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1절 16절 누룩을 버리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4월달이 시작되었습니다. 4월달은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있는 달입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부활절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구원의 새피조물, 영생의 산 소망을 주시려고, 부활하신 날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또한 부활절을 통하여, 우리가 영원히, 영생복락 누리게 되는 것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뜻깊은 부활의 달을 시작하며,
먼저 십자가의 자리에 가보고, 또한 먼저 앞서서 부활절의 자리에 가보려고 합니다.
1. 누룩이 있으면 부활의 자리에 갈수가 없습니다.
4절 5절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또한 우리를 완전히 거룩한 새피조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그 사건은 오늘 말씀에 4절에, 비유로써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 보니까..“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요나 선지자가 풍랑이 이는 죽음의 바다에 던져짐으로 인하여, 배에 탄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흘 후에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나옴으로 인하여, 니느웨 성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은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서 2장 2절에 말씀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내려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예수님의 사랑을 짐작할수 있는 대목입니다.
요나서 2장 9절에 말씀입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받으시고,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수 있는 대목이 아닐수 없습니다.
자 이러한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니느웨 사람들이라도 구원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어떠한지 느끼게 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바로 이 질문을 하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성경에 대하여 잘 압니다. 성경을 가르키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너무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표적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다른 표적을 끝없이 또 구하였습니다.
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표적을 못보아서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사람을 고치나 않고치나? 눈에 불을 켜고,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니까? 당장에 예수님께 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십니까? 예수님을 시험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적을 보았지만, 표적을 볼 때 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 시험하였지? 예수님을 믿을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표적을 보여달라..자꾸 표적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자 이러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잘못된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누룩이라고 말씀하시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바라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부정적인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직접 받았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말을 쉽게 합니다. 부정적인 소문을 냅니다. 믿음에 게으름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계속하여 신기하고 재미있는 표적을 계속 보여 주십시요... 표적만 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표적은 가르키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3일만에 부활하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깨닫게 되면, 표적은 그 역할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표적자체는 목적과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은, 사람을 표적 자체에만 머물러 있게 만듭니다. 표적을 보면서도 표적이 가르키는 예수님은, 정작 보지 않습니다.
또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의 누룩의 마지막은, 시험과 태만과 의심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시험합니다.
예수님의 표적이 과연 하늘로써 내려온 것입니까? 의심합니다.
그리고 표적을 보면서도 전혀 믿지 않습니다. 믿음의 태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맞이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으로 맞이하여서는 않되겠습니다.
이렇게 부활절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번 부활절에 빠진것이 있습니다. 부활절을 부족한 것 때문에 은혜를 못받았습니다.....부활절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바라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절 절차와 순서와 내가 느낀것에...매몰 되어 버립니다.
순서와 절차를 위하여 부활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절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실 것을 분명히 확신하지 못하면, 부활절날 나의 믿음은 실패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은 오늘날도 세상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의심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태만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은, 외식주의요, 형식주의, 불신앙이요,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데 앞장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1절-- 5절 에는 말씀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는 것은, 헌신과 고난과 괴로움 없이는, 나아갈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빌라도의 관정에서...골고다 까지, 직접 걸어가본 적이 있습니다.
옷도 간편하게 입고, 만반에 준비를 하고 걸어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걸어가는데 만도 힘이 듭니다. 땀이 뚝뚝 떨어지고, 숨이 찹니다.
나도 모르게, 숙연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나는 편하게, 십자가도 없이, 걸어가기만 하여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온갖 채찍을 맞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뜨거운 뙤악볕 아래에서, 등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나 같으면 10미터도 못간다고 넘어졌을텐데...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 끝까지~~ 올라가셔서,
거기서 십자가에 박혀서, 죽으셨다니...
예수님..내가 죄인입니다.
예수님..나는 십자가 옳게 못지고, 살아 왔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마음이 숙연 할수 밖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2.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 있는, 부활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3절로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정말 한번, 나의 죄짐이 벗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분명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부활절에는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든지, 확신하고, 믿고, 나의 부활로, 간절히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제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넘어설 때, 비로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데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고 예수님께서 질문 하십니다.
그럴 때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 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질문을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날도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관점에서,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숭고한 휴머니스트’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정도는 잘 이야기 해 주엇다고 할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향하여, 기독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즈음은 인터넷에서, ‘개독교’라고 까지 말합니다.
십자가가 보기싫다..꼭 동네방네, 십자가가 여기저기 보여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얼굴이 뜨거워 지고, 부끄러우 십니까?
예수님께서 골고다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리니까..그 밑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조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대제사장이, 서기관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욕 받으시고, 조롱 받으시고, 갖은 비방과 험한 말을 들으셨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십자가의 자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십자가의 자리를 기억하며, 종려주일, 고난주간을 보낼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자 세상사람들은 이렇게 말들 하는데..그렇다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예수님께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관심없습니다. 요즈음 바뻐서요.. 부활절도 올까말까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욕하는데,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보니까..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선듯 대답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 모욕, 나를 위하여 당하신 것이고..
그 조롱, 비방, 온갖 험한 말...날 위하여 들으셨는데...
“예수님은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방하여도, 나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번 부활절...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여도, 나는 예수님께 영광올려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요...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내 마음으로, 내 믿음으로, 내 정성으로, 직접 고백하는 부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그 눈물을 씻겨 드릴려고, 저는 일찍 오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받으신 것이, 다 잊혀 지도록, 저는 예수님을 위하여 열심히 찬송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주차관리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한 영혼을, 그날 제가...데리고 오겠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9:27 에는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분명하였던 것 처럼, 우리의 구원이 분명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것 처럼, 그 다음에는 영생이 분명히 있고, 영벌이 분명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말씀해 주신 것 처럼, 지옥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하시기를 기뻐하시지만, 끝까지 부인하고 배반할 때...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십자가와 부활이 연결되어 있듯이,
구원과 영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편에는 분명히 심판과 지옥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 무책임한 사람이,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갈수 없듯이
예수님 앞에 불신앙과 부인은, 다른 사람의 몫이 아니라, 곧 그 사람이 스스로 져야할 몫으로 돌아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불신앙과, 세상의 조롱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양과 염소를 나누기 위한 과정이요,
부활의 자리와 심판의 자리를 나누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 부활절에는, 다시한번 2천년전 십자가의 그 자리로 돌아가고, 2천년전 부활의 그 자리에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십자가를 어루만지고, 피묻은 주님의 손과 발을 보듬고,
부활의 자리에서 기뻐하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서,
나의 입으로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의 고백하고,
나의 몸으로, 십자가에 참여하는,
성숙한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