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기다리며 골로새서 1장 11절 20절
2004.12.09 16:11:46 조회4839
왕을 기다리며 골로새서 1장 11절 20절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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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핵문제가 중요한것은 알지만, 사실 관심의 뒤전에 밀려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있을 때 부터, 북한의 핵문제가 표면화 되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때에는 남한에 있는 전술핵 무기를 철수하고,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함으로써, 핵개발을 동결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몰래 북한은 핵개발을 계속 하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에는 제네바 핵 합의를 통하여 동결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몰래 북한은 핵개발을 계속 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때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남북비핵화 선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몰래 북한은 핵개발을 계속 하였습니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되어서 북한은 계속하여 핵을 게발하고 있습니다.
회담은 하고, 선언은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북한은, 몰래 계속 개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평양으로 김정일을 찾아갔을 때입니다.
김정일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냈다고 합니다.
알고보니, 김정일은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배우고 훈련받았다고 합니다.
제왕학에 의하면 왕은 항상 혼자 말하고, 명령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각과 자기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현대에서, 왕조를 만들어 나아가는 사람이, 제왕학으로 교육받은 결과과, 바로 북한의 핵문제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북한과는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대화가 필요없습니다. 자기 하고싶은 대로 그냥 합니다.
오늘 우리사회에도 공주병, 왕자병 걸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두 자기를 섬겨 주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다른 사람위에서 군림하기를 원합니다.
예절도 없습니다. 양보도 없습니다. 자기가 틀렸다고 하더라도, 남의 말은 듣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양보가 없는, 막가고 있는, 우리의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문제와 사회 위에는, 십자가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진정한 왕권이 회복되야만 고쳐지고, 변화되고, 새로워 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을, 명령과 훈령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사람을 섬김으로써,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대강절을 앞두고, 올 한해를 돌아보면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의 바른 모습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줌으로 진정한 왕권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왕권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에 의하여 역설적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 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혀 놓았습니다.
그리고“네가 진정한 메시야이거든 네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 보아라..”고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업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진정한 목자가 누구인지,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들어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어떠합니까? 백성들의 왕이라고 하면서, 영광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고난 당할때에는 외면합니다.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 하면, 도망해 버럽니다.
이런 모습이 어떻게 백성들의 진정한 왕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진정으로 누가 백성들을 살리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백성들의 왕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으로써의 권위는 자기를 내어줌에 있으셨던 것입니다.
11절 말씀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
12절 말씀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오래참음이 없었더라면, 성도의 기업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권위자 중에는, 기쁨으로 오래 참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자기가 맡은 부서원들을 바라보며, 자기가 맡은 회사원들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오래참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워 졌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기쁨으로 오래 참는 것으로, 나를 내어주는 것에서, 예수님의 권위가, 진정한 권위가 나타 난다는 것입니다.
세종때 정승으로 유명한 맹사성대감이 고향으로 내려갈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워낙 청렴결백하다 보니, 정승인데도, 남루한 도포차림에, 걸어서 내려갑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주막으로 들어와서 윗자리를 차지하며, 거드름을 피웁니다.
그리고 나이많은 할아버지인 맹사성대감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말합니다.
허허, 우리 우리 말끝에 ‘공’자와 ‘당’자를 넣어 문답을 해보기로 해보세.”
대감이 질문합니다.
‘그럼 내가 먼저 질문함세...어디에 가는공?’ 청년이 대답합니다. ‘한양에 간당’
‘무엇하러 가는공?’ ‘과거보러 간당’
‘내가 붙게 해줄공?’ ‘어림없는 소리당’ 그러고 청년이 웃었다는 것입니다.
그후 과거에 합격하여 청년이 인사를 하는데, 정승중 한분이 이 청년 앞으로 나와 말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공?’ 깜짝 놀란 청년이 관의를 입은 대감 맹사성을 보고는,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 하였다고 합니다.‘죽을 죄를 지었당’그러면서 얼굴을 바닥에 박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맹사성대감의 ‘공당문답’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권위는 세상도 이러할찐대, 하물며, 온 우주의 권위자요. 홀로 왕되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방법으로 권위를 드러내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희생을 통한 섬김으로써 진정한 왕권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 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의 마지막에, 심판의 주가 되셔서, 세상을 또 세상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이렇게 홀로 왕되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를 위하여,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오히려 사람을 섬기셨는데, 죽기까지 희생하시 면서 섬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왕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것은 섬기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오히려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당의 높은 분, 또 야당의 총재는 얼마나 높은 권세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분들이, 밥퍼주는 청량리 쌍다리골 밑에있는 ‘다일교회’식당에 가서 설거지를 서로 경쟁적으로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높은 분들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공경할텐데, 무엇 때문에 교회 식당에 가서 설거지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까?
권세의 자리에 있지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존경해 주지 않습니다. 권력의 자리에 있지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공경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섬기의 자리인 다일교회 식당에 설거지를 하면서, 사진을 찍어, 매스컴을 타면, 사람들이 좋게 봐주지 않을까 해서, 마음에는 없지만, 더욱 존경을 받고 싶어서, 섬김의 자리에 내려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이 존경을 받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사람은 섬기는 사람에게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섬김의 자리에는 예수님의 권세가 나타나도록 만들어 두셨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김포상도교회 성도님들도 섬기시기 바랍니다.
옆에있는 성도들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아내를 섬기기 바랍니다. 자녀를 섬기기 바랍니다. 남편을 섬기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야, 진정한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사람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진정한 왕권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한 사람도 있습니다. 요나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 요나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거부하였습니다. 요나는 욥바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니느웨 와는 반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같은 욥바에서 예수님의 제자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세 번을 거부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데로,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가서 세례를 배풀게 됩니다. 이로써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당장 원수들을 물리치고, 땅을 부수고, 사단과 죄를 지옥에 던져 넣으시고, 그 문을 닫아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참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사단과 함께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천국의 주인공으로 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주 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들의 메시야가 되셨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18절에서 20절 말씀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제 대강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희생의 왕으로, 섬김의 왕으로, 순종의 왕으로 오셨던, 그 왕권이 세상에 널리 퍼질때, 이 세상은 올바르게 되어집니다.
소리는 많고, 주장은 많지만, 섬김을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속에 예수님의 왕권이 바로 서게 될때, 섬김과, 희생이 있게 되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김포상도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죄로 죽게 되었던 나를 섬겨 오늘 천국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대강절 기간 동안 예수님을 맞이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