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장 6절 14절 성탄의 의미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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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기예수님이 이 세상에 찾아오신 성탄절이 되겠습니다. 또한 2016년 마지막 주일이 되겠습니다.
매 주일이 항상 의미가 있고, 뜻깊은, 주일 입니다만, 특별히 오늘은 성탄절인 동시에, 2016년 한해를 마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아기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장면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기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사건의 크기로 보면,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에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도 있습니다. 벧엘도 있습니다. 헤브론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시에는, 악착같이 모여서 삽니다. 예루살렘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벧엘, 헤브론...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시에는, 꼭 꼭 땅을 차지하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 가보면, 유대인들이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은 베들레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장면을 생각하면, 베들레헴에서 가장 큰 호텔에 VIP룸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7절 말씀을 보니까,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호텔은 커녕, 여관에도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외양간의 말구유에 아기예수님은 누울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 이러한 예수님의 오심의 장면은, 어떤 사람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어떤 기자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취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기예수님의 오심은 기준이 되었습니다.
아기예수님이 오심으로, 그전에는 구약성경입니다. 그 이후로는 신약성경입니다.
아기예수님의 오심으로, BC 와 AD 달력도 나뉘어 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과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는, 너무나 중요한 새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적으로 보면, 너무나 작은 사건이지만,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와 내용은, 온 세상과 역사를 나누고 정리는, 기준이요,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가 성탄절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세상적으로 보면, 너무나 작은 사건입니다. 한적한 곳에, 성도들이 모여서, 정성스럽게 성탄절 예배를 드립니다.
자 세상적으로는 너무나 작은 사건입니다. 누구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성탄절 예배는, 성경을 보면, 천군천사들이 모두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시작하시는, 너무나 대단한 의미와 뜻이 임하는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탄절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1. 아기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기예수님은 독생성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시고, 예수님의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자 이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오늘날 이 세상은 지구온난화로 날씨가 혼란스럽습니다.
날씨만 혼란스럽습니까? 아닙니다. 중동에는 다에시라고 해서 나쁜 테러 단체들이 발생이 되어서, 사람들을 막 죽이고,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도, 독일에서 어떤 사람이 트럭을 몰고 돌진하여 사람들이 트럭에 바쳐 죽었습니다.
우리 주위만 하더라도, 일본은 항상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북한은 항상 틈만 나면, 공격을 하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평화의 세상이 아닙니다.
불의한 세상입니다.
전쟁과 거짓과, 죄악이 가득한 것이,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을 멋있게 지으셨습니다.
해도 달도, 동물들도, 사람들도 지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말슴 하십니다.
정말 좋구나... 보기에 정말 좋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좋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은 것을 다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은 것을, 사람에게 주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어떻게 붙이는가 보시고,
좋아하시면서, 하나님이 만드신것을 다 사람이 이름을 붙이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맡겨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와하고 살아갈 때,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나쁜짓을 하고, 죄악으로 가득차게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6절에 보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믿었는데, 그래서 다 맡겨주었는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좋게 만든것을 나쁘게 죄악으로 불들이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된 세상, 이러한 죄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실존...
실존이라고 하는 단어는, 철학의 단어입니다. 인간 존재와 인간적 현실의 의미를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파악 해 낸 인간 모습....
인간의 실존은, 죄의 근원은 아닙니다만, 죄속에서 살아갈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만물을 죄악 되게 사용할수 밖에 없는, 죄 아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때, 근심하고 한탄하실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이러한 실존만 본다면, 심판만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멸망만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죄속에서 죄 되게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죄된 세상속으로 보내시고,
예수님을, 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에는, 그 귀한 의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실 만큼 죄된 세상이지만, 그렇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얼마 만큼 사랑하셨습니까? 독생성자 예수님 이 땅에 보내어 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기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요.
죄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죄악으로 가득차고, 처처에 전쟁과 나쁜일 이 많이 있지만,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보면 알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예수님을 보내어 주실만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저주와 멸망의 대상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사랑의 대상이요, 은혜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성탄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데, 구체적으로 누구를 사랑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사업을 크게 하는 교인이 있었는데, 빌딩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빌딩에 엘리베이터 시공을 하고,
목사님 엘리베이터가 사고 없이 잘 작동하도록, 예배를 드려 주십시요.. 그리고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알겠습니다. 예배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갔더니만,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는데, 돼지 머리가 있는 것입니다. 굿을 하기 위하여 한상 차려져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아 네... 목사님, 예배도 드리고, 굿도 하려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사고가 나면 않되잔아요..
만약에 하나님이 않도와 주시면, 귀신이라도 도와 줘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예배드리고 가면, 조금 후에는 무당도 와서 굿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목사님이 그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거절하고, 돌아 왔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고, 성탄절에 아기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는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짝사랑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탄절에 이 세상에 찾아 오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평등하고, 부합리한 사랑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한한 사랑, 일방적 사랑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데,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비차별적이고 공평하게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더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입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아기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아기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기예수님은, 궁궐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아마도 아기예수님을 예루살렘 궁궐에 오셨을 것이다. 라고 합리적으로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헤롯의 궁궐에 찾아가서 아기예수님의 나심을 문의 하였습니다.
하지만 헤롯의 궁궐에 당연히 아기예수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예루살렘에도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외각,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아기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또한 베들레헴에서도 누추한 외양간의 말구유위에 오셔서, 예수님께서는 몸을 누이셨습니다.
한 마디로, 낮은 곳입니다. 낮아도 보통 낮은 곳이 아닙니다.
또 천한 곳입니다. 보통 천한 곳이 아닙니다.
아기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곳에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그곳에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슴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4절 말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는, 어른들과 비교하여 낮은 자입니다.
어린아이는 키도 어른보다 낮습니다.
어린아이는 나이도 어른보다 적습니다.
여러모로 볼때에, 어린아이는 어른보다가 무조건 낮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슴하셨습니다. 천국에서는, 어린아이 처럼, 무조건 적으로, 절대적으로 낮고, 겸손하고, 자기를 낮출수 밖에 없는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사람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낮은 자에게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은 ‘낮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말씀합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탄절에, 관심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낮은 사람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낮은 자리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 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되어, 갖은 고통을 당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죽음의 자리에 내려 가십니다.
그 자리는 멸망의 자리요, 저주의 자리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리입니다.
그런 낮은 자리에 까지, 일부러 예수님께서는 찾아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 처럼 반복적으로 같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누가 높은 자인가?
누가 예수님 우편에 좌편에 앉게 될 것인가?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투는 제자들을 향하여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럴 때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를 분명히 알고 대답한 것입니까?
관점에 오류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실 때, 예수님께 마시려는 잔이 어떤 잔입니까?
십자가의 고난의 잔입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순종의 잔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시를 내어주시되, 십자가에 죽기 까지 내어 주시는 십자가의 잔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였던 잔은 반대입니다. 높아지려고 할대 필요한 수고 쯤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전적으로 제자들의 관점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낮은자리, 순종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에 관심이 있엇지만,
제자들은 높은자리, 자기가 높아지는 자리,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자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멋있고, 대단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게 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리를 향하여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다듬어 가십니다.
마치 훌륭한 조각가가 명작을 만들어 가듯이,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강을 잃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매어 달 리가 하십니다.
어떤 제자는 권력을 맛보게 하시고, 잃어버리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알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속도 썩게 하십니다. 자존심도 상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됩니다.
야고보는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됩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던 것 처럼, 십자가를 지고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처럼 낮은자리에 찾아가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일찍 철드는 아이가 있는 반면, 나이들어서 철드는 아이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빨리, 배우는 학생이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가르치고, 가르치고, 나중에 한참 후에 배우는 학생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일찍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서, 낮은자리, 순종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를 찾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내 성격 내세우고, 내 고집 내세우다가...온갖 고생 다하고, 돌고 돌아, 나중에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마음이 낮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죽기전에, 한편 강도처럼, 온갖 고생 다하고, 죽기전에 예수님께 용서를 빌며, 마음이 낮아저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낮은자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지 않고는,
십자가를 지는 자가 되지 않고는, 천국문을 통과할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나중에는 훌륭한 순교자로 다 만셨듯이,
하나님께서 택한, 하나님의 자녀는, 분명히, 그 마음을 낮아지게 만드시고, 순종하게 만드시고, 십자가를 지게 만시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가보면,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말구유가 있던 자리에, 성탄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가 보았습니다만, 그런데 성탄교회에는 대문이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대문이 없어서, 당황하였더니, 현지 안내인 가르키는 곳을 보니까,
조그만 문, 하나가 있습니다.
고개를 팍~~숙이고, 무릎을 굽혀야 들어갈수 있는 높이로, 교회의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 이렇게 문이 작으냐? 라고 질문을 하였더니 대답해 줍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곳에는, 누구라도, 무릎을 굽히고, 몸을 굽히고 경배하도록, 만들려고, 일부러 교회의 문을 작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문옆에 서서, 현지 안내인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확실하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세요”
그러면서, 손가락을 가르키는 곳을 보니까... 그 문처마 돌이..움푹 패여 있는 것입니다.
2천년 가까이, 많은 사람들이, 몸을 덜 굽히고 들어가다가, 그 문처마 돌에, 머리를 부딪혀,
그 문처마 돌이, 움푹 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무릎을 꿇고서 기어들어 가듯이, 성탄절교회에 들어가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어서라도, 천국문을 들어갈수 있다면, 바랄 것이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 문을 기어 들어가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탄절 아기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아기예수님은 친히 낮은곳에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가려면, 낮아저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신 잔을, 마셔야 합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낮은자리, 순종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를 찾아가서,
예수님 옆자리를 예약하는 믿음생활을 하시기를
성탄의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