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만발 사도행전 3장 1절 16절
2005.01.09 16:40:28 조회5126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사학자들이 1500년 전에 조성되었던, 무녕왕능을 발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부장품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 하나는 너무나 친숙하여서 사람들에게 회자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큰 국자 모양의 기구로, 숫불을 얹어서, 한복을 다리고, 동전을 다리는 다리미 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다리미는 사실 지금으로 부터 50여년전 6.25 때 까지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그 다리미였던 것입니다.
1450년 시간동안 다리미의 모양이 변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사용되어 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50년 만에 다리미는 완전히 변하고 말았습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연탄불에 쇠를 달구어서 다리미 통에 넣어서 쓰는 다리미가 등장하였었습니다.
그러다 전기 다리미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전기 스팀 다리미가 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테팔 무선 전기 스팀 다리미를 우리는 당연하게 쓰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수 십년에 걸쳐 일어나는 일들이, 현대에는 1년도 안되어 일어나는, 엄청난 속도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중요한 것을 못보고 지나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봐야될 것을 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주위에 환경에 의하여,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작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중요한 것을 못보고 있는 한 앉은 뱅이가 나오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는 사람들이 앉은뱅이가 구걸하도록 매고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앉은 뱅이는 성전의 미문, 즉 아름다운 문 앞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예배드리는 장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앉은뱅이는 사람들을 만나려고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대면 하려고 성전을 찾았던 것입니다.
앉으뱅이는 예배의 장소, 말씀의 장소, 은혜의 장소에 있었지만,
앉은뱅이는 예배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들을 생각 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받을 생각 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바뻣기 때문입니다.
빠르게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빨리 구걸 해야 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예배의 자리, 말씀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 있었지만, 예배드리지도 못했고, 말씀듣지도 않았고, 은혜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 바쁜 앉은뱅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성경은 은혜의 시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시대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을 힘입어 풍성한 은혜의 자리로 불러 주시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조상들이 그렇게 보고자 하였던 바로 그 성령의 시대 은혜의 시대가 바로 지금입니다.
하지만 그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은혜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쁘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부활에 대하여 한달동안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암에 걸려서 대 수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벌써 6번째입니다.
온누리 교회는 바쁜 교회입니다.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찬양사역하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던 하용조 목사님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의미를 성도들과 나누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를 위하여, 또 무엇 때문에 라는 질문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은혜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있때에,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저와 우리 믿음의 교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은혜는 지금 나에게도 효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이 바쁜 앉은뱅이 앞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는 사업에 수단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5절 말씀보면, 앉은뱅이는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헬라어 부분을 표준새변역에서는 이렇게 말슴합니다.
“그 못 걷는 사람은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
수입을 잘 올리는 소문난 붕어빵 장사에게 텔레비전 vj 특공대에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수입을 잘 올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주인이 대답합니다. 사람의 눈을 보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사람의 눈을 주목하면, 물건을 사주는 확률이 높습니다...
이 시간 훈련해 보겠습니다.
눈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옆에 분들 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저하고 해 보겠습니다. 눈을 봐야 된다고 합니다.
갑자기 제가 지갑을 열고 싶어지는데요...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크게 부자될 자질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이미 2000년 전에 이 방법을 썼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향하여, 구걸하기 위하여, 빤히 처다보았던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이 사람들에게도 구걸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최선의 방법이요. 지금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일 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빤이 처다 보았습니다.
앉은뱅이의 마음에 소원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자기에게 금과 음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말합니다.
6절 말씀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
아마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이 앉은뱅이에게 도움을 준다면, 당연히 생필품과, 최저 생계비를 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근과 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쁜 앉은뱅이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구걸하기를 멈추고 걷게 되었습니다.
바쁜 일정은 이제 버리고, 성전 미문을 통하여, 성전의 들어가 예배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쁜 요즈음, 오히려 느리게 사는 법에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쁜 흐름에 휩쓸려 바쁘게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아무 도움도 않되 더라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것 같지만, 오히려 느린 삶의 방법이 더욱 효과적이고, 건전하고 건강한 생활에 도움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교육까지도, 규격화 된 조기교육에서 개성과 창조력을 개발하는 느리게 교육하기가 제안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앉은뱅이와 같은 소원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규격화 되고, 획일적인 세상 기준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제한합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을 획득하면, 비로소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는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내가 천사도 흠모하는 일 즉 예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이름은 완전히 낫게 하십니다.
16절 말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세금 정직하게 잘내고, 나라를 사랑하는 한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이 아저씨가 배농사를 열심히 잘하여 배가 주렁주렁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을에 태풍이 와서 배가 다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농협에 빚 내어서 비료사고, 키웠는데, 한순간에 다 망하게 생겼습니다.
떨어져 버린 배를 주어담고 아무리 울어도 해결이 않됩니다.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이지만, 이 아저씨의 배 떨어졌다고, 국가의 일과 이 아저씨 개인 일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떻습니까? 청와대 앞뜰에 가서 일인 시위라도 하면, 그때부터는 틀려집니다.
그때붙터 배 농가의 피해는 국가적 사건이 되어지지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알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 이름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어디 세상에 어려운 사람이 한두명이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르짓을때,부터 틀려지는 것입니다.
나의 문제는 예수님께서 바라보시고,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우주적 사건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나의 일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짓으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있으면, 나의 어려움, 그대로 나만의 일일 뿐이지만, 부르짓으면,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우주적인 사건으로 중요하게 다루어 지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외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이는 그 이름을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난 믿음이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현대는 바쁜 시대입니다. 하지만 바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않 바빠도 됩니다. 중요한 일만 하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아서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이 나의 중요한 일들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올 한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짖어 중요한 일들을 완전히 해결받는 귀한 한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