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믿음으로. 창세기 12장 1절 9절
2005.02.14 12:04:25 조회8623
창세기 12장 1절 9절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
2월은 기도의 달로 정하였습니다.
각자 신앙생활을 할때에 특별히 기도에 힘쓰자 라는 취지로 기도의 달로 정하였습니다.
또한 한해를 초반에 특별히 신앙생활에 힘써, 한해를 믿음으로 이겨내자 라는 뜻에서 2월은 기도의 달로 정하였습니다.
사람이 동물들과 다른 것중 하나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무엇을 믿느냐의 차이가 날뿐이지, 믿음 없이는 살아가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다른 것을 어떻게 믿느냐 며, 무신론적이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신이 없다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 의지, 그리고 기술, 돈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을 신념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신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되어, 조상신을 믿기도, 하고, 또한 일월 성신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심리학자 제임스 파울러는 신념과 신앙을 구별하여, 전자를 인간의 정신행위라고 보고, 후자를 인간의 영적인 행위라고 구분하였습니다.
자 나는 신념의 사람임니까 아니면 신앙의 사람입니까?
신앙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1. 바른 신앙위에 서려고 힘써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는 아브라함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최초의 진정한 신앙인으로 부름받은 사람의 모델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로 바른 신앙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1절에서 3절 말씀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의 사람이 받게되는 복을 주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모범이 있다는 것입니까?
믿음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크레도 credo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cordia 코르디아 즉 심장이라는 말과, do 도.. 즉 바친다는 말의 합성어가 되겠습니다.
과거에 심장에는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 피를 뜨겁게 하는 생명의 원천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크레도 믿음이라는 말은, 나의 가장 중요한 전인적인 중심인 심장을 특정한 대상에게 드리는 행위, 또는 그 대상에 나의 마음과 생명을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사도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른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따라서 이 믿음이라는 것은 행위요, 실천이요, 삶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이라도 드리는 삶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에게도 아들이 두명이 있습니다. 창인이 창진이..
이번 설날에 창인이 하고, 창진이는 세배는 대충 대충하고, 세벳돈을 확실하게 챙겼습니다.
그런데 창진이는 집에 올때, 세벳돈을 버리고, 자기가 더 소중이 여기는 딱지를 챙겨왔습니다.
창진이가 볼때야 딱지나 돈이나 똑같은 종이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버리고, 자기가 소중이 여기는 딱지를 꼭 붙잡고 왔던 것입니다.
어찌 이런 어린아이의 마음을 보면서, 화낼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어린아이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가장 귀하여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하게 여기는 바로 그것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얼마나 많이 걱정하고, 근심하고, 마음이 왔다갔다 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크로디아인 자기 아들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믿음은 실천입니다. 생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17 에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나에게 이 시간이 중요합니다. 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시간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래서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나에게 이 재능은 중요합니다. 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재능을 하나님을 나라를 위하여 봉사합니다.
남는 시간이기 때문에, 여유가 되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빠듯하고, 귀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가치있기 때문에, 바로 그 시간..
나의 크로디아 와 같은, 심장과 같이 소중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레도, 즉 심장을 드리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심장을 드리는, 크레도의, 믿음이 있는,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크레도의 믿음을 받으시고, 아브라함에게 베푸십니다.
“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놀랍습니다.
크레도의 믿음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은혜로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1000 대 까지, 또 하는 모든일이 복되게 해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 땅에서 잘 되었습니다. 야곱이 거부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급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생활속에서 나의 크로디아를 심장과 같이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위에 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한때 이단들 중 구원파들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그럼 언제 몇시에 어디서 구원 받았습니까?
구원파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적인 깨달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정서적인 깨달음과 예수님의 현존을 동일시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바른 믿음은 내가 분명히 깨닫는 것에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믿음이 나의 것입니까?
내가 믿고 싶으면 믿고, 내가 노력하면 깨닫게 되고, 내가 딱으면 죄기 깨끗해지고,
내가 만나고 싶다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시고 나를 은혜의 자리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디트리히트 본회퍼 목사님은 이것을 아날로기아 리라티오니스.. 관계의 유비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에 서신 사랑의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을 쥐시고, 죄 속에 있는 인간을 회복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내가 깨끗해 지고, 내가 깨우치고,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 죄인이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어리섞어서, 예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 주시고, 깨끗게 해 주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삭게오를 만나 주셨고, 일곱귀신 들린 여인을 만나 주셨고, 또 아브라함을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2차대전 전범재판소에는 아이히만이 불려나왔습니다. 600만을 가스실로 보낸 장본인, 악마의 심장을 타고났다고 하는 아이히만은 아침에 일어나 장난삼아 유태인을 수십명식 총으로 쏘아 죽이면서, 하루 일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증인으로 나선 유태인이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왜 기절하셨습니까? 아이히만이 무서워서요..?
아닙니다. 악마일줄 알았는데 너무나 평범하여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악이 저렇게 평범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은 아무리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그속에서 점점 크게 자라, 결국은 나를 삼키고, 나의 모든 것을 삼키고, 다른 사람들 까지도 삼키게 되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악에서 나를 구해줄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변하여서, 보니 모든 것이 은혜요,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아멘이요, 다 감사요. 다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셔서, 여기까지 설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 하셔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르므로 믿음은 나의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아니라 하나님바라기로 살아가는 감사 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요즈음 영성 신학이나, 영성프로그램이 느낌과 감정의 부분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즈음 영성프로그램 중에는 ‘관상기도’가 크게 각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하여, 기도를 드리고, 내 마음이 평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말씀을 본다면, 과연 참선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믿음은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몽롱하고, 황홀하고, 짜릿하고, 흥분되는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에수님의 사랑은, 피가 땀이 되도록, 몇 번이나 고민하고, 두려워 하면서도,
결국에는 나를 위하여 갈보리 언덕으로, 십자가 지고 가셨던, 결단이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24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런데도 십자가를 않 질려고 기도하고, 복만 바란다면, 바른 믿음이라 할수 없을 것입니다.
봉사자리, 섬김의 자리, 희생의 자리는 피하고,
영광의 자리, 은혜의 자리, 복의 자리에만 앉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때에, 그 기도에 과연 하나님께서는 응답의 은혜가 있겠습니까?
‘듀남’이라는 신학자는 ‘기도하는 믿음’과 ‘믿음의 기도’는 다르다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기도하는 믿음’은 인간의 신념과 자기 목표와 계획을 하나님께 투사하려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응답이 없으면, 곧 낙심하고, 실망하고, 넘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반대로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라고 ‘듀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드론 시냇가에서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태복음 7:21 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믿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생명을 아낌없이 나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께 크로디아를--나의 심장과 같이 귀한 시간과 재능과 재물이 있다면, 과연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길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를 아브라함과 같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길로 불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큰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