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7장 1절 9절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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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편 잘 않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소한 차이로 갈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잘 되는 사람은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삶을 감사하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즉 자기삶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런 사람은, 긍정적이며 만족적이며 삶에 대하여 주도권을 행사하여, 삶을 이끌어 갑니다.
반대로, 자기 삶에 부정적이고 부끄러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자기삶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정적이며 불평하며, 삶에 대하여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자기에게 주도권을 강제합니다. 그래서 삶에 이끌려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 가리봉동에는 외국인 비율이 68%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중 다수가 중국인 및 중국동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리봉동에는, 쓰레기 무단 투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구청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짜내었습니다.
골목마다 현수막을 내 걸었습니다. '쓰레기 무단투기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이 죄는 자식 대까지 불운하게 만듭니다'
현수막을 붙인지 한달만에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환경미화 담당자들이 놀랍니다. "무단투기 쓰레기가 줄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인근 구로구에서도 같은 현수막을 내걸기 시작했습니다. 현수막은 60개까지 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민원을 내었습니다. “현수막 내용이 너무 섬뜩해요. 빨리 철거해주세요." 그래서 좋은 효과에도 불구하고 철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느냐?
수동적으로 이끌려 따라가느냐? 너무나 중요한 요소가 아닐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믿음은, 수동적으로 이끌려 따라가는 믿음이 아닙니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말씀에, 다윗왕은 스스로 적극적으로 행동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해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마지못해 따라갔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왕은 예루살렘에 성을 짓고, 왕궁을 지었습니다.
왕궁을 짓고 난 다음, 하나님의 법궤가 성막에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주위의 원수를 무찌르게 해주시고, 내가 평안히 궁에 살게 해주셨는데,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법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구나
하나님의 법궤가 안전하게 있을수 있는, 성전을 지어야 겠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법궤의 형편을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믿음의 생각,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더욱 잘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 스스로 믿음을 가질때… 하나님께서는 위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율법은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으로 율법에 있는대로, 이렇게 하면 부정하게 되고, 이렇게 하면 벌을 받게 되니,
율법에 있는데로만 합니다.
이것은 좋은 믿음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좋은 믿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믿음입니다.
좋은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스스로 하는 믿음입니다.
다윗왕은 스스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왕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아니 축복을 주어 보았습니다.
주위에 대적을 멸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으로 세워 주었습니다.
비슷한 축복을 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왕입니다.
사울왕도 주위의 대적을 멸해 주었습니다.
제비를 뽑아, 이스라엘에 왕으로 세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왕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높이고, 스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을 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십시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아말렉에서 좋은 가축은 자기를 위하야 숨기고, 거짓말을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조차,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하던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쫓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은 보시고 진노하시고, 그에게 주셨던 축복을 거두어 가시고,
그 축복을 빼앗아 다윗왕에게 주셨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일을, 내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똑 같은 축복을 받자 말자, 스스로 하나님의 법궤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축복이 너무 귀한데,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피 한방울 까지, 흘리시면, 나를 천국에 갈수있도록 해주셨는데,
예수님을 생각할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고,
스스로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살아가는 믿음이, 바로 성숙한 믿음인 것입니다.
무슨, 율법이 정하여져 있기 때문에, 사순절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날이고,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매일매일 이기에,
성숙만 믿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사순절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도표...잘 하고 계십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이번주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며, 동그라미를 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번에 응답받을 기도제목을 정하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도, 도무지 깜깜입니다.
예수님이 천국가도록 해주셨는데, 도무지 무슨 일이 있었나, 기억도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날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라고 해도, 아무 관심이 없다면,
그 믿음이 과연 성숙한 믿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령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눈이 침침해 집니다. 병원에 갔더니, 각막이 탁해져서, 각막 이식수술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실명할수 밖게 없습니다.
자 어디 가서, 눈동자의 각막을 급하게 구할수 있겠습니까?
눈이 두개라고 해서, 자기 눈에 각막을 떼어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심해서 집에 와서, 실의에 빠져 있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갑자기 각막을 기증하겠다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병원으로 어서 오십시요..
젊은이가 뛸뜻이 기뻐하며,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하였습니다.
수술을 하고 보니, 세상이 또렸하게 맑게 보입니다. 너무너무 좋습니다.
기분좋은 마음으로 집에 오니, 어머니가 안대를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왜 안대를 하고 있어요?”
“눈병이 나서 그렇다... 금방 가라앉겠지”
그런줄 알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의 눈병이 났지가 않습니다.
하루는 세수하는데 보니, 세상에나 눈동자가 없습니다. 희게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 눈동자가 왜 그렇게 보기싫게 되었어요..”
“사실은 너의 각막을 이식하려고, 내 각막을 기증했단다”
그말을 듣고, “그래요. 바뻐서 출근해야 되니까. 뒷이야기는 다음에 해주세요.”
그리고 무심경하게 가버리는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성숙한 아들은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께서 나의 생명을 구하시려, 온갖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해 주셨는데,
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일이 바뻐서 가봐야 겠습니다.
그러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예수님을 사랑하시되, 사순절에 스스로 성숙하게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성숙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왕을 보실 때, 기뻐하시고, 위대하게 되도록 축복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 성숙한 믿음은 하나님을 높혀 드리는 믿음입니다.
5절, 6절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유머입니다.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살이쪄서, 배가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친구들이 말합니다. “어이..배가 어쩌면, 그렇게 많이 나왔어?”
덤덤히 말합니다. “아..이거 에어백 이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생각해 주지 않고, 일부러 곤란하게 질문한 친구들이 좀 그렇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공감의 능력’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마음에서, 생각할수 있는 능력이, ‘공감의 능력’입니다.
지능이 떨어지는 동물은 상대방의 입장,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지능이 놓은 동물은 상대방의 입장,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합니다.
값비싼 품종의 애완견을 보면, 주인이 아픈척 하면, 그 주위에서 왔다갔다 하며 어쩔줄을 몰라 합니다.
침팬지나 돌고래 쯤 되면, 공감의 능력이 엄청납니다.
상대방이 괴로워 하면, 같이 괴로워 하고, 옆을 떠나지 않고, 돌보아 줍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 하고, 먹을것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나는 분명, 상대방과 한 몸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숙하고 공감의 능력이 높을수록
심지어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상대방의 눈으로 나를 보고,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뜻을 알아 차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윗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축복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눈으로 스스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은 축복을 주었는데,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모른척 하는 것이, 과연 바른 도리인가?
나는 축복을 받아서 백향목 궁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추운 천막에 있는데 모른척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과연 어떻게 보실까?
대단한 마음이 아닐수 없습니다.
대단한 공감의 능력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그결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성전을 짓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왕의 결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왕에게 말씀 하십니다.
5절 말씀을 보니까..“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자 이 말씀을 볼때에, 하나님께서 지금 다윗왕에게,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입니까? 성전을 건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어법으로만 보면, 네가 나를 위하여 살집을 건축하겠느냐?.... 건축할 수 없다.. 건축하지 말라는 말씀 처럼 들립니다.
6절 말씀보니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
자 이 말씀을 볼때에,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지 않고, 장막과 성막안에 다닌 것이, 좋으셨다는 것입니까? 않좋으셨다는 것입니까?
어법으로만 보면, 이스라엘과 동행하실 때, 장막과 성막안에 다니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것 처럼 들립니다.
7절 말씀 보면 더 이상합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어법으로만 보면, 성전을 건축하지 않았느냐?고 말한적이 없었는데, 너는 왜 성전을 건축하려 하느냐? 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지금 다윗왕에게, 성전을 괜히 건축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성막에 다니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성전 않짓는다고 말한적이 없는데, 왜 성전을 지으려고 하느냐?고 야단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성숙한 마음, 공감의 눈으로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 말씀의 속뜻을 알수 있게 됩니다.
부모님들이 나는 괜찬다. 않먹어도 배부르다..고 할 때...진짜 배가 불러서 않먹어도 됀다고 하는 뜻입니까? 아니지요.. 자녀에게 먹이려고,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배고프지만 배부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배부르다고 합니다. 배부르니 그럼 내가 먹겠습니다. 그리고 덜렁 먹겠지만,
정말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배부르긴 뭐가 배가 불러요. 사람이 않먹으면 배고픈것은 당연한 것 인데, 지금 말은 배부르다고 하지만 배가 고픈 다 압니다.
아버지 어머니 드십시요. 그리고 오히려 드리지 않겠습니까?”
반어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잘~~~ 했다”... 그럴 때 그 말을 듣고, “잘 했답니다.” 그러고 좋아하며 가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 이해를 한 것이지요..
“힘들텐데...뭐 이런걸 다 했어” 그럼 야단 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야단 치는 것 같지만 반대로 칭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괜찬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 너가 어떻게 내가 살 집을 건축할수 있겠어?...
광야생활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는데..
너에게도 성전 않짓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어?
다윗을 야단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오히려 칭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바로 그 다음절을 보면 분명하게 알수 있습니다.
8절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말씀부터 틀리지요..그러므로...즉 앞에 야단치는 것 같이 들리지만 아니지요? 앞에 말씀의 연고로...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종 다윗에게....” 하나님게서는 이제 다윗왕을 ‘나의 종’이라고, 친근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8절부터 16절 까지..오늘 본문은 9절까지만 보았습니다만...8절부터 16절 까지..
절마다,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야단치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야단치는 것 처럼 들리지만, 야단 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능력, 성숙한 마음으로 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야단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의 말씀이었고,
나무람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다윗의 성숙한 믿음을 기뻐하시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의 마음과 눈으로 생각하고 보는 사람입니다.
사순절, 부활절...
혹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걱정하실수 있습니다.
사순절 매일매일 기도할수 있겠어?
부활절 생명초청잔치 할수 있겠어?
꼭 그렇게 까지 않해도, 나는 너희를 아가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한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윗왕은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믿음으로 결심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의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성숙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다윗을 위대하게 높혀 주셨습니다.
이번 사순절, 부활절,
더욱 깊어지고, 성숙한 믿음이 되어,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라고, 위대하게 해 주시겠다고, 높여주시는
은혜의 사순절, 부활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