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는 고린도전서 14장 12절 20절
2005.01.24 01:18:30 조회4577
교회에서는 고린도전서 14장 12절 20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요즈음 메스컴에서 인터넷에서 신문에서, 한국 교회를 향하여 안탑깝게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독일신학자로 히틀러도부터 추방당하여,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신학자, 폴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정신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그 사회를 이루는 문화의 중심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종교가 기저의 핵이 되어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들을,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저들을 사용하셔서 교훈하시는 하시는 섭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론에 있어서 실천신학적인 부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잘 섬길 것인가?
성도는 교회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오늘 말씀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12절 상반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신령한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부분을 표준새번역은 성령의 선물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는 신령한것, 영적인것, 성령의 선물을 사모하여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 교회에서 이러한 신령한 것, 영적인 것을 사모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요즈음 광성교회가 갈등으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 우리교단은 아닙니다만, 금란교회도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 교회는 우리나라 가장 큰 개신교 교단에서도 가장 큰 교회들에 속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에서 걱정을 하는 교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이들 교회에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여러 가지로 분석할수 있겠습니다만, 그중에 하나는 바로 신령한 것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성경에는 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내가 볼때 잘못되었다.
법적으로 볼때 잘못되었다.
세상이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하면서 결국 사회에 소망을 주기보다는 안타까움을 주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자 어려운 일이 있을때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요즈음은 평소에도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사모하고 그래서 세상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경영기법을 도입하고, 교회에 마캐팅 전략을 도입니다. 그래서 시장조사를 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세상을 본받아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소리 지르고, 농성하고, 격투기 하고 고소합니다.
만약 문제가 발생했을때, 교회 교인들이 다 신령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야기도를 하고, 날마다, 회개의 기드를 드리며, 더욱 합심으로 예수님께 매어달렸다면,
오히려 사회에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역시 교회는 틀리다. 문제를 저렇게 신앙으로, 말씀으로 기도로 해결하는 모습을 우리 사회도 본받아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본받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령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에 있는 것입니다.
큰 나무에는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히려 나무에 바람이 없으면, 꽃에 수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열매가 바람에 날려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나무 병약한 나무는 어떠합니까? 바람에 부러집니다.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지는 줄기에서 공급하는 신령한 양분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령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로라도, 교회에서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더욱 교회에서는 더 감사하고, 더 겸손하고, 더 말씀을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천국에서의 생활을 연습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습니다. 너무나 조용합니다. 하프만 뜯고, 찬송 연습만합니다. 평소에 찬송을 불러보지 않았던 이 사람은, 너무나 답답하여 견딜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갔더니 전혀 딴판입니다.
사람들이 물장구 칩니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이 말합니다. 에이 그럴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지옥이 나쁘다는 말 다 지어낸 이야기이고, 거짓말이라니까요.. 저는 찬송연습만 하는 천국보다는 활력이 넘치는 지옥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들어가자 방송이 흘러 나옵니다.
자 5분간 휴식 끝~ 앞으로 5만년 동안 불지옥 시작~~ 그러자 온천지가 불바다가 되고, 사람들은 고통의 비명을 질르는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신령한 삶을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히 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12절 말씀 하반절 말씀에는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특별히 방언을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곳곳에서 방언으로 서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떨때에는 그 방언 소리로 예배가 중단되기도 하고, 또 예배가 방해 받기도 하였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지적합니다.
아무리 영으로 기도하는 방언이 좋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예배까지 방해하며,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면, 방언에 무슨 은혜가 있겠는가 ? 라고 질문합니다.
그래서 방언을 할때에는 무절제하게, 맘대로 할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에 맞추어, 순서대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방언만 은사가 아닙니다. 방언 해석하는 은사도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슴을 가르키는 은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은사는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라면, 절제하고, 순서를 지킬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까지 용서하라고 빌레몬에서 사도 바울은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사실 용서는 예수님께서 제일큰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까지도, 그 죄는 크지만, 용서해 주셨습니다.
물론 용서해 주셨다고 해서, 맘대로 살라고,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한번 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간음한 이 여인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나쁜 행실은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하여 옥합을 깰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덕인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변화 시키고, 새롭게하는 것...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하여, 성도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성숙한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일부에서는 용서해 주신 예수님 보다가도, 이 여인 대하여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다빈치 코드” 라는 책까지 나온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유도 없이, 그냥 용서해 주었을까? 특별히 사랑했기 때문에 용서해 주지 않았을까? 여기 까지만 해도 되겠습니다만은, 도를 넘어가서, 그 사랑이 에로스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책에서는 상상을 하기 까지 합니다.
덕을 세우지 않는 열심의, 전형적인 잘모된 모양이라 하겠습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책’의 이러한 상상들은 ‘빌립 복음서’와 ‘마리아 복음서’, 그리고 ‘도마 복음서’ 의 이곳 저곳에서, 내용들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꾸며 냅니다.
아니 목사님 우리가 모르는 복음서가 그렇게 많습니까? 내 많습니다.
이 이상한 복음서들은 ‘함마디 문서’라고 해서, 이집트 ‘함마디’란 마을에서 발견된 책들입니다.
말이 ‘복음서’이지 영지주의라는 이단에서 만들어진 ‘이단의 책’으로, 요즈음으로 치면, 몰몬교의 ‘몰몬경’, 통일교의 ‘원리강론’과 같은 책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름 붙이기를. 아무 상관없는 사도빌립, 도마, 그리고 마리아의 이름을 사용하여, 마치 도마가 쓴 복음서 인양, 사람들을 현혹하였는데, 현대에 와서도 아직도, 그 주장이 맞다고 현혹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열심도 좋고, 호기심도 좋습니다. 그리고 지식도 좋고, 나에게 은사가 있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주신 것들을 바르게 쓸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소중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큰 소리로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덕을 위하여 안하는 것, 그것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나도 내 맘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덕을 위하여,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 그것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맘대로 안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을 위하여 인내하는 그것을 더욱 귀하게 봐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리스도인은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20절 말씀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
뛰어나고, 지혜롭고, 장성한 것은 누구나 원하는 바입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간단한 아이큐 채크 법이 나와 있습니다.
내 아이큐는 얼마나 장성하였나? 우리 성도님들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산토끼의 반대는 무었입니까?
집토끼 - 아이큐 50
죽은토끼 - 아이큐 80
바다토끼 - 아이큐 100
판토끼 - 아이큐 120
알카리토끼 - 아이큐 150이상
끼토산이라고 하면 지수외 사람 즉, 바보 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이 IQ 하고 상관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을 배려할줄 알고, 사람의 감성을 배려할줄 아는, EQ 하고 상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EQ 에 더 관심을 가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세우는 것, 나를 생각하고, 나를 앞 세우는 것, 그런것들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높이고, 말씀을 앞 세우데에 오히려 장성해 저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에는 예수님만 높아져야 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만 들려질때,
예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게 되어 집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는 예수님을 높이는 교회, 예수님께서 나타나는 교회가 되어지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