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은혜 욥기 42장 1절 15절
2005.02.05 22:19:01 조회465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
욥기 42장 1절 15절
이번 주 중에는 설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 은행에는 5000원 권이 동이 났다고 합니다. 세뱃돈 준비한다고, 부모님들이 5000원권을 바꾸어가서, 한국은행에서는 5000원 권을 긴급하게 발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 이러한 가운데 설날에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새해에는 복 많이 받고 건강하게, 잘 살아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복을 바라는 것은, 복이 그만큼 귀하고,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복은 생활속에서 그 많큼 희귀하고, 항상 가질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고난과 근심과 괴로움을 몹시 당한 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욥은 고난과 근심과 괴로움을 당하였는데... 우리는 왜 욥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까?
욥의 고난과 근심과 괴로움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가도, 심하고 더하였지만, 욥은 고난과 근심과 괴로움을 기쁨과 찬양과 복으로 바꾸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는 고난과 근심과 괴로움을 말씀속에서 복으로 바꾸는 욥의 지혜를 찾아 나누려고 합니다.
1. 성도는 고난의 의미을 볼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믿음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방에 의인이라고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갑자기 집이 무너졌습니다. 약대와 양들이 탈취를 당하였습니다. 그 자신도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는 욥에게 이러한 고난이 찾아 올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신정론’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한 욥을 벌하실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말하였습니다.
욥 너가 겉으로는 바른채 하지만, 뭔가 잘못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댓가를 치루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욥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심을 받자 욥은 너무나 원통해 합니다.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무슨 잘못을 하고, 벌을 받으면, 그것은 당연하지만, 아무 잘못도 없이 어려움을 당하니까, 자신도, 자기 자신이 원망스럽기 까지 합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저주하게 되어 집니다.
그런데다 욥이 더욱 더 절망하게 되었던 것은, 사랑하는 아내까지 자기를 믿어 주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막말을 합니다. 상처를 줍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나가서 죽으라”고 까지 말합니다.
자 이정도 까지 될 때에는, 어떤 사람이 과연 흔들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절망하고, 누구라도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않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근심중에 있으십니까? 고난 중에 있으십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욥 보다가도 더 많이 고난 받으신 분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욥과는 비교할수 없는 고난과 근심과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라면, 만사형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않 좋은 것은 자연히 다 물러가야하고, 항상 기쁘고 즐겁고, 좋은 것만 그분 에게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실상 어떠하였니까?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배반당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놀림을 당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받은 고난 과 근심과 고통을, 똑같이 당한 사람이 있다면, 세상사람들은 그 사람을 향하여 말할 것입니다.
그 사람 참 복도 없어, 어떻게 그런 고난과 근심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참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야..
아마 그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복이 없어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이 팔자가 사나워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늘 영광중에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영광 버리고, 고난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일부러 엄청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바로 나를 살리시려고, 일부러 고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르므로 성도는 고난의 의미를 바라 볼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저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저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고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못이길 시험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나 가진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것 같게 하셨네
이 복음송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 송명희 시인이 누구입니까? 멀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뇌성마비 중증 장애자입니다. 온 몸이 뒤틀려서 있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분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뇌성마미 걸린 자신에게 찾아온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깜짝 깜짝 하여, 어머니기 받아 적으면서,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나 가진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것 같게 하셨네
뇌성마비로, 온 몸이 뒤틀리고, 움직일수 없는 송명히 시인이...예수님을 바라보며,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같게 하셨네..
욥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고난 가운데 있는 욥에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하나님이 없는, 고난은, 불안과 절망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고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고난,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 버리시고 고난 받기를 기뻐하셨고,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도의 고난을 천사도 흠모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로마서 8:18 말씀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욥은 욥기 23:10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은 고난만 바라보지 않고, 고난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게 되면서, 고난을 이길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신앙자의 고난은 열매를 맺게 되어 집니다.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만약 택일 하라고 할때에,
하나는, 젊어서 고생고생 하다가 나중에 잘 되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젊어서는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다가 늙어서 고생 고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느 경우를 택하시겠습니까?
성도에게는 고난이 꼭 열매를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고난 받을때, 열매없이 그냥 받는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두게 해 주십니다.
사실 욥의 신앙의 불안한 신앙이었습니다.
자식들이 무엇을 잘못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까 하여 날마다 자식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복신앙 이라 하겠습니다.
이러다 보니, 욥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율법적인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현대의 크리스챤들 또한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할때, 기쁨으로 감사로 즐거움으로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불안함으로, 형식으로 드리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자 욥이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죄가운데 놓이지 않토록 하기위하여, 또 자신이 잘되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여습니다. 그러다 보니, 잘되면, 다행이지만, 않좋게 되면, 또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은 없는지 불안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찬송이 없고, 웃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만나면서, 더욱이 고난 가운데 욥에게 찾아와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잘되는 곳에만 계신 분이신줄로 알았는데, 고난 가운데에도 찾아 오시는 분이시구나...
그래서 욥은 신앙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자녀들이 잘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의 기도는 힘있는 기도, 능력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주시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3. 복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박하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끼는 것이 없으십니다.
로마서 8:32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하나님은 갑절로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욥에게만 갑절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두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는 청지기도 각각 갑절로 남길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알의 밀알이 30배 50배 100 배나 결실을 맺는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이삭도 그해에 백배나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밀알이 섞어지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달란트 청지기는 한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렸지만, 두달란트, 다섯달랄트 청지기는 애써 주인의 것을 소중하게 남기려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우물을 세 번 네 번, 옮기는 수고를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를 복된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이 있을지라도, 고난을 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 당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신앙의 방향과 목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물론 고난을 당하는 수고도 하였지만, 결국 욥은 갑절의 복된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김포상도교회 성도님들
복음을 위한 수고로움 위에에 올해는 100배나 거두는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