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심은데... 누가복음 8장 4절 15절
2005.11.27 05:30:47 조회5714
누가복음 8장 4절 15절 콩심은데...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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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심은데, 콩 나고, 팥심는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콩심은면, 콩이 나고, 팥심으면 팥이 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애써 콩을 심어도, 콩은 않나고 잡초만 가득하게 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정성들여서 팥을 심으면 팥이 나야 되지만, 팥은 나지 않고, 병들어 색깔이 푸루죽죽하게 변한, 이상하게 변해버리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없는 것이 요즈음 세상이라 하겠습니다.
교육시스템이 잘못되어서 그런지..
정치 지도자들이 잘못해서, 그런지 알수는 없습니다만,
분명 노력한 만큼 거둘수 없는 것이 요즈음 세상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신앙도 그러하다고 말씀합니다.
농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좋은 씨앗을 뿌렷습니다.. 그런데 종자는 너무너무 좋은데, 그 열매는 좋지 않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4가지 원인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길가에 있는 땅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길가와 같은 땅은 아무리 좋은 씨앗이 떨어져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왜냐하면 새들이 날아와서 다 주워 먹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뜻은 마귀가 그 마음을 빼앗은 사람에 대한 비유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 떨어져도, 마귀가 다 가져가 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믿음의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에서 말씀의 기쁨을 빼앗아 가고, 기도의 기쁨을 빼앗아 가고, 찬양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구분할 때는, 원입교인, 세례교인으로 나눕니다.
윈입교인은 교회에 등록한 교인이고,
세례교인은 세례를 받은 성도로 그 교회에서 헌신하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어떤사람들은 여기에 한가지 더, ‘후탁교인’도 집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후탁교인이란
일주일 내내, 성경 한 장, 찬송 한장도 않부르다가 ,
주일날이 아침에, 먼지가 쌓인 성경 찬송을 들고,
\" 후\" 불고, \" 탁\" 쳐서
먼지만 털고 나오는 성도를 가르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면회오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신앙의 참 기쁨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예수님이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어떻게 발견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나에게 주신 말씀을, 나에게 주신 은혜를,
사단이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주의해아 합니다.
둘째로 바위가 있는 땅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비유는,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여, 시련이 있으면, 금방 믿음을 배반하는 사람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사실 바위는 좋은 뜻으로 비유될때가 많습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이 그 예입니다.
창수가 나고, 큰 바람이 불어도, 반석위에 집을 지으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게바라고, 반석이라고 별명을 붙이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앞에 반석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얼마나 딴딴한지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도,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평소에는 심지가 굳고, 주관이 뚜렷한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련이 오면, 복음이 뿌리가 없다가 보니, 나대로 신앙으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아니 왜 그러세요.. 집사님....
목사님, 내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의견이 틀리면, ‘내가복음’ 에 따라서 ‘맘대로 신앙’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제자인 데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전도할때는 좋았습니다. 말씀들을 때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전도하다가, 잡혀서, 옥중에 들어가니까...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4에서, 디모데에가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예수님 앞에서는 나의 주관이 뚜렸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인생은 자신 생각은 점점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속에 점점 뿌리내리게 하는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젊고 혈기 있을때에 베드로는 자기가 원하는데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늙어서는 그 혈기 다 죽고, 그 생각 다 죽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제는 원치 아니하는 십자가 앞에라도, 갈것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의 마지막에 대하여서는 한가지 전승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늙을때에, 로마에서는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예수믿는 사람들이 잡혀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하여서, 로마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로마로부터 도망쳤습니다.
한참 길을 가는데, 반대편에서, 예수님이 걸어 오시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가 로마를 버렸으니, 내가 로마로 가서 십자가야 져야 되겠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생각, 자기의 결정, 돌같이 굳은 자기의 마음을 던져 버리고, 예수님의 발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예수님 제가 로마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제가 지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와서, 십자가에서 순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순교할때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에, 어떻게 감히, 편안히 죽을수 있겠습니까? 나를 꺼꾸러 십자가에 못박아 주십시오..
그래서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련이 온다고 예수님을 버리는 돌같은 마음은, 복음의 열매를 맺을수 없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셋째로 가시떨기가 있는 땅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떨기가 있는 땅은,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있는 사람을 가르킨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를 향하여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때에,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기운을 물리치기란 매우 힘들다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사단이 찾아와서 요구합니다.
이 돌을 떡이 되게 하십시오.
세상은 이렇게 기능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현대과학은 아마도, 돌이 떡이 되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도 사람을 살도록 하지는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에 사랑하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이 정있게, 감사하며 살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내 삶에 목적을 발견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영상특강으로 보았습니다만,
처음 미국에 간 유대인들은 갖은 차별을 다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텔에서는 이곳에는 애완견과 유대인은 출입을 금합니다. 라고 할 정도로, 무시받고, 천대받으며 살았지만, 유대인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 두가지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요, 둘째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성경을 가르킵니다.
그랬더니, 문맹률이 0%입니다.
또한 건전한 생각속에서, 비젼을 가지고, 세상속에 나아갑니다.
그랬더니 아들, 손자...내려가면 갈수록 유대인들은 곧 기업들을 일구고, 법계, 경제계, 학계에 지도자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을 뒤덥고 있는 가시덩쿨을 걷어내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나의 마음을 뒤덥고, 하나님의 말씀고, 풍성한 은혜를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가시덩쿨과 같은 것은 걷어 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은 인내하여 결실하는 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인내할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말씀할 때..
사랑은 오래참고 라고 시작합니다....그리고 끝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리라....고 끝맺습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열매맺는 올바른 사랑은, 인내로 시작하여, 인내로 끝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첫째도 인내, 둘째도 인내입니다.
부부간에도 인내가 없을때에는 타툼과 서로의 차이만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시편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 김포상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교회, 복된교회,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 재일 중요한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첫째도 오래참음이요, 둘째도 오래참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생활속에서, 나의 가정에, 자녀들에게, 또 나의 신앙이
좋은 열매, 좋은 믿음, 좋은 은혜의 비결은 오래참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오후에 우리교회는 임직식을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또 어떻습니까? 올 한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밭에는 골라내어야 할 돌은 없는지, 겉어내어야 하는 가시덩쿨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열매맺고, 믿음이 깊은 뿌리를 내리는, 좋은 마음밭이 되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