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창세기 22장 1절 14절
2007.09.10 11:47:55 조회5128
창세기 22장 1절 14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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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부부가 한가하게, 저녁을 앞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여보! 오늘 저녁은 뭐야?’ 그런데 아내가 댓구가 없습니다.
벌써 가는귀가 먹었구먼...남편은 거실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말합니다.
‘여보! 오늘 저녁 뭐야?’ 그런데도, 아내는 댓구가 없습니다.
남편이 너무 답답해서, 말문이 막힙니다. 아내 귀가 이렇게나 먹을 줄이야... 세월도 참 무심하지...
남편은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말합니다. ‘여보! 오늘 저녁 뭐야?’
그러자 아내가 갑자기 홱 고개를 돌리며, 남편을 향하여 소리질렀다고 합니다.
‘아니. 도대체 내가 칼국수라고 몇 번 얘기해야 알아듣겠어요!’
그러자, 남편은 얼른 보청기를 찾으로, 거실로 다시 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은 항상 젊을거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사람들은 보통, 자신은 평생 늙지 않을 것인양, 멋 훗날을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신은 죽음과는 상관없는 것인양, 현재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무엇인 문제 입니까?
안목이 문제인 것입니다. 멀리 보지 못합니다. 현재에만 몰입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정말 중요한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준비하지도 못하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멀리 볼줄 아는, 능력의 부제라 할 것입니다.
멀리 볼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멀리 볼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때, 우선, 힘든 부분을 피해가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야할 길을 알기 때문에,
힘들지만 준비하고, 어렵지만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갈수 있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 세대에 큰 귀감에 되는, 모범된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 멀리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4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자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모리아산 사건’이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75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아브라함에게는 후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100세에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이 되어서, 꿈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100년동안의 고생이 이제 보상을 받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의 재롱에 시간 가는줄 모릅니다.
즐겁고 행복보내는,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아브라함은, 이말을 듣고, 아마 다리가 풀리고, 하늘이 노래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00살에 얻게 된, 단 한명의 아들, 독자인 이삭을, 이제는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집에 있는 모든 가축들을 다, 번제물로 드려라, 고 하신다고 해도, 아까워 하면서 주저 할텐데, 그것과는 비교도 할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사람은, 완전히 코너로 내몰리는 일들을, 누구나 한두번씩은 겪게 됩니다.
사생결단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 자체,
내 스스로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자리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일방적이고, 탈출구 자체가 없는 자리....
오늘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물도 나올수 없는 상황...
생각이 정지되는 상황....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행동에서, 귀한 은혜의 복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3일동안 음식도 못먹고, 잠도 못자고, 몸만 떨었을 것입니다.
죽을것 같은 자리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천막 밖으로 나와서,
아브라함 눈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멀리 그곳을 바라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말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지금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가 아닙니다.
멈추어 서서, 멀리....산보다 더 멀리....구름보다 더 멀리....하늘보다 더 높이....
그리고 그곳에 위에 계실, 하나님을 바라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때, 가야할 곳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지금 해야 하는지, 알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윌로크릭교회의 빌하이벨스 목사님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써서, 미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습니다.
많은 미국사람들이 살아가지만, 가만히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목적도 없이 살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획이 없습니다. 성취함이 없습니다.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제일 큰 위기에서,
제를 뿌리고, 한탄하고, 주저앉아 있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눈을 들어 멀리 바라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2. 말씀대로 신뢰하는 믿음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재미있는 통계가 있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1945년생, 가장 흔한 이름 1등에서 5등 까지는, 영자, 정자, 순자, 춘자, 경자, 라고 합니다. 참고로, 6위가 옥자입니다.
1975년생, 가장 흔한 이름들은 1위에서 5위는, 미영, 은정, 은주, 은영, 현주, 라고 합니다.
요즈음 2005년생, 가장 흔한 이름은 1위에서 5위는, 서연, 민서, 서현, 수빈, 유진,...
남자애들은 민준, 현우, 동현, 준혁, 민재....라고 합니다.
누가 이름 지어달라면, 이정도만 지어주면, 중간은 간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듣기 좋고, 부르기 좋은 이름... 이라고 하면, 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신앙의 사람들은, 신앙의 무의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의식적으로 하지 않터라도, 몸에 밴, 신앙의 모습이 나와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써 말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아브라함은, 모리아땅에 도착하여, 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산을 올라갈때는, 아들과 함께 갑니다. 하지만 조금후에 내려올때는, 혼자 내려와야 합니다.
이미, 종들도 다 알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주인어른, 어떻게 할가요?’
자 그럴때, 보통 사람이라면, 한탄하고, 절망하고 주저앉아 버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지금, 똑같이, 그 한탄과 절망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입에서 나온 말을 달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심코 나온 아브라함의 말에서, 우리는 두 번째 귀한 은혜의 복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제 애 죽이고 내려 오겠다’가 아닙니다.
‘아이와 같이 가서 예배하고, 또 같이 내려 오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말도 좋은말, 복된말, 귀한 말을 할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심코 내뱆는 말이, 비꼬고, 부정적이고, 비웃는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이 앞으로 달라지려면, 그 말부터, 고처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으로, 상처난 가정을 살펴보니,
싸움할수 밖에없는 문제도 문제이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말씨와 말투,가 더 문제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특강을 통하여 나누었습니다만, 가족치료학자 가트만 박사는,
무심코 내뱆는 말씨와 말투만 바꾸더라도, 부부간에, 가정에서의 일어나는 문제의 상당부분의 다툼에서 해결로, 싸움에서 대화로, 방향이 변화될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아브라함은 무심코 뱉었습니다만, 복된 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긍정하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무의적으로라도, 그 말을 하게 하는, 아브라함에 그 믿음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이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화를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말투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호텔주방에서, 한 요리사가 절망하며, 멍하니 앉아서, 말합니다.
‘내게 100달러만 있었도 행복할텐데...아 100달러 없다니, 아~~ 나는 불행하구나..’
마침 그때 호텔지배인이, 그말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100달러가 없어서, 저렇게 절망하고 있다니, 내가 도와줘야겠구나...’
호텔지배인은 몰래, 주방에 들어가 도마위에 , 100달러를 놓고 나왔습니다.
조금 후에 들어온 요리사는, 도마위에 있는 돈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얼른, 앉아서 돈을 세더니, 또 다시 절망하며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 나는 왜, 200달러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아~~ 나는 바보 같구나...“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러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의 말을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불평의 말을 시작합니다. ‘만나’만 먹고,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고 불평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는 한달동안 고기를 먹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사방에서 ‘메추라기’들이 때로 날아와서 쌓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쌓인 매추라기를 거두어 먹습니다.
하지만 그때 재앙이 닥처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기브롯하타와’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그 뜻은,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때 이스라엘백성들은 불평하였던, 그 믿음 그대로,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광야에서 죽고,
새 믿음을 가진, 새로운 새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덕스럽게 생각하고, 복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는 믿음, 말씨, 생각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3. 말씀대로 실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9절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사람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급하게, 먼저 움직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그러하였습니다.
모리아산 사건은 이제 정점을 향하여 치닫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 올라갔습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들 이삭이 그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들 이삭을 죽여야 합니까?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이, 이것 왜에는 없다는 것입니까?
이삭보다 더 값나가는 제물을 드리면 않되겠습니까?
자 이 복잡한 순간에......
아브라함 하였던 행동에서, 우리는 세 번째 귀한 은혜의 복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그렇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를 만큼, 혼돈한 상황...
인간적인 욕망과 욕심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내가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자리에 설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더 좋은지, 판단이 않설 때가 있습니다.
또 무엇이 이익인지, 욕심이 난무할 때가 있습니다.
자 그럴때,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러한 자리에서, 생각하고 따져서, 좋은길 바른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죽겠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일사각오로, 하나님말씀, 그대로...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에는 세가지 신앙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if 신앙입니다. 조건부 신앙인 것입니다. 무엇을 주시면 믿겠다는 신앙 입니다.
둘째는 because 신앙입니다. 무엇을 주셨기 때문에, 믿는 신앙 입니다.
셋째는 in spite of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과 이유없이,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 조건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들을 던지고, 또 자신을 던졌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세가지 복선이 나옵니다.
무의식적으로, 평소신앙을 엿볼수 있는, 믿음의 복선들입니다.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아들과 같이 내려오겠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무조건적으로, 하나님 명령데로, 아들에게라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복선들은, 그대로 이루어 집니다.
먼 훗날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보호하시고 기억해 주십니다.
예배를 드리고, 아들과 같이, 승리자가 되어, 모리아 산을 내려오게 됩니다.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사람, 복의 근원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직도 날씨는 덥고, 얽매이고 복잡한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먼곳을 바라보시는, 가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가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말씀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이 앞서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생활여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영적자손이 되어 살아가는,
귀한 믿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