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오심 요한복음 1장 1절 5절 대강절4
2016.01.12 10:01:16 조회2245
요한복음 1장 1절 5절 빛으로 오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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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서울대학교 재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금수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은 희망어 죽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분명히 맞서야 하겠습니다.
결정론적 세계관은, 이 세상은 이미 정해저 있다고 생각하는 사조입니다.
결정론적 세계관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미래가 결정되어 버리고,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결정론적 세계관은 참으로 잘못되어진 생각이 아닐수 없습니다.
결정론적 세계관에 빠지면, 사람이 나약해지고, 허무해지고,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스스로 한탄하고 억울해 하는, 금수저 이론으로 생각하더라도,
요즈음 대학들어 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서울대학에 들어갔다면, 이미 다름사람보다 엄청난 금수저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결정론적 세계관에 빠져 있다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금수저는 작아 보이고, 남이 가지고 있는 금수저는 엄청나게 크게 보입니다.
이런 잘못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때, 이 세상은 희망이 없고, 죽는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세상이라고 스스로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무엇입니까?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시고
바로 이 잘못된 결정론적 세계관을 깨뜨리고, 소망을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1. 죄악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은 가만히 놓아두면, 자연적으로 부정적인 것에 빠지게 됩니다.
서울대학에 들어가도, 나는 가진것이 하나도 없다고 억울해하며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람은 부정적이, 되는 것입니까?
죄악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절 에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로마서 7:24에 말씀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어떠한 미사여구로, 사람의 의지와 가치를 칭송한다고 할 지라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함 아래에 있는 존재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악합니다.
행하는 것이 악합니다.
아니 세상 자체가 악합니다.
자, 조건만을 생각한다면,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보면,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세상은 멸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패악함을 죄악세상을 바꾸시려고,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죄악의 거대한 흐름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멸망의 흐름을 돌려 놓으시고, 죄악의 고리를 끊어 주셨던 것입니다.
따라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희망 시작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정론적 세계를 무너뜨리시고, 소망의 빛을 우리에게 비쳐 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을 보여주시고,
죄악을 이기시고 구원을 보여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이 힘으로는 인도를 이겼습니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지요.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반대입니다.
영국이 오히려 인도에 져서, 인도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가...참선...다, 인도에 것이지요.
영미국가들 보면, 다 요가 하고, 참선 하고, 인도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고, 소망과 희망이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때,
은연중에 힌두교와 불교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과 미국에, 믿음이 불일듯이 일어나고, 말씀위에서 열심히 살아갈때는 영국과 미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국은 세계의 도덕과 질서를 수호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미국을 들여다 보면, 크리스챤이 타락하고, 믿음이 약하여 질때, IS와 싸우는 것도 무서워 하여, 말만하는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전 오바마 대통령이 솔직히 이야기 했지요. 나는 절대로 is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is와 싸움하면 한달에 사망자가 100명 부상자가 500명 전비가 100억달러가 들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적 세계관은 많은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고, 벌벌 떨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면, 골리앗이 서서,
“누구든지 나에게 덤벼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얼른 계산해보고 벌벌 떨면서 한사람도 골리앗에게 덤벼들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성을 튼튼하게 지어 놓으니까, 사람들이 얼른 계산해보고, 다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한사람도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반대입니다. 결정론적 세계관이 아닙니다.
나는 연약하고, 나는 힘이 부족하고, 나의 능력으로는 않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나갑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갑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믿음으로 나갈때, 골리앗이 넘어지고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나갈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결정론적 세계관을 무너뜨려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계산적으로 세상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계산을 넘어서서 보십니다.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윗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마음 중심이, 믿음으로 불일뜻 일어 나서
결정론적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2. 그렇다면 성도들은, 복음의 세계관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세계관은 무엇입니까?
은혜의 세계관, 성경의 세계관이라고 말씀드릴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시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은 무너진다는 것이, 바로 은혜의 세계관 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나를 구원하기에 모자람이 없고 충분하며
예수님 안에서, 내가. 지금. 다시 출발해도, 절대로 늦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세계관은 예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세계관입니다.
복음의 세계관은 오늘도 성경말씀대로 살아가는 세계관입니다.
요즈음 ‘응답하라 1988’이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는, 새련되고, 엘레강~~스 해야, 인기가 있는데
\'응답하라 1988\'은 반대인것 같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모두 촌스럽습니다.
요즈음 수준으로 드라마를 보면, 골목길, 집, 학교, 왜 그렇게 촌스러운지요.
말씨나, 행동.... 지금의 수준으로 보면, 왜 그렇게 어색한지 모릅니다.
촌스럽고, 어색한데도, 왜 인기가 있습니까?
1988년, 그때는 촌스럽고, 어색해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 보다가, 훨씬 못살고, 훨씬 생활이 어려웠지만,
그때는 미래가 있었고, 희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훨씬 더 새련되고, 훨씬 더 풍요룝고, 수준이 높아졌지만
한가지가 부족합니다. ‘희망’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내일이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지금,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 하고
‘응답하라 1988’
그때를 생각하며, 그 때를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세계관은 세상기준으로 보면, 새련되지 못합니다.
복음의 세계관은 촌스럽습니다. 억지스럽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세계관 중심에는 ‘희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나의‘미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믿음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좀 어렵고, 모자라고, 힘들어도,
오히려 찬송하며, 감사하며, 활력있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가 있습니다.
1887년, 응답하라 1988 보다가 백1년 전입니다.
1887년 미국은 오늘날 보다가도 더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경제공황 불어 닦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하이드’라고 하는 사람은, 독실한 믿음으로, 그 와중에도 변함없는 믿음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이드는,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던 믿음을 생각하며, 기도생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 십일조 드리는 것은, 엄청난 믿음이 아니면 힘이 듭니다.
그런데, 경제공황으로 어려운 시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하기 힘든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주위에 친구이, 하이드를 미쳤다고 조롱하였다고 합니다.
2년후, 1889년, 하이드는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을 받고 ‘맨소래담 회사’를 설립하였다.
말이 회사이지, 조그만한 구멍하게 이지요.
주위에 사람들의 조롱과 놀림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를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공장들이 문을 닫는 와중에, 오히려 믿음으로 공장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이드의 원칙은 첫때도 믿음, 둘째도 믿음이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경제대공황으로, 사람의 방법이 모두 않통하는 것이 밝혀진 만큼,
하이드는 믿음의 방법 외에는 없다고, 굳게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 어려운 와중에도, 맨소램담 회사는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후로도 어려움이 파도가 많이 지나갔지만, 아직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로 우뚝~~ 서 있을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 보다, 좀 새련되지 못하다고, 주늑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참 희망되신, 예수님을 붙잡고, 당당하게 나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적 기준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필요한 것이 좀 부족하여도 괜찬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갖출것 다 갖추고 있어도 그것이 않통할 때가 옵니다.
그때, 세상사람들은 벽에 막히고 부딪혀서, 넘어지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믿음으로 그 벽을 뛰어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좀 부족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고 간절히 느끼는 분들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있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아가야 될 길이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어 달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른다고 지나치지 않으시고,
꼭, 고개를 돌려서,
“내가 네가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말씀하여 주실줄 믿습니다.
그때, 말씀드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낫기를 원하 나이다.
내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 나이다.
내가 이것을 받기를 원하 나이다.
우리주님께서 희망의 얼굴로, “네 믿음되로 되라...꼭 말씀하여 주실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의 죄는, 우리에게 결정론적 세계관에 물들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결정론적 세계관을 무너뜨리시고
희망과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간절히 나가서,
오늘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