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십자가의 지혜 고전1장 18절 25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자신을 낮추면 높아지고, 자신을 높이면 낮아지며
자기 목숨을 구하면 잃고, 목숨을 잃으면 얻고
지혜는 어리석음으로 변하고, 어리석음은 지혜로 변하며
먼저 된 자는 나중되고, 나중 된자는 먼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진정한 지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까지 명절이 되면, 선물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맙시다. 라고 말하고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바뀌어서 선물을 주고 받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도라도 경기가 되살아 나면 좋겠다고 라고 말하기 까지 합니다.
어릴때에는 절약과 저축이 우리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는데, 미국은 참 이상한 나라 라고 의아해 한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나라가, 소비가 미덕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수 경기를 일으키려고, 정부가 압장서는 시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세상의 지혜는 변덕스럽고 혼란스럽습니까?
수시로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 한 분파인 소피스트들 즉 지혜자들은 ‘만물을 척도는 인간’이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정말 세상의 지혜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그리고 사람이 척도가 되기에, 상황에 따라 변하고, 바뀌는 혼란스러운 지혜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면서도 지혜롭다는 사실입니다.
18절 말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실 성경은 이단들이 더 잘 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 증인들은 교패가 붙어 있는 집을 일부러, 벨을 누르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성경을 장 장이 펴 들면서, 질문합니다.
이런 말씀 아십니까? 이런 말씀하십니까?
그러면 열이면 열, 모두 아니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었습니까? 라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내가 성경을 헛 배웠구나...
사실 우리 성도님들께만 말씀드립니다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씀합니다.
한곳도 아니라 세곳에서나 분명히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씀합니다.
자 우리 성도님들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목사님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단들이 바로 이 말씀을 들이 대면서, 말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에 쓰여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하나님이 없다.” 고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그 말씀의 앞과 뒤에 있는 말씀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자 성경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 앞에 이런 말씀이 더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 10편, 14편, 53편 말씀입니다.
“어리섞은 사람이나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다”고 오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이런 말씀이 더 있습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렇습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이 볼때에는 십자가의 도 만큼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도’ 라는 것은 ‘길’이라는 뜻이지요
십자가의 길은 미련하게 보입니다.
성도들이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얼마나 미련하게 보입니까? 주일날 산으로 들로 놀러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은혜와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믿음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신앙생활하는 것이 천국의 연습이요,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감사와 찬양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고구마 전도왕으로 유명한 김기동집사님이 있습니다.
김기동 집사님은 아내따라 교회에 갔다가, 목사님이 아멘하라고 하니까, 기분 나쁘다며, 교회를 나가버리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아침입니다. 아내가 예배드리러 가자고 할때에, 김기동 집사님은 주일날은 매주 있으니, 오늘은 놀러 가자고 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차에 싣고 놀러가고 말았습니다.
차를 타고 출발 합니다. 교회를 지나칠 때에, 아내가 혼자말로 말합니다.
교회야 여보 예배드려야 되는데..
그럴때 김기동 집사님이 말하였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됬어...
그리고 한참 가는데, 반대편에서 멋있는 그랜저가, 아무 생각없이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서 이 집사님이 차에게 돌진하였습니다.
소리 한번 못지르고, 정면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에는 불이 붙었습니다. 아이들은 피투성입니다. 유리 파편이 형편없이 밖혀 있습니다. 아내는 차에 끼어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신없이 아이들은 꺼내서 차 박으로 던지고, 사람들이 도와주어서 아내도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김기동집사님이 주저 앉고 말았다고 합니다.
내가 아내말 듣고, 예배드리고 올걸,
한 시간 예배드리는 거, 얼마나 된다고,
예배 드렸으면, 이 차 않만나고, 그럼 이런 사고 나지 않았을 것 아니야..
그리고 김기동 집사님이 피투성이가 된, 아이들과 아내를 보면서, 꿇어앉아서 기도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나는 내가 가정을 지키고, 아내를 지키고, 아이들을 지켜주는 능력있는 아빠인줄 알았는데,
나는 아내를 죽이고, 아이들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지금 이 유리가 밖혀서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아이들, 또 움직이지도 아내.. 재발 살려 주십시오..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들과 아내가 살아서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다들 괜찬아..? ” 그러니까 아내가 말합니다. “당신만 정신 차리면 괜찬아...”
이 사건 이후에 김기동 집사님은 차를 타고 갈때에, 옆차가 휙 지나면, 할렐루야 라고 말합니다.
두 대가 휙 휙 지나가면,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차가 중앙선을 넘어서, 내 앞으로 안들어오고, 자기 차선으로 그냥 잘 가도록 하신것 감사합니다. 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예화가 길었습니다만.. 그럿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십자가의 길은 감사와 찬양의 길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때에도, 세상사람들은 짜증을 냅니다. 화를 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같은 하루를 살아도, 은혜로 살고 간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면서도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23절 24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할때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가 거북스럽고, 불편하고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처형 당하신 장소입니다.
비참하게 고난 받으셨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고난 받으셨습니다.
아니, 메시야가 그렇게 힘도 없이, 일게 군졸들에게 모욕을 당하여습니다.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그렇게 가시 면류관을 씌워도, 반항하지 못하셨습니다.
22절에 나와 있듯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때, 이렇게 나약하고, 힘없는 십자가는 메시야의 표적이 아닙니다.
또 지혜- 소피아를 구하는 헬라인들의 입장에서 볼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아무런 유인함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의 소피아, 세상의 지혜로 볼대, 나에게 아무런 이익도 없이, 세상을 향하여 자기를 내어주고, 봉사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무슨 기쁨과 즐거움을 찾을수 있겠습니까?
“쾌락이 선이다” 라고 말하는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르스’가 볼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과 괴로움의 자리 이상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럿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아들을 죽이기 까지, 인간을 용서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저주 가운데 있던, 사람을 불러 주시고,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게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분명 십자가의 길을 거리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로 갈 때, 살게되고, 새롭게 되고,
승리하게 되는 능력이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도에는 구원의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11절 말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한국사람들의 급한 성격은 이제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빨리빨리 라는 말은 모르는 가이드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중국집에서,
급한 한국인 3등급은 “짜장면 하나 빨리. 빨리요. ”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2등급 은: 제일 빨리 되는 거 뭐에요? 빨리요.
1등급 은: 젓가락 까면서 \"짜장 빨리\"
# 밥먹을때.
급한 한국인 3등급은 : 큰 그릇에 비벼 먹거나, 말아 먹는다.
2등급은 : 비빌 시간이 아깝워. 그냥 빨리 먹는다.
1등급 : 숫가락만 쓴다. -_-
그런데 아무리 급해도 빨리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름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볼때에, 전도하는 것 처럼, 미련한것도 없을 것입니다.
또 워낙 이단들이 악한 모습을 보여, 전도의 문을 더욱 어지럽게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련한 전도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생명을 구원하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속에서 전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말슴을 맺습니다.
25절 말씀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사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과 사랑안에 일어나는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도 내가 이기지 못할 시험이, 우연히 나에게 다가오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아직도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사랑, 그 은혜, 그 인도하심....
하지만 그 속에 소망과 기쁨과 은혜와 승리가 있는 줄로 믿으시고,
한주간도, 십자가의 길 가운데로, 힘있게 진행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