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16장 13절 21절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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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신앙의 기본이 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대답하는 대답이, 사실은 그 사람의 믿음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 유럽의 상인들은, 아프리카에 보물을 찾기 위하여 많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어느 유럽 상인이, 한 원주민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아이들이 훍에서 뒹굴면서 ‘공깃돌 놀이’를 하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공깃돌을 가만히 보니까, 엄청난 크기의 보석원석 들입니다.
상인이 묻습니다. “얘야.. 너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아이들이 흐르는 콧물을 딱으면서 말합니다. “공깃돌 이라고 하는데요”
상인이 옳타구나 하고 제안을 합니다. “ 그래, 그럼.정말 달고 맛있는 사탕을 줄테니가 그 공깃돌과 바꾸자꾸나.... ”
원주민 아이들은 사탕을 먹어보니, 너무나 사탕이 달고 맛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사탕과 바꿔먹기 위하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보석들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모두 가지고 와서, 사탕과 바꾸어 갔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잘못알고, 잘못 고백하기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되신 주님을... 세상의 단맛나는 것들과 바꾸려는 어리석음이, 없지않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4장 말씀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으로, 질문하고 계십니다.
“세상사람들은 나를 이러저러하게 부른다면,
그렇다면 너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
1. 대답 하여야 합니다.
15절 16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사람은 우리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답하는 존재입니다.
산과 물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크게 소리내어 짖기는 하지만,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로보트나 컴퓨터는, 가르쳐 준대로, 프로그램 해준대로, 반복할 뿐, 책임적 존재로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만이, 책임적으로, 대답할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대답을 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신혼부부가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한참 서루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서로말을 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메모지에 글을 써서 아내에게 보여 줍니다.
“내일 아침 7시에 깨워줘...”
그리고 남편은 이불을 덮어쓰고 자버립니다.
한참 자다가 남편이 벌떡 일어나니까.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 10시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남편은 너무너무 화가 나서, 일어나며 보았더니 침대맡에 메모지가 놓여 있습니다.
그 메모지에는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여보, 아침 7시니, 이제 일어나세요...”
부부간에 싸움 한번도 안하는 부부가 어디있겠습니까?
문제는 서로 대답하지 않을 때, 그때부터 발생하게 됩니다.
속한번도 안썩이는 자녀가 어디있겠습니까?
문제는 자녀가 대답하지 않을때, 더욱 화가 나게 됩니다.
그래서 ‘새티어’라는 학자는, 가족문제의 악화는, 대화가 끊어지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때, 시작된다고 까지 주장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문제입니다만, 더 큰 문제는. 죄를 짓고도, 하나님 앞에 대답하는 존재로 서지 못할 때, 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양심으로, 아무리 마음문을 두드려도, 죄를 지엇으면서도, 입을 꼭 다물고, 아무말도 않습니다.
그럴때, 회개로 답하지 않는 인생은, 사망으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앞에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힘들때, 오히려 더 기도하셨습니다.
모든일을 시작할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베드로는 대답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제일먼저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가 대답할 때 마다, 정답을 맞추지는 못하였습니다.
어떨 때는 잘못 대답하여, 야단도 맞습니다.
변화산에서는 대답할때도 아닌데, 괜히 대답하여, 썰렁한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답을 많이 하다 보니, 그 중에 한두번은 답을 맞추게 됩니다.
답을 맞추게 되니, 베드로는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다른 제자들 중에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한번 듣지 못한 제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야단맞기는 하였어도,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럴때 베드로는 잽싸게, 제일먼저, 얼른 대답합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칭찬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얼마나 놀라운 칭찬이요. 또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 대답하여야 합니다.
많이 대답할 때, 칭찬도 받게 됩니다.
2. 나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3절로 1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
이 말씀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사람들은 그렇게 대답한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려느냐고 예수님께서 제자 한사람 한사람을 향하여 질문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이러한 상황에 속에서 나는 어떻게 고백할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보면, 내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사람들이 학교가기에, 학교에 들어갑니다.
세상사람들이 결혼하기에, 결혼을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늙어가기에, 늙어갑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죽기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세상이는 많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도 “사람들이 장에가면, 거름지고라도 따라간다”는 말이 있을 지경입니다.
특히 우리사회는 좀 심한 것을 봅니다.
올해는 땡땡이 무늬가 유행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땡땡이 무늬를 입고 다닙니다.
운동머신이 좋다면, 너도나도 홈쇼핑에서 운동머신을 삽니다.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만 있는 용어까지 등장하였습니다.
묻지마 쇼핑, 묻지마 투자, 묻지마 관광...
이러한 현상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입니다. 내가 있어야 합니다.
‘로댕’ 이라는 학생은, 프랑스 국립예술대학에 들어가고 싶어서 시험을 첬습니다만, 떨어졌습니다. 재수를 해도, 삼수를 해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로댕은 석재상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석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네, 그리고는 만들어 줍니다.
동상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네, 그리고는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너무나 잘 만듭니다. 옆에서 ‘로댕’을 보던 친구가 말합니다.
“로댕. 너의 재능은 너무나 놀랍구나...
이제부터는, 너의 눈으로, 너의 마음으로, 너의 재능으로 만들어 보면 좋겠구나“
그 말을 듣고, 로댕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잘 만들었지만, 나의 관점관, 나의 마음과, 나의 재능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상을 따라서, 유행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로댕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의 마음으로, 나의 관점으로, 나의 영혼이 묻어 있는, 나의 조각을 만들어야 겠다.
그리고 24년 지나,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하는 ‘거장’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분명한 나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나의 고백이 있는 사람의 신앙은 멋이 있습니다. 활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는 나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려울 때, 힘들 때, 예수님에 대한 고백도 더욱 간절하여 졌습니다.
나중에는 로마군병에게 잡혀서, 죽게 되었을 때에도,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자기고백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죽이려는 로마군병들에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도 이제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것, 얼마나 영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십자가에 거꾸러 메달아 죽이시오..
예수님께서 달린 십자가에, 어떻게 감히,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겠오, 나는 십자가에 거꾸러 메달려서 순교 하겠오..“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연약함을 종종 보게 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신앙의 감기가 듭니다.
신앙에 삐쳐서, 대답이 없습니다. 또 봄 서리에 새싹이 풀어지듯, 믿음도 풀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습니까? 바로 신앙의 자기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자기 고백입니다.
고백하는 만큼, 자기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 알고 고백하였겠습니까?
온 우주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사람이 어떻게 다 알수 있겠습니까?
다 알지는 못하지만,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고백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칭찬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신앙은 지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대학교 교수님들이 제일 훌륭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신앙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정성스럽게, 고백하는 신실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집사님으로, 권사님으로 인정하시고,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어떤 사람이, 칭찬과 상급과 영광을, 받겠습니까?
고백하였던 사람입니다. 힘있게,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내가 책임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3. 고백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세대별 부부의 상태가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10대 부부는 서로가 뭣 모르고 산다고 합니다.
20대 부부는 서로가 신나서 산다고 합니다.
30대 부부는 서로가 한 눈 팔며 산다고 합니다.
40대 부부는 서로가 마지못해 산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이제 중요한것 같습니다만...
50대 부부는 서로가 가엾어서 산다고 합니다.
60대 부부는 서로가 필요해서 산다고 합니다.
70대 부부는 서로가 고마워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젊을때는 몰랐지만, 늙어가면서 오히려, 부부가 서로 감사하고, 고맙고, 필요한 존재인것을 알게되고, 그래서 온전하고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좋습니다. 또 주님께서 주시는 복과 능력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의 고백이 있는, 성숙한 신앙이 되면서 주님의 고난이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향하여 흘리신 눈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게서 나를 향하여 맞으신, 채찍과 아픔과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그제서야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죄의 수렁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어야 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사람은 보게 됩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눈물 흘리시고, 나를 구하시려고, 채찍 맞으시고,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선선히 십자가에서 달려서 죽으시던...
그 할량없는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는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더욱 자라고, 성장하여,
대답하는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고백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새봄, 3월을 준비하는,
한주간으로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