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가까우시느니라. 빌 4장 4절 7절
2004.12.12 22:26:54 조회5209
빌 4장 4절 7절 주님께서 가까우시느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이제 다음주를 마지막으로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기로 낮은곳에 성육하신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은 비 현실적인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실 시간적으로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 보다, 우리가 더욱 예수님의 오심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더욱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 삶, 그리고 행동이 예수님의 오심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서, 더욱 임박한 종말론적 신앙속에 살아갔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나의 주위를 바라보면서, 사실은 종말론적인 상황속에 놓여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경제, 외교, 문화... 모든 것이 사실 종말론적인 위기 속에서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멀리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당장, 북한이 잘못된 생각을 하여, 핵폭탄을 서울에 떨어뜨리다고만 생각해도, 그 폭풍과, 낙진과 충격파는 서울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또, 우리나라를 원시상태로 몰고가 버린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지금 사실 우리는 너무나 위험한 게임속에서, 애써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려고 하면서, 찰라의 기쁨으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실존적 삶속에 드리운, 임박한 종말적 상황을 인정하며,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인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신앙의 자세를 사도바울은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이시간에는 이 말씀을 통하여, 대강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한 신앙적 교훈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 성도는 기뻐함으로 주님을 맞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에는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많은 사람들이 외적 조건들에서부터 기쁨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염려하는 상황들이 사라지기 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는 절대로 살아질수 없습니다. 근심을 사라질수 없습니다.
아담이 근심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될까?
완전하게 준비된, 조건 속에 살았던, 아담은 마음에 기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계명성이라는 별명의 천사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서 주셨는지 모릅니다.
그쯤하면,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않 가진 것이 없습니다.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더 더 높아져야지..
그리고 결국, 천사들을 끌어모아,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다가, 쫓껴나서, 사단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에수님 안에서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수님을 맞이하는 성도는, 예수님의 기쁨으로 마음을 가득차게 해야 하여, 기쁨으로 에수님 앞에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이야기 합니다.
이 사람이 가게되면, 항상 혼이 나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은 손님 입니다.
무엇을 가진것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주면, 먹고, 않주면, 못먹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손님이 있다가 가기만 해도, 부모님들이 야단칩니다.
왜 그런말 하는 거야.. 왜 그런 행동하였어.. 엄마가 손님 앞이라도 야단 못칠줄 알았지..
그러면서 눈물을 찔끔 나도록 야단을 칩니다.
조건적으로 보면, 아이들은 기뻐할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들은 웃습니다. 기뻐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 아이들은 안심하며, 어마와 아빠가 있기 때문에 야단맞아도, 기뻐합니다.
좋은것 맘대로 못 먹게 해도, 즐거워 합니다.
좋은 장남감 안사 줘도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도 이러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까이 오신 아기예수님을 맞이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뻐하는 성도들을 이뻐하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 37편 4절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사도바울은 기뻐하였습니다.
이 빌립보서는, 빌립보 감옥에서, 쓴 것으로,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옛날 감옥은 기회가 박탈되는 곳입니다. 재판이 없습니다. 공정한 것이라고는 기대할수 없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나게 되는 곳이 옛날의 감옥입니다.
자 그런곳에 가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여.. 주님께서 가까우십니다. 그르므로 기뻐하십시오...
오늘 우리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첫째, 성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음으로 주님을 맞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빼앗는 적이라 하겠습니다.
염려는 신앙을 죽이며, 영성을 얼어붙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염려하는 삶이 아니라, 기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란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 얼마나 좋은지, 보여 주십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여 주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 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감격하게 될 것을 기대 하셨을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녀보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를 한송이 가지고 왔는데, 얼마나 큰지, 두사람이 들고 올 정도로, 풍성하고, 넘치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염려합니다. 근심합니다.
그 땅에사는 아낙자손들과 우리를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와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않됩니다. 우리는 못들어 갑니다. 우리는 망했습니다.
그렇게 염려가 근심으로, 근심이 두려움으로, 두려움이 절망과 원망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신것은 하나님의 주실 땅에 풍요로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우상을 섬기는 거민을 보고,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염려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지 않을 때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감사와 소망과, 기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과 교인들은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교회를 더욱 크게 지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런데 교회 증축은 커녕, 불이 나서, 교회가 다 불타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인들은 모두다 망연자실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기도하였더니, 교회의 증축은 커녕, 불이나서, 교회가 불타버리고 말았다니..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런데 무디 목사님은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뭐가 그렇게 기쁘십니까?
무디 목사님 말합니다. ‘본래 이 지역은 건물을 헐어낼수 없는 보호지역입니다. 그래서 허가가 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불이나서, 자연적으로 건물이 무너졌으니..이제는 맘대로 증축할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참 하나님 하시는 일은 신묘막측합니다...’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관하고,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도는 염려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담대합니다. 필요합니다. 또 소망이 필요합니다. 더욱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만이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속의 위대한 신앙인들은 이렇게 염려하며,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며,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러했습니다. 엘리야가 그러했습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파도 처럼 몰아치는 큰 난관 속에서,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함으로, 염려를 놓아두고, 더욱더 기도함으로써, 나아갔더라는 것입니다.
7절 말씀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일 아침에 늦게 일어난 꼬마가. 허둥지둥 옷을 입고 예배에 늦지 않으려고 뛰어나옵니다.
집을 나와 교회로 가면서 소년은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발 늦지않게 해주세요.\"\"하나님, 제발 늦지않게 해주세요.\"
교회에 겨우 도착한 소년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한숨을 크게 쉬며 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구 이렇게 세게, 미실 필요는 없잖아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마음 먹은 데로, 일이 되지 않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 안에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며,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소년이 예수님을 향하여, 기도하듯,
말씀을 맺습니다.
기뻐하며, 예수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며 예수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며, 넘치는 평강으로, 만나주셔서...
예수님을 모시고,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