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장 12절 25절 샬롬의 경계선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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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철학자가 사색을 하면서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과수원을 지나면서 사과나무를 봅니다.
밭을 지나면서 수박 넝쿨을 봅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혼자말을 합니다. “내가 사과나무와 수박텅쿨을 보니까...하나님께서 공평하지 못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수박이 튼튼한 나무에 달려 있어야 하고, 사과는 힘이 없는, 넝쿨에 달려 있어야 정상이지..
반대가 되어서, 큰 수박이 약한 넝쿨에 달려 있고, 사과는 튼튼한 나무에 달려 있으니...
허참...세상에 거꾸로 되었군....“
철학자는 혀를 차면서 사과 나무를 밑으로 가서, 나무를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사과가 뚝~~ 떨어지면서, 철학자의 이마를 치고, 땅에 때구르르....굴러 갑니다.
철학자는 사과에 맞아서 아픈 이마를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어이구, 사과가 이마에 떨어져서, 다행이지...수박에 이마에 떨어졌다면 큰 일날뻔 했군”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는 화평 보다는, 갈등을 쉽게 생각하는, 죄악의 본능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쫓아가기 보다는, 불순종을 쉽게 생각하고, 불순종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인공은 이삭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이삭은 훼방하는 이웃들을 만나고, 시샘하는 이웃들과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이삭은 화평과 갈등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행동할 것인가? 순종과 불순종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갈때에, 많은 경계선에 서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요?
1. 화해를 방해하는 갈등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갈등으로 인해 피해를 겪는 사례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흔히 내가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서, 마음속으로 잘잘못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 갈등은 이쪽편이 먼저 잘못하였다. 이쪽편은 잘 못이 없다.
하지만, 갈등의 속에 들어가면, 잘잘 못이, 의미가 없습니다. 갈등으로 인하여 관계되는 사람은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많은 피해를 볼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삭은, 말씀을 보면 전적으로 피해자입니다. 잘못이 하나도 없습니다.
12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농사가 백배나 얻게 되었습니다.
13절에 보니까,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거부가 되었습니다.
14절에 보니까, 그 이삭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심통이 나게 되었습니다.
요즘 처럼 비도 않오고, 요즘처럼 살기가 어려운데,
똑같은 땅에서,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삭은 너무너무 잘되고... 이삭이 싫다...이삭이 밉다... 이삭도 어려움 당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고 이유없이, 잘못도 없이, 이삭에게 무차별 적인 방해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 이럴 때, 이삭이 잘잘못을 따져 보자고 한다고,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이삭을 미워 하는데,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잘잘못을 따진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이삭이 괴로워 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하기에, 그렇게 시작되어 고통당하게 되는 것이...바로 주위 사람들이 바라던 목표입니다.
성경에는, 교만과 자긍이 다툼을 불러오고, 갈등은 지나쳐 화로 이어지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자 이삭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교만과 자긍의 자리에 설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곡식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거부가 되어 돈이 얼마나 많은데, 좋다 나의 곡식과 돈을 생각하면, 한번 길고 짧은 것을 대어 보자... 그리고 극한으로 치닫은 대결을 시작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만과 자긍은 필연적으로 다툼을 불러오고, 갈등을 일으킬수 밖게 없는 것입니다.
잠언 20: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야고보서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성경은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지혜롭게 보지 않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다툼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화평을 목표로 행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화평을 목표로 행동하는 것은, 유약한 것으로 보일수 있습니다.
화평을 목표로 행동할때는, 나에게 손해가 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화평을 목표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리스도인은 교만과 욕심을 멀리하고 갈등을 경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의 교훈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화평의 사도들입니다.
화평을 저해하고, 화평이 깨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야고보서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우리교회에도 화평구역이 있습니다만, 화평구역은, 우리교회에서 제일 화평한 구역인줄로 믿습니다.
화평은 우리가 맺어야할, 기본적인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삭은 오히려 곡식이 더 많았습니다. 이삭은 거부이기 때문에 돈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시샘과 방해에, 충분히 대처하고, 이기려고 다툴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선에 섯을 때, 이삭은 믿음의 사람의 길을 선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2. 그리스도인은 경계선에서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합니까?
양보함으로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양보함으로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터넷을 보니까...병균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병균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나쁜 병균 가운데 무슨 그런 병균이 있는가? 해서 대답을 보았더니 “대장균” 이랍니다.
대장균...같은말 다른 뜻이지요...대장에 산다고 해서 대장균인데..
제일 대장이라고 하니까...유머 스럽습니다.
미국에서는 얼마전까지, 전 국민의 인정을 받던 한 사람에게 생긴일 때문에, 뉴스가 된 적이 있습니다.
17세에 사병으로 해병에 입대하여, 94년에 미국 해군참모총장 자리에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로 존경을 받던, 제레미 마이크 버다 장군이 그 주인공입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해병에 입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꾸준이 자기 개발을 하고, 도전을 하여서, 나중에는 미국 해군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여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감명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출나면, 꼭 시샘을 받습니다. 훼방을 합니다.
제레미 마이크 버다 장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자랑스러워 해서, 스스로 ‘V핀 무공훈장’ 이란 뱃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 뱃지를 착용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뉴스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무공훈장을 만들어서 달고, 교만하다, 뻔뻔스럽다, 그렇게 훈장 달고 싶으냐?
나중에는 너무나 논란이 되고 시달리자.. “나는 나름대로 그 훈장을 달 자격이 있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 하였습니다.
인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힘들어 하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할수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을 보면서, 이삭의 선택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으로써 예수님을 바라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향하여 온갖 조롱이 쏟아 집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저가 남은 구원 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가만히 두라...저가 엘리야를 부른다”
예수님은 열두영이나 되는 천사를 불러서, 그때 나쁜 말을 하던 사람들을 거꾸로 다 골라 내어서,
천군천사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매달고, 예수님의 능력을 보이실수 있습니다.
그때, 나쁜 말 하던 사람들을 일일이, 당장 땅이 갈라지고, 지옥에 떨어지도록 하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까지 참으라”
로마군인들에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칼을 휘두루고,
말고의 귀가 떨어지고
베드로는 놀라서, 참을수 없다고, 칼을 빼어 들려고 하니까...예수님께서는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
예수님께서는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참으시고, 사람들의 조롱을 참으시고, 온갖 고통을 참으실 때, 하나님의 뜻을 마침내 다 이루시게 되었습니다.
참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 없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가장큰 덕목은 오래~~참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말씀 15절에 보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아버지 아브라함때에 판 모든 우물을 흙으로 매웁니다.
이삭이 당시 파서 만들었다면, 우리 것인데 이삭이 왜 우리 땅에서 우물을 팟느냐?고 하겠지만,
아버지 아브라함때에 이미 우물을 팠습니다. 그때는 블레셋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그 우물은 아브라함의 우물이라고 인정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에게 그 모든 우물을 흙으로 매우고, 떠나가라고, 블레셋 사람들이 폭압적으로 싸움을 겁니다.
그럴 때 이삭은 오래참습니다. 그 우물은 나의 우물이라고 말하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누가 큰지, 한번 해보자 대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참으면서, 그 곳을 떠나서 블레셋 사람들이 없는 그랄 골짜기로 후퇴를 합니다.
자 이삭, 얼마나 성숙합니까? 얼마나 속이 넓고, 믿음이 깊고, 인격이 온화 합니까?
이쯤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가 해도 좀 너무 했던것 같다. 그랄 골짜기로 이삭이 가버렸으니 나중에 만나더라도, 잘 지내는지 인사라도 하자..
그래야 될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8절 말씀 보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까지 다시 쫓아와서 시비를 걸고 싸움을 겁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랄 우물을 참으면서 양보하고 옮기니까 또 따라와서 시비를 겁니다. 에섹, 싯나...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와서 시비를 걸지 않을 때 까지, 계속하여 양보를 하며, 오래 참으며, 물러 섰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 얼마나 속이 좁은지 모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쁜 행동을 즐거워 하면서, 자기 멋에 살아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 이 성격을 좋게 미화할수 있겠습니까? 성격이 화끈하다..절대 아니지요?
얼마나 성깔이 조악하고 포악하고 나쁜지 모릅니다.
이삭을 훼방하고 시비를 거니까...이삭은 계속하여 양보만 하면서 물러서니까...
뭐 저렇게 물러터진 사람이 있어?
저렇게 살아 봐야, 맨날 남 뒤치닥꺼리나 하지...
그러면서 이삭을 우습게 보고, 이삭을 만만하게 보고, 이삭을 엎신여기며 살아 갔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객관적으로 누가 나중에 주인공이 되고, 누가 나중에 축복을 받게 될까요?
말할 것도 없이, 이삭입니다.
계속하여 끝까지 양보하며, 평안을 지켰던 이삭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모든 행동, 평안을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양보하며, 손해보며 양보하며, 오래 참음으로 양보하는, 그 인격, 그 성숙함, 그 믿음을 보시고,
마침내 이삭을 부르셨습니다.
24절 보니까..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하리라.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복을, 너에게도 주리라. 그리고 이삭에게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이삭은 너무나 가슴이 벅차서,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흐믓한 마음으로, 거기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아마 우물을 팠을 때, 이삭의 마음속에서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화평함으로 마침내 블레셋을 이겼습니다. 내가 양보함으로, 오래참음으로 블레셋을 드디어 이겼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축복을 내려 주옵소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다하다 내어 쫓기게 될 때, 마침내 나타나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축복해 주십니다.
오늘날도, 그 성격 어디 안가고, 성경 말씀에 나오는 민족들이, 지금도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북쪽에 곡 마곡, 지역에 포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에시 들이 되어서, 얼마나 포악한지...테러를 하고, 사람을 악하게 죽이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양보하지 못하고 서로 끝없이 싸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역사는 돌고 돌아,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졌습니다. 이스라엘이 힘이 쎄어지고 블레셋 사람들은 힘이 약하여 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메우며 빼앗고, 이삭을 쫓아 내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땅을 빼앗고, 쫓아내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시편 37편 5절-6절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역사의 모퉁이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도,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노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지켜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다름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억지로 내가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고,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고, 하나님께서 신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경계선의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삭도 그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샬롬을 위하여 양보하였습니다.
믿음으로써 오래참음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삭의 믿음을 보시고, 나타나셔서 축복해 주시고,
이삭을 존귀하게 세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2017년 어떤 경계선 위에 서게 될 때도, 말씀대로 살아가서,
샬롬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올려 드리고,
하나님께서 높혀 주시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