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 큰 자 마태복음 5장 16절 19절
2006.08.26 17:54:47 조회4987
마태복음 5장 16절 19절 작은 것, 큰 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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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나라는 이야기로 전국이 떠들썩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라진 골목골목마다, 바다 이야기가 들어 왔습니다.
바다이야기가 전하여 주는 내용은 단순합니다.
100원 넣으면, 잘 하면, 250만원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100원을 기계에 넣어 보니까, 이야기가 틀려집니다.
행운이 없다고, 하면서, 250만원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중에는....... 준다든 그 250만원을 구경하기 위하여서,
1000만원 넣어도, 1억원을 넣어도, 10억원을 넣어도,,,,
바다이야기는 절대로 250만원을 주지 않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250만원 볼려고, 수 많은 사람들이, 바다 이야기에게 수조원을 넣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리섞은 모습입니까?
집에 있는 250만원은 돈이 아닙니까?
바다이야기가 주는 250만원만 돈입니까?
수많은 서민들이, 수천만원, 수억원의 돈을, 바다이야기가 주는 250만원의 돈과 바꾸기 위하여, 바다이야기에게 갖다 바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250만원 가지고, 가족들과 화목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참으로 어리썩고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1. 사람은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행실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혜로운 행실은, 성실한 행실, 진실된 행실은, 자신을 복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어리섞은 행실, 죄된 행실, 잘못된 행실은, 자신을 망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진노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16절에는 말씀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번에 문제가 된 사행성 오락기가 몇가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참으로 괴악합니다.
바다이야기, 황금성....
기자가 어떤 사람에게 묻습니다. 사행성 오락기 해보니까 어떼요?
네. 그만둘려고, 손가락 까지 잘랐는데도, 돈만 생기면, 갖다가 넣었습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무서운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는 조금씩 들어옵니다.
한번 하고 두 번 할때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한달 그렇게 하고, 6개월을 그렇게 하니까, 자신도, 가정도, 인생도 모든 것이 망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장)
아무리 250만월을 준다고 하더라도, 않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파멸과, 멸망만을 가져다 주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3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그래서 죄는 절대로 이번 한번만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만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 두 마리가 울타리 너머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마리가 말합니다.
\"여보게, ‘광우병’이라는 무서운 병이, 번지고 있다네...
듣자하니, 존슨 네 농장에서는, 벌써 몇 마리가 걸렸다는군.\"
그러자 상대편 소가 느긋하게 대답하더랍니다.
\"걱정하지 말게나.
광우병은, 우리같은 오리에게는 절대로 걸리지 않는 병이라네..“
절대로 죄와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악한 영은, 이미 죄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관심이 없습니다.
악한 영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할수 만 있다면, 넘어지게 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히려, 항상 우리의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는 지혜가 있어야 되겠다는 사실입니다.
2. 예수님께서 가르키시는 것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17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또 1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옛날에 숫자 4.5와 5가 있었다고 합니다.
숫자 4.5 는 점 하나가 있어, 4.5 가 되다보니, 숫자 5 보다가 적은 수입니다.
그래서, 4.5는 항상 5를 형님이라 모시면서,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4.5가 5에게 반말을 하면서 거들먹 거립니다.
화가난 5가 4.5 에게 말합니다.
\"너 죽을래? 어디서 감히 형님에게..자세가 그게 뭐야.. \"
그러자 4.5가 가만히 째려 보더니 웃으면서 말하더랍니다.
“잘 봐. 나 점뺐어...”
“옛날에 4.5 가 아니라, 이젠 45야....”
요즈음엔 얼굴에, 점을 빼는 것이 쉽습니다. 작은 점은 약으로도 뺍니다.
큰 점은 레이저 수술로 점을 뺍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점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결코 빼서는 않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병들고, 몰상식적인 일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까?
자기 맘대로 점을 뺄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면, 점을 빼고, 내가 원하면 점을 집어 넣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추체가 되어, 내 마음에 들면, 좋은 것이요. 내 마음에 싫으면, 나쁜 것입니다.
내가 즐거우면 좋은것이요, 내가 싫으면, 나쁜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온통 사회에는 나만이 강조되고, 도덕과 양심은 찾아 볼수 없습니다. 그래서 독선과, 과한 주장과 각종 병폐들로 가득 찬 사회가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점은 내가 뺄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귀를 귀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말씀 그대로 복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눈여겨 보신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 대법원장이, 취임식 마지막에, 신임 대통령에게, 꼭 성경말씀을 읽어 줍니다. 바로 신명기 28장 1절 말씀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오늘 여기에 있는 집사님들 권사님들, 그리고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모든 말씀을 치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집사님 권사님, 그리고 자녀들을 세게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유혹이 아무리, 화려하고 그럴뜻 해도, 결코 거기에 솔깃해서는 않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는 복된 신앙이 있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 앞에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리스에 피루스 라는 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피루스 왕은 가지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로마’를 가지려고, 로마와 전쟁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러자 시네아스 라는 철학자가 와서 묻습니다. “왕이여 로마를 침공해서 뭐 하시렵니다.”
왕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로마를 다스리게 되지 ”
철학자가 묻습니다. “로마를 다스려서 무엇 하시렵니까”
왕이 말합니다. “로마를 다스리면, 힘을 길러서, 또 아프리카를 정복해야지..”
철학자가 묻습니다. “아프리카를 정복해서 무엇 하시렵니까?”
왕이 말합니다.“그럼 더 힘을 더 길러서, 지중해의 모든 섬들도 다 정복하지 ”
철학자가 묻습니다. “지중해의 모든 섬을, 다 정복하시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왕이 말합니다. “ 그럼 그 후에는,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잠자며, 쉬어야지...”
그러자 철학자가 말합니다. “왕이여... 지금 목욕하고, 잠자고,쉬면 않되겠습니까?
지금도 얼마든지 목욕하고, 잠자고 쉬며 지낼수 있는데,
왜 그많은 전쟁을 벌인 다음에, 목욕하고, 잠자고, 쉬시려고 하십니까?“
지금 받은 은혜도, 지금 받은 사랑도, 지금 받은 복도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오히려 세상의 복까지 더 가지면, 더 좋을 것이라는, 이 ‘욕심의 유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현대에는 많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단란한 가정을 박차고, 바다이야기를 하러 가는 사람들 처럼,
탕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세상복이 더 귀한 것 처럼, 세상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잘못된 신앙이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의적으로 버리는 사람을 향하여,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내가 원하면 언제라고 받을 수 있는 하찬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붙잡아야할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예배하는 사람이였습니다. 심지어는 순교의 자리에서도 끝까지 말씀을 끝까지 붙잡았던 사람 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고 말씀 하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죄는 모양이라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복을 주십니다.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세상에 그 어떤 복 보다 가장 귀한 것인줄로 알고...
이번 한주간도 살아가실 때, 말씀위에 굳게서서, 주님앞에서 큰자로 칭찬받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