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마음 요나서 4장 1절 11절
2007.09.29 21:12:33 조회5353
요나서 4장 1절 11절 요나의 마음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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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하여 화를 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 너는 ‘링컨’을 좀, 본 받아라.... ‘링컨’은 책을 읽고 싶어서, 맨발로 수십리나 가서, 성경책을 빌려와서 밤을 세워 읽었단다”
아들이 시무룩 해서 듣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더 신이나서 말합니다.
“예, 너는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니, 책도 있고, 책상도 있지데,
왜 링컨처럼 열심히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냐?
그러자 아이는 아버지를 올려다 보며 말하였습니다.
“네, 그래서 ‘링컨’은 아버지 나이때에 대통령이 되었잖아요. 아버지는요?”
무엇이든, 남에게 말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말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생각이 앞서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생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이 아주 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척 보면 삼천리 라고, 벌써 결과까지 다 알고, 짐작하는, 아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혜가 뛰어나고, 비상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혜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뛰어나고, 지혜로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루지 못하는 생활을 살아고 말았습니까?
오늘날도 세상에는 지혜가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때,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복음의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1. 사명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1절 2절 말씀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싫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지않고, 반대로 가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다른 것으로 출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사흘길이나 걸리는 니느웨 성읍에서도, 하루만 전하고, 끝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싫어하며 성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싫어하며, 성을 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이 잘못된 것입니까?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시고,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 이십니까?
그런데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라고, 성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요나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체면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생각 할때 화가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니느웨 성읍은 40일 만에 멸망할 것입니다.”
자 이렇게 전하였을때, 40일 만에 멸망하였으면, 요나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니느웨는 40일 후에도 멸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다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 한편,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과는 별개로, 요나는 속이 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멋있게 전하고, 전한대로, 되어야 하는데, 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실없는 이야기나 하는 사람으로 비쳐지지는 않을까?
벌건 대낮에 그렇게 큰 도성이 멸망이라니....엉터리 같은 사람으로 손가락질 당하지는 않을까?
생각할때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기 까지 합니다.
다시는 니느웨 성읍을 얼굴들고 다니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을 전하고, 전도할 때, 비슷한 모습들을 가끔씩 보게 됩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가십시오. 예수님을 않믿으면, 지옥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하였을때, 예수님 믿는 사람은, 천사들이 내려와서 천국으로 대리고 가고,
예수님을 거부하였던 사람들은, 땅이 갈라지고, 갖은 비명을 저지르며, 지옥불에 떨어지면,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않믿는다고 하여도,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않믿고, 반칙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잘됩니다.
적당히 속일것 속이고, 세상 열락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얼마나 보란듯이 으스대며 사는지 모릅니다.
그럴때, 요나와 같은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악인이 잘되도록 내버려 두시려면, 왜 저보고 예수님 전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 않믿는 사람들도, 저렇게 잘되면, 애써서 믿는 저희들은 무엇이 됩니까?
오늘 말씀의 요나 선지자는, 악인이 잘되고, 악인의 도성 니느웨가 망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는것을 보고,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 100년 후에, 나훔 선지자가 나타나서, 똑 같이, 니느웨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나훔서 3장 마지막 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나훔서에는 회개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니느웨가 한번 더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돌이시키겠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니느웨는 멸망하게 될것이라고, 바로 말씀하시고 끝내버리십니다.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니느웨에게는 회개하라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100년후 나훔 선지자를 보내실 때에는, 기회없이 니느웨는 처참하게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고 심판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개인이게도, 복음을 들고, 우리를 보내실 때에는,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기회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도를 거부하고 살아갈 때, 100년 후 니느웨처럼,
100년 후에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때에는 ‘한번더’ 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양은 오른편, 염소는 왼편에, 성도들은 하늘나라로, 악인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사로를 핍박하였던, 한 부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을때에는, 죽음은 없고, 지옥이 어디있나 하며, 맘대로 즐겁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지같이 살면서도, 하나님을 믿던 나사로를 너무나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고 난 다음에 보니, 나사로는 천국에 가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은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너무나 괴로워서 소리칩니다.
너무나 목마릅니다. 물한방울만 주십시오... 그러나 지옥에서는 물 한방울의 자비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한번 말합니다. “ 나는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내 형제가 다섯명이 있는데, 그들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토록, 말해 주고 싶습니다. ”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듣고 깨우칠 꺼면,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벌써 깨우쳤을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하신 기한이 있고, 또 않보시는 것 같지만, 아니요...공의롭게 사람을 다 살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의 체면만 생각하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때, 불평하는 사람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나에게 주신 사명을 올바르게 붙잡지 못할때, 넘어지고, 실수하고, 믿음이 약하여 지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 사명자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어떤 학생이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 맞추고 난 다음, 친구한테 자랑합니다. “친구야 이 퍼즐 어떼?”
친구가 무덤덤하게 말합니다. “ 그래, 대단하구나. 그런데 얼마 걸려서 완성한 거니”
이 학생이 우쭐하며 말합니다.“ 한달...”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합니다. “ 한달이나 걸리니?”
그러자 학생은 퍼즐의 포장지를 보여 주며 말합니다. “이 퍼즐은 24개월에서 36개월용이라고 나와 있잖아. 그런데 난 단 한달만에 완성했으니 대단한거 아냐?”
친구가 웃으면서 대답했줍니다. “ 이 퍼즐은 24개월에서 36개월개월용 그러니까 2살에서 3살 어린이들 대상이라는 뜻인데....”
요나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사명자의 생활을 살아갈 때, 생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관심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퍼즐을 즐거워 하는 유머속의 학생마냥, 생각과 관심이 작아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음 품고,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가지며 살아가야 할 사람이,
오히려 박넝쿨로 크게 기뻐하는 사람으로, 작아지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앙의 퇴행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 줄어듭니다.
신앙생활이 줄어듭니다.
봉사가 줄어듭니다.
나눔과 섬김이 줄어듭니다.
그 전에는 나누어 주고, 섬기는 일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였던 성도가..
어떻게 된 일인지, 예배도, 믿음생활도, 봉사생활도, 나눔과 섬김생활도, 어린아이 처럼 줄어듭니다.
한편 신앙생활보다 다른 부분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박넝쿨로 크게 기뻐하는 요나처럼, 골프에, 낚시에, 경마에, 푹 빠져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골프하고, 낙시하기 위하여, 해외여행까지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연출가입니다” 라는 책을을 쓴, 김수형 감독이 있습니다.
김수형 감독은, 요즈음은 기독교영상선교회를 설립하여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7인이 말괄량이’‘갯마을’‘뜸부기 새벽을 날다’ 등의 영화가 김수형감독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옛날의 작품들을 돌아보며, 이제는 복음을 위하여,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결심을 하고, ‘예영커뮤니케이션’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기독교영상시설을 만들려고 하니까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한 사업자가 찾아와서 말합니다.
“김감독님, 애로영화 한번 찍어주시면, 제가 엄청난 돈을 드리겠습니다.”
돈이 보통돈이 아닙니다. 그 돈이면, 기독교영상시설을 다 만들고도 남을 돈입니다.
그런데 그때 김감독, 딸이 말하더랍니다.
“아빠, 옛날에 비슷한 영화 찍어서 돈많이 벌었잖아요...그런데 그 돈 지금 다 어디있어요?
그렇게 찍어서 번돈,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잖아요?“
이 말을 듣고, 김수형 감독이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내가 움켜잡는다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겠지”
그래서 깨끗하게 거절하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진행하여, 어렵지만, 무사히 예영커뮤니케이션을 잘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명자의 자리를 벗어날 때,
요나는 하나님께 불평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생각이 줄어들어, 박넝쿨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박넝쿨 그늘에 안주할 때, 그 조그만 박넝쿨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그래서 박넝쿨이 소망이 되고, 박넝쿨이 말라 죽을때, 슬퍼하며 화를 내는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잊어버린채.....,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리에서 떠서,
박넝쿨과 같은 것으로 기쁨을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박넝쿨 밑에서 일어나, 나와 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써 주십니다. 박넝쿨로 정도가 아닙니다.
니느웨에 일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멸망으로 무너질 도성을 구하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는 큰 사람으로 써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사명자의 자리에서 물러서서는 않되겠습니다.
3. 사명자의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0절 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오늘날 베들레헴 지역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베들레헴 지역에는 ‘베들레헴 재활병원’이란 병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조그만 병원의 병원장은, 3대째 독실한 기독교인인 에드문드 체하데씨 라고 합니다.
6일전쟁이 일어나고, 수시로 전쟁이 일어나자,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너 나 할것 없이, 이민가기 시작합니다.
한편 프랑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집으로 온, 에드문드도,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곳 보다는, 프랑스나, 독일이나, 영국을 이민을 갈까?
그런데 그때 늙은 아버지가 말합니다.
“너마저 떠나면, 병들고 지친 이곳 사람들은 누가 돌보겠느냐”
이 말을 듣고, 베들레헴에서 홀로 병원을 개원하여, 아픈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에드문드씨는 예수님이 태어난 땅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오늘날까지, 정성스럽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이 가신길을 갈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이 맡겨주신 자리에서 기쁨으로 살아갈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기 세워주신 자리에서 찬송하며 살아갈수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내가 세상에서 복음을 들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것은,
내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지혜로워서가 아닙니다.
내 뒤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를 잊어버리고,
혹, 박넝쿨로 크게 기뻐한 적은 없으십니까?
사명의 자리를 붙잡고,
사명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을때,
하나님께서는 사명자로 써 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많은 영혼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복된 사명자로 다 쓰임받는, 우리 김포상도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