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17절 22절 따르는 자가 희망이 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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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달이 시작 되었습니다.
아직도 밖에 나가면, 햇볕이 뜨겁습니다. 조금만 움직이면 아직도 덥습니다. 하지만 9월이라는 숫자만 들어도, 가을이라는 느낌이 가슴에 와 닫습니다.
9월달은 믿음으로, 희망을 여는 달 입니다만, ‘희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새벽이요 깜깜 합니다. 아직도 목표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으면, 틀려집니다.
멀리 있던 목표가 눈앞에 보입니다. 새벽이지만, 힘이 나고, 용기가 샘솟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향하려 달려갈수 있게 됩니다.
한문으로 희망은 바랄희 바랄망,입니다.
정상적으로 세상에서 활력있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희망하는 것이 없을수가 없습니다.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커서 과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희망하는 것을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불행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희망이, 바램으로만 끝나고, 나의 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 희망은 이루지 못한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희망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18절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성경에는 역설이 존재합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삽니다.
내가 살고 예수님도 살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줄을 때, 비로서 예수님이 사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할 때, 비로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잃으려 하면, 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 지고, 그러면 내가 성공하게 되고, 그러면 내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으로 보면, 반대 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룰려면, 내가 바라는 그것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희망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오히려 내가 희망하는 것 보다 더 큰 일도 이루어지고, 그러면서 나의 성공하고 희망을 이룰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듯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의 희망을 버려야, 나의 희망을 이룰수 있고,
나의 희망을 내어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나의 희망을 이룰수 있다고 하니...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순종할 수가 없는 부분이 아닐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찾아와 진지하게 말씀을 드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얼마나 간절하고 진지한 질문입니까?
“예수님, 우리가 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마치, 오늘날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나의 희망을 무조건, 응답해 주십시요” 라고 말씀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좀 성숙하지 못한 질문이 아닐수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만약에 아버지에게 막무가내로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 이번에 제 생일에 생일 선물로, 멋있는 자동차를 하나 사주세요. 자동차는 소나타 2000cc 짜리로 무조건...사주셔야 되요...아시겠죠.”
만약 그러는 아이가 있다면, 뭐라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자동차를 사려면, 자동차를 산다고 다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자동차 운전 면혀증을 따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유지비가 듭니다. 보험도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는 대학교에..2000cc 소나타를 타고 학교에 간다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인지....
분명 아이는 어디에서 소나타를 보았고 소나타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광고나, 길을 갈때나, 친구들에게 소나타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좋다고, 아이가, 소나타를 갖고 싶다는 희망하는 것은, ...다듬어 지지 않은 희망, 미완성된 희망이라고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도, ‘무조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달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야고보와 요한은 신이 났습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까이 있는 제자만 12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짝지워서 전도하러 보낸 제자가 70명이나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예수님을 보았던 제자도 5백명이나 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많으니까..그 제자들을 다 제치고, 우리 형제가..예수님 좌우편을 차지하게 해주십시요..
정말 당돌하고, 염치없고, 그러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너무나 진지한 희망이 아닐수 없습니다.
자, 이 희망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희망은 현실과 맞지 않는 희망이라고, 야단쳐서 돌려 보낼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핀찬을 줄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희망이 이루어 질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0장 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황금 컵에 부어 마시는, 맛좋은 포도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존경하는 세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십자가의 고통의 잔이었고,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공생애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사실도 모르고, 야고보와 요한은 신이 나서 대답합니다. “예, 할수 있습니다.”
그럴 때 조용히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내가 받는 세례를 받는다”는 이 말씀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희망을, 말도 않된다고 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희망을, 택도 없는 소리라고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 희망을 이룰것이되, 준비된 자는 누구든지 그 자리에 앉을수 있다고, 희망을 활짝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때부터 야고보와 요한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희망의 그 큰, 영광의 자리로, 한걸음씩, 한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 가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에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예수님 다음으로, 제일 먼저, 순교하는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12제자중 제일 마지막으로,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쓰고, 죽게 되는,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의 자리가...첨에는 단순히 임금님 옆자리 쯤으로만,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영광의 자리는, 천국의 자리요, 구원의 자리요, 온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심판의 주되신 예수님이 앉으시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자리가 아닐수 없습니다.
스스로 말하고도 다 몰랐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바램되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인도하여 주시고, 이끌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하는 가운데, 예수님께 구할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무조건, 성공하게 해주세요.
예수님 무조건, 장수하게 해주세요.
예수님 무조건, 행복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지? 진정한 장수는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인지..다 모를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한 성공, 진정한 행복, 영원한 장수로 이끌어 주시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순진한 희망, 철없는 희망을, 성숙한 희망, 이루어 지는 희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또한, 희망하고만 있지 않고, 희망을 이루는 자리로 인도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베드로에게 주신, 18절 19절 말씀이요, 또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자리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어떤 아빠가, 아이의 성적이 너무 나빠서, 화가 나서, 학교에 찾아 갔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 역사 성적이 왜 이렇게 나쁠까요?”
선생님이 조용히 질문합니다. “저기, 아버지께선 옛날 학교다닐 때, 역사 성적이 좋으셨나요?”
“아니요~”
선생님이 웃으면서 대답해 줍니다. “저기 아버지...역사는 그렇게 반복되는 것이 랍니다.”
“네”
오늘 본문 말씀에, 베드로도 똑같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베드로는 사마리아에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면 살고 있었습니다.
성공을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면....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어부는 좀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아무리 해도 않됩니다. 수도인, 예루살렘에 가야, 뭐라도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복음을 전파 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희망을 품을, 같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십니다. 부활하십니다.
베드로의 머리가 복잡해 집니다.
내가 생각하는, 성공은...., 내가 생각하는 높은 자리는,.... 내가 생각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베드로가 아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단어는 똑같은데,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철학용어’로, ‘관점의 오류’라고 하지요.?
소크라테스가 이야기 하는 ‘행복’ 이란 단어가,
실존주의 철학자들, 쌰르트르,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하는 ‘행복’과는,
글자는 똑같습니다. 하지만 내용과 관점은 판이하게 틀리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생각했던, 성공, 높은자리, ‘위대하게 되는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공, 높은자리, ‘위대하게 되는것’과는
단어는 똑같은데, 내용과 관점은 판이하게 틀린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민에 빠질수 밖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짐싸들고, 다시 사마리아 갈릴리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않계시고, 이젠 나혼자, 어떻게 무엇을 할수 있는게 있는가?
내가 희망하던 성공, 높은자리, 위대하게 되는 것은...어떻게 이룰수 있는가?...나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
이 혼란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22절 하반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모세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길을 나설 때,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길을 나설 때, 믿음의 조상이라는, 위대한 타이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생각이 많다고, 키를 한자나 더 하게, 할수 없습니다.
내가 계획을 잘 짠다고, 실수 하나 하지 않고, 꽃길로만, 갈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나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나의 실수 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예수님께서 나와 동행할 때,
나는 진정으로 성공하고, 승리하고, 위대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생각은 복잡하지만,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자신이 희망하는 성공과 높은자리에 오르는 것과, 위대하게 되는것을, 내려 놓기로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하지만 백부장이 베드로를 청하여 높은 자리에 앉히고 절을 합니다.
베드로를 어부라고, 사마리아 출신이라고, 낮게 대하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위대한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 곳에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이름없는 어부로 끝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버린 믿음없는 제자라는, 꼬리표가 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여 주시고,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 이십니다.
세상의, 조건, 학력, 체력, 능력....세상적인 스펙을 넘어서서,
세상 사람들도 깜짝 놀라게, 살아가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희망은 누구나 쉽게 가집니다. 그러나 희망을 이루는 길로 가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다듬어야 하겠습니다.
희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나의 수준을 넘어서, 예수님 수준으로, 희망을 이루어 주실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희망이 열맺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