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장 42절 작은 은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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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여행을 와서, ‘보신탕’ 간판을 보았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설명을 합니다. 메뉴로 멍멍이가 나오는 음식점 입니다.
외국인이 깜짝 놀랍니다.
시장골목으로 더 들어 갔습니다. ‘개떡집’ 이란 간판이 있습니다.
외국인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듭니다. “빨리 지나갑쎄다. “
모퉁이를 돌았더니..’곰국집’이라는 간판이 있습니다.
외국인이 입을 딱 벌리며 묻습니다. 한국에는 “개 뿐 아니라, 곰도 국으로 끓여 먹습니까?”
그러면서 그 옆집을 보았더니, “할머니 뼈다귀 해장국”이라고 떡하니, 간판이 있습니다.
외국인이 기절을 했다고 합니다.
한가지 더 있습니다. 마트에 갔다가 “엄마손 파이” 라를 과자를 보고, 또 기절을 했다고 합니다.
더워서 정신이 없습니다. 금방 놓아 두었는데, 어디 놓아두었는지도 찾아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덥다고 하지만, 달력을 눈여겨 보신 분들은 발견하셨을 거 같습니다.
다음주 월요일이 벌써, ‘입추’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은, 처서입니다. 귀뚜라미가 밤마다 우는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위를 보내면서,
그리스도인은, 이 여름에...작은 은혜를 발견 해야 한다. 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큰 것은 눈에 잘 뜁니다. 사람은 누구나 큰 것에, 쉽게 주목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작은 것은 노치기 쉽습니다. 작은것은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름~~ 덥다~~...더위에 온통 신경을 씁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을, 오히려 노치고 지나가게 됩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큰 일에 주목합니다. 큰 유행, 큰 흐름에 마음을 쏙~~ 빼앗깁니다.
그러면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노칩니다.
오늘도 나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처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루에, 예수님을 몇 번 만나 보십니까?
한번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면, 큰 것은 잘 보았지만, 정말 중요한 작은것은 못보았다고 말씀드릴수 있겠습니까?
욥기 15:11 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욥이 큰 문제를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며 되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마음이 급하고, 정신이 없고, 속은 타들어가는 것 같고....
그 모습을 보고, 엘리바스가, 욥에게 권면합니다.
차분히 하여...세미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라...
은밀하게..너의 마음문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 작은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 보다, 더 큰일,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을 듣고, 욥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정신을 가다듬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26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그렇습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여,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이고,
실속있에, 좁은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겸손의 길을 걸어갈 때, 작은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슴을 보면, 작은 자에게 냉수 한그릇을 주는 자에 대하여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름에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냉수 한그릇...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 집니다.
지난 몇 주간, 이경훈 집사님이 교회 화단을 보고, “목사님 풀이 너무 무성합니다. 제가 할수 있는데 까지 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전지가위를 가지고 풀을 정리 합니다. 나중에는 전기가위를 가지고 풀을 정리합니다.
너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어서, 얼음을 둥둥 띄워 냉수를 한컵 드렸습니다.
냉수를 먹고, 밑에 화단의 풀을 베기 시작하다가, 저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말을 한마디 합니다.
“목사님, 냉수 한컵만 더 먹겠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얼마나 냉수 한 모금이 간절했으면, 그 말을 하였을까?
여름에 냉수는, 간절한 사람 만이, 그 귀중함을 압니다.
작은데 관심을 귀울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흐르는 땀을 보고, 그 사람의 더워서 붉어진 얼굴을 못보면...
그 사람에게 냉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성적 지성은.... 하등동물에서는 발견하지 못합니다.
송충이가 옆에 있는 숭충이를 보고, 여름인데 덥겠구나. 내가 생수를 주어야 되겠다...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쥐나 토끼도...옆에있는 동류를 보고, 여름인데... 더울텐데.. 생수를 주어야 되겠다...그렇게 생각을 못합니다.
하지만, 지성이 높은, 고등동물은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할줄 아는 능력이 생깁니다.
벌써, 애완견만 하더라도..주인이 아픈척 하면..왔다갔다 합니다.
돌고래, 침팬지 쯤 되면, 나는 당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형편을 생각할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 괴로움을 공감하고 같이 기뻐해줍니다. 같이 슬퍼해 줍니다.
늙은 침팬지에게는 먹을것을 갖다 줍니다.
그리스도인 에게는, 영적지성이 필요합니다.
여름이면 더울때 냉수한 그릇 떠다 주듯이..
저 사람이 기도가 부족하구나...내가 대신 기도해 주어야 겠다.
저 사람이 지금 시험에 들어서 힘들어 하는데, 내가 생수같은 찬송을 불러 주어야 겠다. 내가 성경말씀으로 힘내라고 격려해 주어야 겠다..
영적 지성이 높은 사람은, 냉수 한컵 떠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냉수 떠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는 뒤로 숨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름이 되어서,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 갔습니다.
오래간만에 할머니를 만나니까...다섯 살 손녀가 할머니에게 묻습니다.
"할머니 몇 살이야?" "육십 여덟이야."
"와~~ 많네. 그런데 할머니는, 키가 왜그렇게 작아?" ...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라도 않지요. 말은 얼마나 잘하는지...하는 말마다 배꼽을 잡습니다.
다섯 살이니까...지적 능력이, 다섯 살 만큼 이해하고,
다섯 살 만큼 행동하고
다섯 살 만큼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8에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이 말씀을 보고, 사도바울은 엄청 작은 자인, 모양이다.
사도바울은 작은 은혜를 받았는가 보다...
뭐 그런 작은거에 감격하고....사람이 속이 적은가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중함을, 이해 못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절대적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작아서, 스스로를 ‘지극히 작은자 보다, 더 작은 자’ 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가 너무나 감사 감격하고,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사도바울의 전도의 삶이, 너무나 보잘것 없다고
영적지성으로 바라볼 때, 절대적 겸손의 자리에 설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릴수 밖게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십자가 앞에서 절대적으로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성실의 길을 걸어갈 때, 작은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탈북女 박사 1호 , 이애란 씨가 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음식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탈북하여, 우리나라에서 식품영양학으로 박사님이 되었습니다.
수제비를 뜨더국 이라고 한답니다. 라면은 꼬부랑 국수, 칼국수는 제비국, 도시락은 도중식사
그리고 남한엔 지천인 함흥냉면이 요즘은 함흥엔 없다고 한다.
현재, 북한 최고의 길거리 음식은, 두부밥 이랍니다.
그런데 이애란 박사 처럼, 북한음식을 알리고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남한에 오니까, 하나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서울종합예술학교에 까지, 입학까지 했지만,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마음에는 않차고...
에이~~ 다시 북한으로 넘어가자... 그리고 얼마전에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눈이 너무 높았는지, 야망이 너무 컸는지...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을 바라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때에도, 제일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외양간 말구유에 찾아오셨습니다.
계획도 많고, 할일도 많은데, 외양간 말구유에서 시작한다면 언제 그 계획을 이루실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낮은곳에서 오셔서,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어린이의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시절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걸음 한걸음...40일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마귀에서 시험도 받으시고...
예수님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성실하게, 작은것 하나도 건너뛰지 않으시고...십자가를 향하여 걸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하실 때, 큰것에 비유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대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
작은것을 우리는 노치고, 건너뛰고, 하찬게 여길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천국은 겨자씨 한알 처럼, 작은것이고, 심지어는 숨겨진 것이 천국입니다.
숨겨진 작은 천국을 내가 발견할 때, 비로소 천국은 내 것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묵도는 작은것이고, 축도는 큰 것이다.
예배위원은 작은것이고, 찬양대는 큰 것이다.
아닙니다. 순서 순서 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순서에서 내가 예수님을 만날 때, 나는 예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작은 순서라도, 그 순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때, 지금 이 자리는 변화산에 올라가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신령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빗자루를 가지고 성전을 쓰는 것은 작은 일이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은 작은 일이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로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내가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신다면...그 일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중요한 순간이 아닐수 없습니다.
냉수 한그릇으로 그 상을 기억해주시는 예수님의 주시하심이,
오늘날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일하게 하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10 에 말씀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작은일은 내가 있어야할 그 자리입니다.
작은일은 예수님께서 만나 주시는, 바로 그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3. 그리스도인은 모범의 길을 걸어갈 때, 작은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벤허’ 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유대 귀족 벤허가 누명을 쓰고, 잡혀 합니다.
목이 타서 물을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물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면, 우물을 지나치는데...예수님이 그 우물곁에 서 계십니다.
순간 로마군인이 채찍으로 벤허를 때립니다. 벤허는 땅에 넘어집니다.
그때 예수님이 생수 한그릇을 떠서, 벤허에게 줍니다.
벤허는 생수를 너무나 귀하게 마시면서, 끌려 갑니다.
장면이 바뀌없습니다. 벤허는 누명이 풀려서 로마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끌려 갑니다.
벤허가 깜짝 놀라서, 그 우물곁에 서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이 힘들어 넘어졌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채찍으로 예수님을 때립니다.
벤허는 얼른 생수를 떠서 예수님을 드립니다.
순간, 로마군인이 생수를 쏟아 버립니다.
예수님은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나는 예수님께, 생수를 얻어 마셨는데,
예수님은, 내가 드린 생수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시고.....
벤허는 그 자리에서 오열하며... 평생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벤허가 예수님께 얻어 마신, 생수 한그릇의 은혜..어찌 적은 은혜라고 할수 있으며,
그 생수 때문에 변하게 된, 벤허의 믿음이 어찌 작은 믿음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스가랴 4:10 에 말씀합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성전이 무너진 것을 보고, ‘내가 성전을 수리해야 되겠다.’ 그리고 성전을 고치기 시작 하였습니다.
성전의 창문을 고쳤습니다. 성전에 천장을 고첬습니다. 성전의 등불을 고첬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멸시합니다.
괜히 부산을 떨면서, 창문 고친다...천장을 고친다 등불을 고친다...그거 큰일 아니다, 작은 일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고, 훼방하고 방해하고 박해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 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손에는 성전을 고치는 다림줄이 들려져 있다.’
‘하나님의 눈이 스룹바벨을 보고 계신다.’
‘스룹바벨의 일을, 작은 일이라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크게 높혀주시고, 스룹바벨과 함께 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작은 은혜를 발견하고,
작은 은혜에 감격하고
작은 일은 하는 것이, 모범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작은 일을 통하여, 작은 은혜를 발견하고, 감격하는 것은, 겸손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여름에 눈을 낮추어 실속있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겸손의 길, 성실의 길, 모범의 길은...낮은곳, 작은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주시하심을 받고, 예수님의 높혀주심을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