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후서 4장 1절 6절 구속사의 주인공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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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달은 ‘긍정과 성숙함이 충만한 달’ 이라는 주제를 정하고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7월 첫째주는 믿음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두달란트 다음에 다섯달란트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주는 믿음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룻이 믿음의 뿌리가 되어 다윗왕이 이스라엘을 튼튼히 세우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셋째주, 오늘은 ‘믿음에는 주인공’이 있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영화에 보면, 주인공이 있습니다. 조연이 있습니다. 엑스트라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도, 주인공이 있습니다. 조연이 있습니다.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주인공입니까? 조연입니까? 아니면 엑스트라 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인공 이라고 생각되시면, 손을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주인공은 않되어도, 조연 쯤은 됩니다. 라고 생각되시는 분, 손을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주인공도 아니도, 조연도 아니고, 엑스트라입니다. 지나가다가 등장하는 보잘것 없는 역할입니다. 라고 생각되시면, 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손을 들어라고 해서 당황하셨겠지만... 이번에는 모두 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네...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참으로 행운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구속사의 주인공 들로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1. 구원의 역사에는 주인공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내가 창세기부터 시작된 성경의 주인공이요, 현재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서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믿겨 지십니까? 그러나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 2:9 에는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주인공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주인공으로 선택되었는가? 하면,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며,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의 덕을 선포하는 역할을 맡은 주인공으로 선택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번더 말씀을 드리자면, 영화는 그 영화의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시리즈물이라고 하면. 속편이지요. 스타워즈 1편, 2편 3편....시리즈 물입니다.
그 외에도, 시퀄--외전이라고 합니다. 프리퀄-전편이라고 합니다.
그 영화의 성격이 어떤가?에 따라서, 속편이다. 외전이다 전편이다. 라고 불러 줍니다.
하지만, 영화에는, 리부트물, 리셋물, 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그 전까지의 모든 것을 다 뒤집어 엎고, 완전히 다시 시작하는 영화를 칭하는 용어입니다.
주인공도 바뀝니다. 배역도 바뀝니다. 스토리도 바뀝니다.
그 영화의 모든 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서 다시 시작하는 여화를, 리부트물이다. 리셋물이다.그렇게 불러 줍니다.
영화만, 그런가? 아닙니다. 성경에도 모든 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리셋, 리부트 되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바뀝니다. 배경이 바뀝니다. 스토리가 바뀝니다.
목사님, 성경에서 주인공이 바뀌고, 스토리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창세기 6장 7절 8절에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 전까지의 모든 사람, 모든 가축, 공중의 새까지,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시고,
제일 중요한 주인공을 바꾸십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사건을 통하여, 노아가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노아의 후손들도 자꾸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에서는, 노아의 후손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주인공으로 다시 부르시고, 다시 시작하십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12지파가 모두 다 믿음이 좋았습니까? 아닙니다. 자꾸 우상을 섬기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주인공을 바꾸십니다. 북이스라엘 열지파가 망합니다. 유다의 두지파도 망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다지파만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세 번 주인공이 바뀌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어두운 가운데 빛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죄악 어두움 속에, 예수님의 빛을 비취심으로, 구속의 새창조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세기와 같은 새역사입니다. 구원의 새창조가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이루어 지게 된 것입니다.
조금 더 말씀을 드리자면,
구약에서, 창조이후, 구속사의 주인공이 세 번 바뀌었는데,
신약에서, 예수님 이후에도, 구속사에서, 주인공이 세 번 바뀌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바울의 이방인 전도로, 복음의 주인공이 바뀌게 되겠습니다.
그전에는 유대인들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마리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이방인 선교를 통하여,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로마 카톨릭이 주인공이 되어 세계선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타락하고, 복음의 순수성을 일어버릴 때,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그러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자손, 12지파가 우상을 섬기고 타락할 때, 바벨론 포수를 통하여 유다지파가 구별되어 주인공이 되어졌던 것 처럼,
카톨릭이, 변질되고 타락할 때,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신교가 구별되어 믿음의 주인공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오후 찬양예배 때에는, 바로 그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한,
원 줄기가, 바로 우리 칼빈파, 장로교회 라는 사실을,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고,
예수님 이후에, 이방인, 로마카톨릭으로 주인공으로 바뀌었지만,
로마카톨릭이 타락하고 변질될 때, 다시 주인공이 바뀌어,
오늘날에는 우리가, 복음의 순수성, 진리성을 수호하고, 예수님을 전파하는 구속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은혜가 아닐수 없습니다. 영광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또한, 구속사의 주인공으로써, 가장 중심에 서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천지에 사람이 많아도, 그들은 창세기 이후, 구속사의 주인공이, 절대로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아닙니다.
카톨릭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속사의 주인공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2. 그렇다면, 구속사의 주인공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어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집에 오더니,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고 열심히 연필을 잡고 쓰고 있습니다.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유치원에 갔는데, 아직 한글도 모르면서, 어떻게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고 그래?"
그러자 아이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엄마! 걱정마세요! 편지는 대충써도 괜찬아요....제 친구도 한글을 모르니까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연습할 때, 잘 하게 됩니다.
글씨도 연습하고,
기술도 연습하고,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기도잘 하고, 예배 잘 드리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도 연습해야 합니다. 예배도 연습해야 합니다. 믿음도 연습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도도, 예배도, 믿음도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인공의 자격이 없을때는 언제든지, 주인공을 바꾸십니다.
출 32장 9절 10절 에는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출애굽 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변질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고, 주인공을 모세로 바꾸려고 하신적이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3: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주인공의 자격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심지어는 돌들을 일으켜서도, 주인공이 되도록 하실수 있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주인공의 믿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마지막에 부름받은 일꾼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어느 포도원에, 주인이 나가서, 일꾼들을 부릅니다.
3시에 나가서, 부릅니다. 6시, 9시 11시에 나가서,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불러 옵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6시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러니까..3시에 나갔다는 말은, 3시에 6시를 더하면 됩니다. 9시에 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럼 11시에 나갔다는 말은, 11시에 6시를 더하면, 17시 그러니까..오후 5시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기준은 저녁 6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들은, 한시간만 일하면, 오후 6시가 됩니다.
저녁 6시가 되면, 그날의 기준이 되니까..일이 끝나고, 품을 받습니다.
품을 받으려고, 섰더니 9시에 왔던 일꾼도, 한 데나리온,
12시에 왔던 일꾼도 한 데나리온
심지어는 마치기 한시간 전에 왔던 일꾼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일꾼들이 불평을 합니다. “나중에 온 사람은 한시간만 일했는데, 종일 수고한 우리와 같이 한데나리온을 주십니까?”
그럴 때 주인이 말합니다. “친구여...한 데나리온 주기로 약속하고, 내가 약속한데로 하는데,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노아, 아브라함, 유대지파...는 어떻게 보면, 9시, 12시에 먼저 주인공이 된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예수님 오시기 직전, 오후 5시... 그러니까 문닫기 한시간전에, 부름을 받은 주인공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받는 것은 똑같습니다. 한데나리온..구원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 먼저 된 주인공이, 불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인공이 되어, 많은 고생을 하고,
저들은 마지막에 주인공으로 부름받아서, 곧 예수님 만나고...
그래도 받는 것은 똑같이 구원입니다. 너무 불공평 합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그러나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우리는, 오늘날 성경의 주인공으로 , 구속사의 주인공으로 선택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행운이요, 어떻게 보면 전적 은혜가 아닐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귀한, ‘성경의 주인공의 자리’에 선택을 받고, 캐스팅이 되고, 부름을 받았지만,
그 귀한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드라마에서, 주인공 배우가 배역을 잘 소화하지 못하면, 바로, 댓글이 올라갑니다. 주인공이 좀 연기가 부족합니다. 분발해야 되겠습니다.
자꾸..그러면 어느날 주인공 배우가 교체가 되듯이...
성경의 주인공 또한 아무리 주인공으로 뽑혔다 하더라도,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사의 주인공들은
오늘 본문 1절 보니까,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데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마태는 세리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예수님을 향하여,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요 훼방자 였지만, 긍휼을 입어 구속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어부, 세리, 박해자는...구속사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아쉽습니다.
자격이 있는가? 자책이 들기고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을 보고 낙심하지 않고, 출발하였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그때부터 쉼없이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구속사의 주인공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주인공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역사적 정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그 역할을 이어 받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정통성이 있을 때,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다고, 정통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베뢰아 선교회...아무리 많이 모여도 정통성이 없습니다.
시간이 오래 되었다고 될 수 가 없습니다. 조직이 많다고 될 수 없습니다.
몰몬교, 여호화의 증인, 제7 안식교...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예배를 열심히 드려도, 정통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정통성, 복음의 정통성, 구속사의 주인공은, 스스로 되고 싶다고 그냥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전적 은혜로, 복음의 정통성을 가진, 구속사의 주인공으로,
마지막 시대의 일꾼으로, 귀하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먼저 된다가, 나중되고, 나중된자가 먼저 될 수 있다는 겸손함으로,
구속사의 주인공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구속사의 주인공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쓰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