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면서 복음을 고린도전서 2장 1절 3절
2015.11.13 16:40:36 조회2455
고린도전서 2장 1절 3절 떨면서 복음을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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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회에서 헌신예배를 드리는데,
사회를 보시는 분이, 찬송가를 펴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204동 찬송하겠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집사님은, 공인중개사를 하시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오래동안, 공인중개사를 하다가 보니, 숫자가 나오면, 으레히 몇동 볓호. 그러다가 보니,
찬송가도 몇동 이라고 말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익숙한 것은 사실 좋은 것입니다.
좋은 습관은 우리의 생활을 바르게 합니다.
하지만 어떨때는, 익숙한 것이 지나처 타성이 될 때가 있습니다.
매너리즘이라고 하지요.
타성에 젖어서, 정작 중요한 것을 실수하게 됩니다.
가장 핵심되는 것을 노치게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사도바울이 나옵니다.
그런데 3절 말씀보니까, 사도바울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왜 떨었습니까?
사도바울은 달변가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입니다.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고,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성경말씀 그러면, 내가 최고다..
교회 생활 그러면, 내가 최고다, 그렇게 자신할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이 지나치면, 타성이 되어지고, 큰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18장 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오기전에, 먼저 아덴을 방문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덴을 들렀다가, 그다음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덴은 오늘날, ‘아테네’입니다.
철학이 가장 발달하고, 지식적으로 가장 앞서 있었던 도시기 ‘아덴’입니다.
자 그런곳에 먼저 가서, 사도바울은 주늑이 들었느냐? 하면 아닙니다. 오히려 기세가 등등하였습니다.
공부 그러면 나 바울이고, 철학 그러면 나 바울이고, 율법 그러면 나 바울이고,
복음 그러면, 나 바울인데...
내가 철학적으로, 아덴 사람들에게,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가르켜 주어야 하겠다.....
그러고, 아레오바고 언덕에 서서, 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설교학적으로는 너무나 완벽한 설교입니다.
논리학적으로는 너무나 완벽한 설교입니다.
그런데 전도된 사람들이 있느냐? 한명도 없었습니다.
창피할정도로, 완전히 대 실패를 하고, 전도의 열매없이...
후회하면서 아덴에서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큰 자신감이, 이런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구나.
내가 그통안 타성이 젖어서, 잘못된 믿음생활을 하게 되었구나...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할 때, 떨게 되었습니다.
처음 전도할 때, 긴장하던 바로 그 떨림으로
처음 복음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던, 바로 그 떨림으로
잔뜩 긴장하고, 조심하면서,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버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능숙하게 자신하던, 철학을 버리고,
내가 그렇게 자신있어 하던, 논리학을 버리고
초보처럼, 아마추어 처럼, 처음 믿을때 처럼,
연약하여 지고, 두려워 하고, 무척 떨면서, 고린도에서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 익숙하고, 자신감 있어 하지는 않았습니까?
기도 하면 내가 최고,
봉사 하면 내가 최고,
안내 하면 내가 최고,
나처럼 믿음생활하면 된다고, 자신있어 하지는 않았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성령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도 잘하고, 인내도 잘하고, 열심도 있지만,,
하지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너무 익숙한 것 보다는, 오히려 긴장하는 것이 났습니다.
타성에 젖어 있기 보다는, 오히려 겸손하게 조심하는 것이 났습니다.
사도바울이 두려워 하고. 약하여 지고, 떨면서 복음을 전할 때,
정말 문제가 많고, 타락하고, 복음이 뿌리내릴수 없는 곳 같은 고린도 였지만,
반대입니다. 훌륭하게 교회가 세워지는, 복음의 큰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2. 복음은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그렇다면, 고린도에 가서는 어떻게 복음을 전하였는가?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그렇습니다. 이제는 말의 지혜, 미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논물을 쓰면, 삼단 논법이라고 하지면, 서론, 본론, 본론....논리적으로 하면, 내가 1등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논리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것이, 논리적으로 내가 착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이유가 있어서,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지요?
이유가 없습니다. 무 조건적인 사랑의 결심으로, 그냥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셔야 되겠다고, 그냥, 십자가를 져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받게 해주시고, 천국 들어가게 해주시는 것이,...이유가 있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무 조건적으로, 그냥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에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 거부할수 없는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습니까?
어떻게 철학적으로 설명할수 있습니까?
그래서 2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 예수님과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전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만,
종교개혁은 떨림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돌아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타성에 젖다가 보니,
오히려 성경에 없는 것을, 더 중요하게 붙잡고,
비본질적인 것에 노력과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1517년으로 당시로 돌아가보면, 구교가, 복음의 본질에서 너무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우리의 죄를 사할수 있는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부를 사면, 죄가 사하여 집니다. 그리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로마카톨릭은 성경에도 없는 각종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교황무오설... 교황은 실수하지 않고 잘못하지 않는다.
토빗서 유딧서 마카베오 상, 하....성경을 계속 추가 하고 있습니다.
이제 로마카톨릭은, 예수님 보다가도, 마리아를, 더 떠받들고 있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4복음서 어디에도, 성경 66권 어디에도, 마리아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구절이, 단 한구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모기도송을 만들고, 외우고, 성모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칩니다.
요즈음 로마카톨릭은, 마리아는 원죄없이 태어났고,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가르칩니다.
마리아 무염시태, 마리아 승천 교리..
성경 어디에, 마리아가 죽지않고 예수님 처럼 승천하였다는 구절이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마리아가 예수님 처럼 성령으로 죄없이 잉태되었다는 구절이 있습니까?
교회를 지으면, 십자가 보다가도, 마리아 동상부터 먼저 만듭니다.
교회 정문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마리아 동상앞에 가서, 인사부터 가르칩니다.
왜 이렇게 마리아에게 집착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지...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이 떨면서, 붙잡기로 하였던, 복음의 핵심을, 우리도 다시한번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제가 신학교 다닐때, 목회실습을 하면서, 목사로써 조심해야 할 사항들을 들은 적이 잇습니다.
그 중에 생각나는 것은, “목사는 신변잡기에 능해서는 않됩니다.”
목사의 핵심은 교회입니다. 목사가 교회에 집중을 해야지, 다른 곳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들은 예화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촌교회에 부임을 하셨는데, 낚씨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낚시할 때, 그 손맛에 푹~~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아침일찍, 목사님이, 낚시도구를 챙겨서, 출발을 하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아침일찍 어디를 가세요..?
네 낚시하러, 갑니다.
권사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목사님 주일예배는요.
핵심을 놓쳐서는 않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놓치고, 마리아를 붙잡고,
주일예배를 놓치고, 세상의 즐거움을 붙잡고,
사명을 놓치고, 자기 타성에 빠지고..
그러면, 예수님 앞에서 책망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1517년, 루터, 칼빈, 쯔빙글리... 종교개혁자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긴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온 힘을 다하여,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럴때, 복음의 열매가 비로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안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혹시 너무 잘 하여, 자신감이, 타성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놓치고, 다른 것을 아무리 잡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떨면서, 예수님을 붙잡고, 믿음을 든든히 하여,
복음의 결실로 살아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