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같은, 그러나. 아모스 8장 11절 14절
2007.09.15 21:34:19 조회6962
아모스 8장 11절 14절 똑 같은, 그러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
어떤 남자가 헐레벌떡 약국에 들어갔습니다. “‘딸국질’ 그치는 약을 빨리 주십시오..”
약사는 이 남자를 진정시키고, 조용히 말합니다.
“너무 모든 것을, 약으로만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게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이 남자는 가뿐숨을 몰아쉬며, 약사 앞으로 다가 갔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약사가 이남자의 따귀를 때리는 것입니다. 남자가 깜짝 놀라서, 아픈 볼을 감싸쥐니까..
약사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보십시오. 딸꾹질이 그쳤지요?”
그러자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 내가 아니고, 내 아내가 딸꾹질을 한단 말이오”
요즈음은 무엇이 옳은지, 누가 잘못했는지 조차, 불분명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윤리도 상황윤리입니다. 그때, 그때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시대정신도, 포스트 모더니즘...다원주의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여러가지 지혜가 있지만, 어느 지혜가 가장 좋은 지혜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류에 따라, 신앙 조차도 희미해지고, 또 믿음 조차도, 편의적으로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자, 세상이 상황적이고, 다원적으로 변한다 하여, 나의 믿음도, 상황적이 되고, 다원적이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나의 구원도 상황적이고, 십자가도, 여기저기, 다원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시류를 따라갔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받게 될,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왕 이후에 남북으로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북쪽에는 북이스라엘, 남쪽에는 남유다 라는 나라가 각각 드러서게 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죄악 속에서도, 실수하고, 범죄하였지만, 예배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완전히 죄악에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남쪽에 있는 먼, 예루살렘까지 가지않고도,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편의적인 발상을 하여, 가까운 벧엘에, 황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황금송아지에게 예배드리면 된다고, 북이스라엘 왕들은 장려하였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었겠습니다만, 과연 황금송아지 한테 예배드리는 것이 바른 신앙의 모습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1. 믿음의 사람이라면, 말씀을 붙잡는 신앙이 었어야 하겠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마음대로, 편의적으로, 살아갔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제일 큰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재앙은 11절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재앙’입니다.
아니, 기근이 오고, 독종이 돌고,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재앙이 무슨 큰 재앙이냐? 고 생각하실수 있겠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은혜시대’ 라고 부르기 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체력이 딸리고 바뻐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오늘 우리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할수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수요예배, 금요일에는 금요기도회....심지어는, 기독교 방송국이 있어서, 라디오 채널만 맞추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풍성한 때는, 성경을 찾아보아도, 흔치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때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끊겨지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신앙은 아편이요, 예수믿는 사람들은, 인민에 적이라고 하여, 죽이고, 핍박하고, 교회를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여도, 듣지 못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 그런 북한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은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얼굴을 보고 놀라고, 거리를 보고 놀라고, 산들을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북한 사람들은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농담이라도 잘못하면, 잡혀갈까...서로 번뜩이는 눈으로 살피며, 살아가는, 어두운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리는 어떻습니까? 평안하게 거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모두 집에 들어가서 몸만 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산도 어떻게 되었는지, 여름에도 풀한포기 나지 않는, 척박한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걸음기가 하나도 없어서, 이제는 남한에서 보내주는 비료를 뿌리지 않으면,
아무리 심어도, 풀한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복되게 하는,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평안이 시작됩니다.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다른 모든 것이 매마르고, 말라버리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편의적으로, 황금송아지 만들고,
신앙을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고, 말씀을 변질시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양식의 기근이 아니라...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는 순박한 신앙을,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 처럼, 생각하십니까?
말씀대로 우직하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센스가 부족한 것 처럼, 생각하십니까?
몇해 전 학력고사가 끝나고, 시험생들과 학부모들이 데모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시험문제에 답이 두 개였기 때문입니다.
답은 하나지, 어떻게 두 개가 될수 있느냐 하여, 교육부를 성토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유행이 아무리 변하고, 생활이 현대적으로 빠르게 바뀐다고 하여도,
인생에 답이, 두 개가 될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답이 두 개가 될 때, 그 사람의 인생은 틀린 답의 인생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르면서, 훌륭한 사람이 될수는 없습니다.
세상 죄는 마음대로 짓으면서, 예수님을 열심히 섬길수는 없습니다.
내 편한데로 말씀을 질시하면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될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씀을 붙잡는 조건이 될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변한다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변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오늘 이시대에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이 귀한줄 아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2절 13절 말씀 입니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아주 심각한 착각속에 살아가는 여자, 1 2 3등이 있다고 합니다.
3등은,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2등은,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1등은,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빨리 정신차리고, 얼른 착각에서 깨어 나야 된다고 합니다.....
이 유머를 보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남이 가진다고, 나도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버려야 합니다.
남이 가진 것, 나도 가질 때 행복해 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버려야 합니다.
제일 큰 착각은 나는 맘대로 해로,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 침묵하실 거라는 착각...버려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말씀이 왜 귀한지....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 전혀 생각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이러한 북이스라엘과는, 반대로...오직 말씀...오직 믿음이라는...남 유다 사람들이,
똑같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는 흉포한 나라 ‘앗시리아’가 처들어 와서, 모두 종으로 잡아 갑니다.
남유다에도 똑같이 흉포한 나라, ‘바벨론’이 처들어 와서, 모두 종으로 잡아 갑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종이 되었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종으로써 살아가는 모습은 전혀 달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얼른, 앗시리아 우상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또 앗시리아 사람들과 혼인하였습니다. 자 이렇게 하여, 아예...통째로 앗시리아 사람이 되어갈 될 때에, 종의 지위는 벗어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도 쉽게 잊어 버렸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말씀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한편 남유다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잡혀갔던, 앗시리아 보다, 두배나 더 먼,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만...철저하게,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앞에서, 무릎꿇지 않고, 그곳에도 종이되어,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위협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타는 불구덩이 속에 던져 졌습니다.
심지어 에스더 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남유다 사람들 모두를 다 죽인다는 계획까지 세워졌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하나님 섬기는 것을 핍박하고, 오히려 우상을 섬겨야 하는 세상으로 변하였지만... 남유다 백성들을, 그곳에 종이되어서도, 목숨을 걸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70년 후에,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럴때에, 남유다 백성들은, 잡혀갔던 모습 그대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손자 손녀...손에 손을 잡고, 즐겁게 고국으로 귀향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피도 섞이고, 문화도 없어지고, 스스로를 북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시리아 밑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믿을을 버릴때,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릅니다.
또 우상을 섬기고, 같이 흥청망청 생활할 때, 얼마나 대우가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결과, 말씀이 사라지고, 나라가 사라지고, 백성도 사러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앗시리아가 망할 때, 즐겁게 돌아와서, 다시 북이스라엘을 세울 사람들 조차 없어지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귀한 것을 귀한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공기 얼마나 귀합니까? 요즈음 공기가 오염되어, 날씨까지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름내 장마요, 가을도 가을 같지가 않습니다.
이제 공기 귀한 줄 알고, 탄소배출제한, 공기오염방지법...등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돈을 물쓰듯 한다고 하지만, 요즈음에야 물이 얼마나 귀하게 되었습니까?
먹는 물 한병이, 같이 양의 석유보다 얼마나 더 비싼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다음에야 귀한 것인줄 아는, 어리섞은 지혜라 하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귀한 줄 알고, 그러기에, 더욱이 어려울때, 말씀 붙잡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킬때, 세상으로 보면, 얼마나 어리섞은지 모릅니다.
시류도 모르고, 우매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요.. 그것이 나를 보전하는 길이요.. 그것이 잘되는 복된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오늘 이 시대에도, 그러기에 더욱 말씀을 귀하게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
어떤 우리 안에 ‘백조’와 ‘거위’가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백조는 주인의 눈을 기쁘게 해주었고, 거위는 주인의 혀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백조는 정원의 연못에서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날개를 펴 우아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기도합니다. 식탁에 오르는 운명을 타고난 ‘거위’와는 차원이 다른 새 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요리사가 만취되어, ‘백조’를 ‘거위’로 착각하고, 거위를 붙잡는다는 것이, 그만 ‘백조’를 붙잡고 말았습니다.
백조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더니, 잘못하면, 죽어서 요리가 될 지경입니다.
요리사가 백조를 잡으려고 목을 조릅니다. 하지만 이 위험한 지경에도, 백조는, 꽤꽥 하며, 소리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침착하게, 백조의 몸가짐을하고, 백조의 울음소리를 내었습니다.
자 그럴때 요리사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거위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아닙니다. 거위와 같은 날개 짓이 아닙니다.
“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이렇게 아름다운 백조를 요릿감으로 쓰려고 하다니, 미쳤구나. 그놈의 술이 원수야.”
그리고 백조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무수한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조를 지킬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방족속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힙니다.
제가 볼때, 이제는 정의가 없어진것 같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잘되고, 악인 융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에, 의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해야 합니까....
그럴때, 하나님께서 하박국 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람이 보는 눈으로는, 이제 의인은, 또 믿음의 사람은, 살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기에 의인의 사는 길은...믿음의 길이 있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똑같은 어려움이 왔을때,
북이스라엘은 우상의 길을 갔습니다. 불신앙의 길을 갔습니다. 그길은 편한 길이요, 넓은 길이요. 즐거운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멸망의 길이요. 재앙의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그 길로, 갈때에, 이스라엘 10지파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어려움에서...
남유다는, 목숨을 걸고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어려움의 길이요, 않풀리는 길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지키고, 말씀을 붙잡을때, 남유다는 살게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성전을 세우고,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불신앙과 우상이 넘치는 시대입니다.
똑같은 두가지 길이, 오늘날도, 우리 앞에 펼져지고 있습니다.
넓은길, 불신앙의 길,
좁은길, 믿음의 길....
어떤 길을 가시겠습니까?
무엇으로 승리하시겠습니까?
자 이런때일수록,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으로 달려가...
오늘날, 승리의 멸류관 쓰는, 모든 성도님들...
이시대에, 하나님의 영광드러내는, 우리 김포상도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