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합당한 생활 빌립보서 1장 27절 30절
2007.08.18 18:55:40 조회6905
빌립보서 1장 27절 30절 복음에 합당한 생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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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군대간 아들이 생각나서,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방에 들어가, 이것 저것 살펴 봅니다.
아들 책상에도 앉어보고, 아들 침대도 다시 정리해 주고...
그리고 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들아...
이 추운 겨울날,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너의 침대를 정리하다보니, 아직도 너의 온기가 남아있어, 네 침대가 따쓰하구나...
아들아, 항상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단다...\"
몇일이 지나서 답장이 왔습니다.
\"보고싶은 부모님께..
어머니, 편지를 읽고, 생각이 납니다....
제 침대가 따뜻한 것은, 제 온기 때문이 아니고,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그냥 입대 해서, 그래요.....
제 침대에, 전기장판 좀 꺼 주세요..
혹시 다른것도 켜져 있으면 다 꺼주세요...
고마워요.... 어머니께...“
사람은 이같이, 같은 사물이라도, 서로 다르게 보고 해석하며, 살아 갑니다.
똑같은 침대이지만,
어머니는 아들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켜놓고 온, 전기장판을 걱정합니다.
더 나아가, 똑같은 사건에 대하여서도,
사람들은 서로 관점에서,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그리고 같은 사건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 많은 사람들이, 한가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지는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희망과 소망을 찾으며 살아가지만,
다른 사람들은, 절망과 낙심을 찾아, 의기소침해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나는, 그 가운데에서, 무엇을 찾아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희망과 소망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절망과 낙심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시간에는 세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써 나의 생활이 어떠한지, 점검하는 시간을 갖으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1. 내 안에, 선한 싸움이 있습니까?
30절 말씀입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나의 마음은, 내가 주장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는데, 그게 맘대로 않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죄의 법과 성령의 법...
죄과 말씀이, 대립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 두가지가 서로 충돌하는, 전장과 같은 곳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나는 어느편에 서려고 하느냐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 법, 육신의 생각에 대하여,
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싸움한번 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져 버리는 일들이
허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법과, 육신의 생각이 마치 골리앗 처럼, 저항할수 없을것 같이, 크더라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다윗처럼, 용감하게 저항하고, 대항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낙심하여,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별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완전히,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밉습니다.“
목사님이 묻습니다. “ 그래요? 그러면 오늘, 여기 오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십시오”
“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버스를 타고,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네 그러면, 여기까지 오는 것에는, 실수없이 성공했네요”
“그럼요 그런 쉬운일도 실수하나요”
그러면서 찾아보니, 그 사람의 하루생활 대부분은, 실수없이 성공적으로, 생활하고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 한 구석으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내가 할수 없는 것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실수한 것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또 옛날일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성경은 사단이,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서, 그렇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지 모릅니다. 짐승들에게 이름을 다 지어주고, 다스릴수 있을 만큼, 힘도 세고, 지혜도 뛰어 났습니다.
또 아담과 하와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땅인, 에덴동산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찾아왔습니다.
에덴동산 전체를 소유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나무 한구루를 소유하지 못하였지 않느냐? 고 마음을 흔듭니다.
또 하나님 보다 능력이 모자라지 않느냐? 고 마음을 흔듭니다.
그럴때, 아담과 하와는, 그 목소리에 지고 말았습니다.
선악과 나무 한구루도 소유하지 못한 인간...
하나님 보다가도, 능력이 모자란 인간....
그래서 가난하고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마음속에 선한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것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할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내가 성공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에게 가능한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9장 23절에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죄에 법과 죄의 생각이 들어올때...
하나님께 주신 것
내가 할수 있는 것
그래서 믿음으로 가능한 것을 이야기 하는, 선한 싸움을,
담대히 해야 하겠습니다.
2.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29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위기 속에서 만난 주님」이란 책에서, ‘앤’이란 분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절친한 친구의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아버지 연세가 95 살입니다.
평균으로 보면 95살이면 얼마나 장수하셨습니까? 그러나 가족들은 마음이 그렇지 않아, 걱정하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드디어 친구의 시아버지, 숨소리가 거칠어 집니다.
모두들 마음에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친구의 시아버지는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기도하고, 위로하고 나오는 길에, ‘앤’은 혼자말로 중얼 거렸다고 합니다.
“천국은, 숨 한 번 쉬는 거리에 있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게, 예수님은 나에게서 멀리 계시고,
천국은 아직도, 성경말씀 속에서만 상상이 되는 곳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숨 한번 쉬는 거리만큼, 지척에서,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숨 한번 쉬는 거리만큼, 지금 이곳에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나의 생활은 어떠합니까?
나의 하루 생활을 펼쳐 볼때,
나의 하루 생활속에서, 예수님을 향한 생활은 몇 프로 입니까?
예수님은 숨 한번 쉴만한 지척에 계시는데..
나의 생활은 예수님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활의 방향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활의 목표가 정해질때,
생활의 우선순위가 분명해 집니다.
실천 가능한것,
작고 구체적인 것에서,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생활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라이프스타일이요, 삶이요,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생활의 방향성과 목표에서,
예수님이 제일 첫 번째요, 제일 중요한 목표가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렇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천국문을 향하여, 살아갔던 사람들만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그 문으로 들어가고,
속되고, 가증하고, 거짓말로 살았던 사람들은,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불편하다고, 바꾸어 질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다른 재미있는 것이 있다고, 바꾸어 질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나의 생활의 목표가 되고,
나의 생활이 되어야 할
단 한가지 가치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생활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고,
가장 작은 판단의 기로에서, 예수님을 택할 때에.
그 생활은 예수님을 향한 생활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3.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27절 28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토끼를 이긴 거북이가,
이번엔 더 빠른 사자와 달리기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정글의 왕인 사자가 한낱 거북이와 경주를 하게 되다니....,
사자는 화가 나서, 거북이를 약올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자가 말합니다.
“야! 거북아, 너 지고 있는것이, 가방이니...? 웬만하면 벗고 뛰지 그래~.”
그런데 거북이는 묵묵부답입니다.
더 심술이 난 사자가 또 말합니다. “야, 등에 있는 가방... 벗고 뛰어! 무겁잖아”
참다 못한 거북이가, 사자를 째려보며, 한마디 하고야 말았습니다.
“야, 너는, 머리나 묶고 뛰어! 그렇게 산발하고, 무슨 경주야... 자세가 않됬잖아.”
이길려고 경주하는 거북이와, 놀리면서 경주하는 사자의 자세에는 분명차이가 있습니다.
느리지만, 거북이 이길수 있는 것은, 이길려고 경주하는, 진지한 자세에 있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신앙생활이 경주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어떤 선수는, 그 경기에서 이기려고 모든 것을 집중하여, 푯대를 향하여 다름박질 합니다.
하지만 어떤 선수는, 향방없이 주먹을 아무곳으로나, 휘두릅니다.
이 두 선수의 결과는 이미 정하여져 있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 하는 선수는, 결승푯대에 잘 도착하게 될것입니다.
하지만 방향도 없이 아무곳으로나 그냥 주먹을 휘두르는 선수는, 이길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믿음의 사람들의 생활은, 복음에 합당하게 되어야 합니다.
한마음으로 서서,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고, 죄에 대하여 담대하게 맞설때,
이러한 생활 자체가, 바로 구원의 증거요...
그렇지 못한 생활이, 바로 멸망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것,
매우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예수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많은 유혹을 참고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복음의 삶을 귀하에 여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생활 자체가, 곧 구원 증거라고 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안에 선한 싸움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이 세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생활,
생명책에 기록되는 나의 이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