나타나는, 결과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신중하게, 능력과 자질을 보고, 믿을 만한 사람을 뽑게 되고,
또 CEO 한사람에게 기업의 많은 부분들이 집중되고, 의존되어 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능력이 검증된, 역량있는 CEO는, 더 큰 사업부분에 책임을 맡게 되고,
기대치를 달성하지 못한 CEO는 주주들로부터, 버림받고, 금방 잊혀지게 되는것이,
CEO세계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지혜있는 청지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지기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맡기신, CEO 와 같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청지기에 대하여 비유하시며, 두가지 청지기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한 청지기는 지혜있는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청지기는 어리섞은 청지기입니다.
한 청지기는 믿음직한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청지기는 믿을수 없는 청지기입니다.
한 청지기는 주인에 모든 것을 맡게되는 행운의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청지기는, 맡겨진 것을 빼앗기고, 벌을 받고, 내어 쫓기는 불행한 청지기입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을, 이렇게나 큰 차이가 나게 만들었습니까?
‘운명은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온다.’고 하는데,
단순히, 한사람은 운이 있었고, 다른 한사람은 재수가 없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무엇인가...숨겨진 필연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은 주인의 모든 것의 책임자가 될 만큼, 크게 성장하고, 성공하는데,
다른 사람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벌받고, 내어쫓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시작은 똑같이 합니다. 같은 학교, 같은 친구로 시작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차이라고는, 백지장, 한창 차이도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끝은 너무나 틀립니다.
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큰 일을 하게 되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믿을수 없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도 자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실패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경우를,
볼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섭지만, 신앙에도 마찬가지의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같이 시작하였습니다. 같이 등록하고, 같이 세례받고, 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선교회에서, 교회학교에서, 찬양대에서 크게 봉사하고, 점점 중요한 직분을 맡아 나갑니다. 믿음도 얼마나 성장하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습니다. 기도를 제단을 세워 나갑니다.
자 그럴때,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생활의 모든 일들이, 얼마나 은혜있고 복된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인 사람도 있습니다. 10년을 믿어도, 20년을 믿어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어떨때에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도 않습니다. 성경도 모릅니다. 기도도 모릅니다.
자 그럴때, 생활이 복되고 은혜롭겠습니까?
그저 않좋은 소식만 들려옵니다. 하소연만 합니다. 기도부탁이 끊이지 않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길래,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을까요?
1. 스스로 속여서는 않되겠습니다.
45절, 46절 말씀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오늘 청지기 비유에서는, 이 두 청지기의, 전혀 다른 생활자세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주인의 모든 소유를, 책임지게 되는, 복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이 먼 곳으로 가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부탁하고 맡긴 사명을 진실 되게 감당 하였습니다.
주인이 부탁하고 맡긴 책임을 감당하는데, 어떻게 어려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사정도 생기고, 바쁜일도 생길수 있습니다.
어떨때는 기분이 처지고, 또 할 마음이 않 생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된 청지기는, 주인이 없다고,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없다고 대충대충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충성스럽게, 그 일을 감당 하였던 것입니다.
그럴때, 타국에 갔던 주인이 급한일로, 불시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이 청지기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있으니 없으나, 주인이 부탁한 사명을, 믿음직하게 감당하는, 이 청지기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맡은 것도 빼앗기고, 쫓겨난 불행한 청지기는 어떠하였습니까?
48절 말씀에는 악한청지기의 생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그렇습니다. 악한종은 주인을 살폈습니다.
악한 청지기는, 주인이 있으면 하고, 주인이 없으면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이 청지기를 믿기에, 책임을 맡겼지만, 그것은 주인의 착각이요,
악한 청지기는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내가 않하고 싶으면 않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떠나자, 이 악한 종은, 주인집에 있는 사람들은 소홀히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주인이 더디오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악한청지기의 생각은, 주인이 올때 쯤 되어, 잘 하는척 해도, 주인은 속아 넘어갈 것이라는, 영악하고 어리석은 지혜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예고하며 왔습니까? 아닙니다. 불시에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이 악한 청지기의 잘못되고, 믿음을 저버린 모습을 보고,
믿을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며, 맡겨 놓았던 것을 빼앗고, 쫓아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악한 종은 주인을 속이려고 하였습니다만은,
결국은, 자기 스스로를 속인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 놀랍게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이 생각하며, 오늘날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정직한 청지기가, 주인이 않볼때에도, 충성되이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악한 청지기가, 주인이 않본다고, 허랑방탕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38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빈들에서 양을치는 어린다윗에게, 사무엘선지자를 보내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합니다. 그 아이는 쓰임받을 아이가 아닙니다. 재주도 모자라고, 생긴것도 그렇고, 그 형들이 괜찬습니다.
그럴때,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나, 나 여호와는 심령중심을 보느니라..”
아버지도 모르는 자식의 중심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일국의 왕으로 세우시는데, 다윗이 얼마나 용장이 되고, 성군이 되는지, 하나님의 일을 전심으로 힘쓰는, 모범 왕, 샘플 신앙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메스컴에는, 자기를 속이는 사회지도층이, 연일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교수가 되어, 가르치는데, 알고보니, 박사는 커녕, 대학도 않나왔습니다. 심지어는 고등학교 학력도 조작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모르려니 하고, 속이는 것이, 점점 커져서, 서울대 나오고, 미국에서 박사가 되었다고, 마음대로 거짓말 하며 속였다고 합니다.
연예인, 건축가, 심지어는 25만명의 마음을 지도하는 모 수련원 원장님까지도, 가짜 학력이었다고 합니다.
지혜는 충성되는 것입니다. 지혜는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속이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2. 주인을 귀하게 받들 줄 알아야 합니다.
49절, 50절 말씀입니다.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실패한 청지기는, 주인을 귀하게 받들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인 부탁하고 맡겼지만, 주인의 말씀이 엄정하고, 무서운 줄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청지기는, 주인의 말씀을 무시하였습니다.
49절, 50절에는 주인의 말씀이, 무서운 줄 모르고 행동하는, 오만하고 교만한 청지기의 모습이 잘 들어나 있습니다.
4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동료들을 때리며----”
청지기의 동료가 누구 입니까? 주인이, 같이 일하라고, 세워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악한청지기는, 주인이 세워준, 그 동료를 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주위에 교우들을, 소홀히 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않되겠습니다.
주위에 교우들에 대하여, 폭력으로 때리지는 않지만, 말로 마음에 상처주고, 또 험담하고, 생각없이 대하는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료는 내가 세운 존재가 아닙니다. 주인이 세운 사람이 동료입니다.
동료는 같이 힘을 합하여, 일하도록, 주인이 세웠다는 것을 안다면,
존중하고, 용납하고, 경청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 악한 청지기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술친구들을 불러서, 더불어 먹고 마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내 자유요, 개인의 취미생활이라고 변명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주인이 떠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 집으로는, 비상사태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매사에 조심하고, 또 살펴야 할 시기입니다.
더욱이 주인이, 이 청지기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청지기는, 임시적으로 주인을 대신하여, 이 집의 주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주인이라도, 술친구들과 어울려 방탕한다면, 그 집이 어떻게 잘 되겠습니까?
하물며, 청지기가 되어서, 주인의 권리를 대신하여, 집을 잘 지켜야 할 청지기가,
주인이 없다고, 주인의 권리를 부리며, 술친구들을 불러모아, 방탕하게 먹고 마신다면,
과연 신실한 청지기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내어쫓긴 청지기는, 주인이 박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주인을 무시하고, 주인을 귀하게 받들줄 모르는,
생각과 자세가 잘못된 청지가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인을 귀하게 받드는, 신실한 청지기 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예수님을 귀하게 높일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이렇게 주인을 높일줄 모르고, 주인을 무시하였던 청지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스로가 주인을 대하였던것 처럼, 주인에게서도 그대로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주인을 믿음으로 따르지 않았던 것처럼.. 주인도 자기를 믿어주지 않습니다.
동료들을 때린것 처럼, 자신도 맞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사람들을 버린것처럼, 스스로도 주인으로부터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높이는 사람을, 높혀 주십니다.
하나님 귀하게 받드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귀하게 세워 주십니다.
어느 마을에, 아주 친한 두 청년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이 두사람이 만나서, 술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나와서, 집으로 가는데,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문앞에는, 조그만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들어오세요”
순간 청년이 멈칫하며 말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들어오라는데, 교회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친구가 말합니다. “ 무슨 소리야... 말 안되는 소리 하지마.. 우리집에 가서 술한잔 더하지...”
그러자 다시 청년이 말합니다. “봐, 분명히 적혀있잖아.. 오늘 설교제목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고, 들어오라고 적혀 있잖아...나는 들어갈꺼야”
결국 두 친구는 서로 나뉘어 지게 되었습니다.
한 청년은 그 길로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그 길로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습니다.
술집으로 들어갔던 그 친구는 교도소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간수가 넣어준 신문을 보니까?
미국 제 22대 대통령이 취임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새 대통령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때, 교회에 들어가야한다면, 교회로 들어가던 바로 자기의 친구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로 들어갔던 이 사람이, 바로 미국 22대 대통령이 된 ‘클리버랜드’ 입니다.
주인을 귀하게 받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때, 주인은 그 충성된 성품을 보고, 그 주인의 모든 것을 맡겨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선한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45절 말씀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돈은 다 똑같은 것 같지만, 각 세대들은 서로 다르게 돈에 대하여, 느낀다고 합니다.
유치원학생들은, 대부분, 돈을, 제대로 만져 본저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에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살아가는 세대가, 유치원세대라고 합니다.
초등학생들은, 등교길에 어머니가 주시는 500원짜리에 흐뭇해 하며, 만족한다고 합니다.
돈을 주로 쓰는데는 오락실이라고 합니다.
중고생들은, 본격적으로 돈에 눈을 뜬다고 합니다. 참고서값 땡쳐서.... 게임방 가기 바쁘다고 합니다. 여자친구 있는 애들은, 돈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고 합니다.
성인들은, 돈이 세상의 전부라고 합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울고 웃으며, 돈 때문에, 돌고 돌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돈으로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 인기있는 생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중에, 각분야의 장인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지난 번에는 무뽑기 장인을 소개하는데, 벌써 강원도 고랭지에는, 무를 다 키워서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무밭이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밭에, 무들이 가득히 심겨져 있습니다.
이 장인이 등장하는데, 얼마나 빠르게 무를 뽑는지 모릅니다. 또 얼마나 정확하게 무를 차곡차곡 세워놓는지 모릅니다. 삽시간에 그 많던 무가 다 뽑히고, 일을 잘 마치게 되었습니다.
싱글벙글 웃는 무뽑기 장인, 또 김밥 만드는 장인, 건설장비 운전의 장인.....
프로듀서가 질문합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장인들에게는 공통되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어요...이건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이 대답을 통하여, 넉넉한 자신감과, 열정을 엿볼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고를 내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예수님의 집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방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재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맡아 돌볼 사람을, 예수님은 구하고 계십니다.
그 많은 방과 기계와, 그 많은 돈을 맡을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계십니다.
충성되고, 지혜있고, 믿음직한 청지기,
맡겼다 하면, 익숙한 손놀림으로, 척척 해낼, 준비된 청지기를.. 예수님께서는 찾으십니다.
죽겠습니다.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자, 이런 보살핌 받아야 할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광경은, 불리한 역경과, 싸우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역경에 맞써, 도전하는 사람에게서, 사람들은 감동과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위대한 사람은, 어려움이 없는 평탄한 환경에서, 무미건조하게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만큼의 돈을 남겼느냐? 하는 것이, 위대함의 척도가 아닙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청지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인이 타국에 가서, 모두가 어쩔줄을 모릅니다. 이 청지기만 바라 봅니다.
그럴때, 흔들리지 아니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지혜있게....
믿음직스럽게,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워 나갈 때,
그 청지기는 위대한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시간이 흘러, 사도들이 모두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다 하늘나라로 가자, 사람들이 우왕좌왕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로마에서는, 이때가 호기라고 여기고, 더욱 심하게 핍박합니다.
그리고 본보기로, 안디옥지방의 감독이던 ‘이그나티우스’를 잡아 들였습니다.
로마는 ‘이그나티우스’가 두가지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첫 번째 죄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이고, 두번째 죄는, 예수님을 전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다들 걱정을 합니다.
사도들이 없는 교회를, 그래도 선한 청지기처럼, 이그나티우스가, 지금까지 지켜왔는데,
‘이그나티우스’ 마저도 잡혀서 사형받게 되니, 모두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때, 이그나티우스는 7편의 편지를 씁니다.
교우들에게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편지를 씁니다.
동료감독에게는, 더욱 굳게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라고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게 됩니다.
드디어, 트라야누스 황제가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
‘이그나티우스’는 조용히 말합니다.“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분입니다.”
결국 ‘이그나티우스’는 콜로세움에 끌려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자와 맹수들이 우글거리며 달려 나옵니다.
‘이그나티우스’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영화롭게, 순교의 반열에 세워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제, 이 맹수의 이빨 사이에 끼여,
하나님의 곡식가루로 빻아져서,
거룩한 빵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리고 맹수들에게 물어뜯겨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그나티우스’가 이렇게 위대한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였기에,
성도들은 다시 마음을 잡았고,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그나티우스’를 맹수에게 던졌던 로마가, 오히려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우상을 모두 부수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공포하고,
신성로마로 바뀌는 대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우리세대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마지막 때와 같이
끝없는 욕심과 불신앙으로 치닫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이기를 패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기에, 찾으십니다.
선한 청지기, 복된 청지기,
하나님의 집을 든든히 세울, 믿음직스럽고, 위대한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위대한 청지기가 아닙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이, 위대한 청지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속이지 아니하고, 믿음직한 청지기가, 위대한 청지기입니다.
주인을 귀하게 받들 줄 아는,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위대한 청지기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화답하고, 맡겨주신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
오늘날 하나님께서 쓰시는,
믿음직한 청지기, 충성스러운 청지기, 위대한 청지기가 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