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을 씻어내고 요한복음 9장 1절 10절
2007.01.27 22:27:51 조회7397
요한복음 9장 1절 10절 진흙을 씻어내고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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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골프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사람은, 세상 무슨일이 있어도, 골프아니면 살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돈을 걸고, 내기골프를 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홀에서, 이길수 있는, 절호의 버디찬스를 맞게 되었습니다.
버팅을 하기 위하여, 신중하게 살피는데, 마침 골프장옆 도로로, 영구차 행렬이 지나갑니다.
이 행렬을 보는 순간, 갑자기 이 골프광이 일어서더니, 모자를 벗어들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영구차량 행렬이 다 지나가자, 다시 모자를 쓰고, 다시 퍼팅을 준비합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말합니다.
“자네답지 않게 무슨 일인가? 지나가는 장례행렬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하여,
그 중요한 퍼팅을 중지하다니....“
그러자 이 골프광 사내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니 말하더랍니다.
“지금 지나간게, 바로 25년 동안 같이 살아온, 마누라의 장례 행렬이었다네.”
골프가 주인이 되어, 골프에 종노릇하다 보니, 가정도 버리게 된, 골프광의 이야기입니다.
이 골프광만 그런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보면, 자기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종이 되어 종노릇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차에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차에는 온갖 좋은 악세사리를 다 달고, 애지중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집에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아파트 분양 광고만 보면, 가슴이 덜렁덜렁 뛴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활을 끌고 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혹시 그것에 종이되어, 끌려가는 생활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그것 때문에 찬송을 잃어버리고, 기도를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나는, 그것에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날때부터 ‘어두움의 종’이 된, 한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어두움이, 이 사람을 얽어매어,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두움이 불편하였을 것입니다.
어둡기 때문에, 힘들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가면서, 어두움에 편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종’ 이 되어, 어두움 속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던 차에, 놀라운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1. 진흙을 이겨 붙여야 합니다.
5절 6절 말씀입니다.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어두움의 종노릇 하는 이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라... ”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눈에 진흙을 이겨 붙이셨습니다.
눈이 안보이는 것 자체가, 벌써, 사람들 앞에서, 힘들게 하는 부분인데, 바로 그 부분에 예수님께서는 진흙을 이겨 붙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이 사람은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잘 나타납니다만, 이 어두움의 사람이,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빛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찾아오셔서, 진흙을 이겨 붙이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편하고, 어두움이 되어버린 이 사람은 화를 낼수 있었을 것입니다.
괜히 이러지 마십시오..
그냥 조용히 성정문 앞에서 구걸하며 살고 싶습니다..
죄의 속성 중에 하나는, 우리에게 성장하지 않토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키가 크려면, ‘성장통’이란 것이 있다고 합니다.
키가 크자면, 뼈가 자라야 하고, 뼈가 자랄려면, 뼈마디에 통증, 즉 성장통이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장통도 없는 사람는 키가 크지도 않는 다고 하는 것입니다.
봄에 보면, 나비들이 날아다닙니다.
하지만 모든 번데기들이 다 나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번데기들은 봄이 왔는데도, 번데기에서 나가기를 싫어 합니다.
번데기에서 나가자면, 등딱지를 갈라야 합니다.
등딱지를 가르고 나가면, 너무나 살이 부드러워, 자연의 차가운 공기는 오히려 아픔이 됩니다.
그래서 편안하고 아득한 번대기 속에 있다가, 말라서 번데기 속에서 죽어가는 나비들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눈이 멀어서, 어두움의 종노릇 하는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눈을 베데스다 연못에 가서 씻어라....
창피합니다.
자존심 상합니다.
이렇게 까지, 사람들 앞에 별난사람처럼 보이면서, 눈을 떠야하나 하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순종하였습니다.
어두움에 종노릇하게 하는, 눈에 이겨붙이신, 진흙을 가지고...
베데스다 못을 찾아갑니다. 더듬더듬 물어가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참아가며, 베데스다 연못에 도착하여, 눈을 씻었습니다.
그랫더니, 보입니다. 빛이 보입니다. 하늘이 보입니다. 만물이 맑게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를 종노릇 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십니까?
바로 그곳에, 주님께서 주시는 진흙을 이겨 붙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나를 종노릇 하게 만드는, 고장나고, 병들고, 잘못된 곳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신령한 진흙으로, 고치시고, 새로 빚으셔서,
오늘 나를 새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성장통을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새봄이 찾아 왔는데도, 번데기 속에 있는 나비가 되어서는 않되겠습니다.
나의 죄악의 껍질, 나를 종노릇하게 만드는 것은, 고장난 곳에는
주님의 신령한 진흙을 바르고, 은혜의 생수에, 씻어내어
깨끗하게 되는,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증거해야 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어떤 아이가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엄마, 아기는 어디서 와요?\" \"황새가 갖다 준단다.\"
\"엄마, 나쁜 사람으로부터, 누가, 우리 집을 보호해 줘요?\" \"그야 경찰이 보호해 주지.\"
\"엄마, 우리 집에 불이 나면, 누가 도와줘요?\" \"그야 소방대원의 도와주지.\"
\"엄마, 우리가 먹는 건 어디에서 와요?\" \"그야 농민들한테서 오지.\"
아이가 한참 생각하더니 질문합니다.
\"엄마?\" \"그럼, 도데체, 아빠는 뭐 때문에, 우리집에 있는 거에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빛의 보게된, 눈봉사는,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예수님께 고침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들어 내었습니다.
이것은 쉬운일 같지만, 사실은, 자기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였습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사람은 ‘출교’하기로, 결의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출교된 사람은, 누가 죽여도, 법으로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들 무서워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드러 내놓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눈봉사는 얼마나 대단하게, 말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때리고, 욕하고, 협박을 하여도, 계속하여 굽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감사는 마음과 느낌과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핍박받아도, 생활속에 나타나고,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종노릇할때는, 세상사람들이 오히려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빛을 보게 되니까? 세상사람들이 이제는 알아보고, 핍박합니다.
하지만 눈봉사는 에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하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한참 비방당하고, 버려져서 혼자 있던, 어느날,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
“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 시오 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 이니라”
그렇습니다. 이 눈봉사는, 눈만 뜬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 예수님을 보게되는, 영적인 눈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훈련소가니까, 힘들게 훈련을 시킵니다.
주일 아침에 되어서, “교회 갈 사람 앞으로 나와....”
그래서 이때다 싶어서, 앞으로 나갔더니, 조교가 눈을 부릅뜨며 말합니다.
“아니, 아직도 군기가 빠쪄서, 어디 교회간다고 빠지려고...
왼쪽으로 굴러, 오른쪽으로 굴러”
저는 거기서, 예수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처음 박해를 받아 보았습니다.
예배드리로 간다고 했다가, 땀이 뻘뻘나도록, 한참동안 벌을 받았습니다.
다시 조교가 말합니다.
“일어섯... 다시한번 기회를 주겠다. 교회 않가는 사람는 빠져도 좋다....”
그러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반 이상이 빠져나갑니다.
자 제가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교회 가겠다고 하면, 또 벌을 줄 것이고, 그렇다고 예수님을 부인하려고 하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성도님들은 어떠셨겠습니까?
저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래...예수님을 위하여 벌을 받자...
.그리고 남았있었더니......조교가 말합니다.
“ 남은 사람들, 이름을 다 적어....
남은 사람들은 진짜 예수믿는 사람들이니까. 앞으로 교회는 이 사람들만 간다.... “
그리고 돌아서서 말합니다.
“ 내가 이렇게 해서, 거짓말쟁들을, 골라낼 줄 몰랐지...
나머지는 다 작업 시작하고, 아까 그 사람들만 교회로 출발...”
그래서 다음 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자유롭게 예배드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티를 내어야 합니다. 믿는 티를 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는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깨끗게 되고, 새 은혜로 시작하였다면,
예수님 더욱 시인하고, 고백할 때,
더 큰, 신령한 은혜의 길로 나아가는 문이,
열리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3.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하셨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대화에는 \'1 2 3\'의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이야기했으면, 두번은 들어주고, 상대방의 말의 세번 맞장구치 것이, 대화의 1 2 3 법칙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세 번 말하고, 듣기는 두 번만 들어주고, 인색하게 한번만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 치니까, 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화가 끊어지니까, 감정도 통하지 않고, 마음이 닫혀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기도는 적개하고, 나는 살피지 않고, 상대방의 잘못만 봅니다.
그럴때, 눈봉사는 죄인으로만 보입니다.
않좋은 것만, 불행한것, 죄만,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시각을 교정해 주십니다.
이 사람의 눈이 어두운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광되게 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보지 않고, 찬송하지 않으면서,
나의 주변을 보고, 나의 환경을 볼때, 근심스러운것만 보입니다. 않좋은 것만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도하고 ,말씀보며, 찬송 하면서, 나의 주변을 볼때, 또 나의 환경을 볼때,
하나님의 계획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된, 나의 모습이 보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코끼리는 힘을 주십니다. 독수리는 날개를 주십니다. 사자는 발톱을 주십니다.
그럴때, 사람에게는 힘도, 날개도, 발톱도 없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제일 좋은, 하나님의 형상을 주십니다.
그래서 힘도 없고, 날개도 없고 발톱도 없지만,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힘이 있습니다. 금력이 있습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힘도 없습니다., 금력도 없습니다. 권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제일 좋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있고, 금력있고, 권력있는 세상사람들을, ‘믿음의 사람들’이 다스리고 이기게 하시는 권세를, 하나님은 믿음의 자녀들에게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은혜의 새봄이 찾아 왔는데, 번데기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않되겠습니다.
나를 종노릇하게 하는 환부와 근원에, 과감하게, 예수님의 신령한 진흙을 이겨서,
은혜의 샘물로 씻어내어, 깨끗하고, 온전한 새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되게 예비하셨습니다.
정말 좋은 예수님으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으로 고백하여,
봄이 멀지 않은 이때에,
더욱 신령한 은혜의 길로 나아가는, 귀한 믿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