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3서 1장 8절 15절 겸손은 문안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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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간 동안, 예수님 안에서 평안 하셨습니까?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평안 하십니까?” 인사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겸손한 문안’ 즉 그리스도인의 인사에 대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어떤 가게에 가보면, 가게는 그럴듯 한데, 찬바람이 씽씽~~~ 붑니다. 손님들이 없습니다.
어떤 가게에 가보면, 가게 문을 들어서자 말자, 저~쪽에서 일하던 직원이 “어서오세요” 인사를 합니다.
주방 안에서 일하던 직원도 인사를 합니다. ‘어서 오세요’
안내를 하는 직원이 반갑게, 웃으면서 맞이해 줍니다. “손님 어서 오십시요.”
사실 음식점에, 음식맛은 거기가 거기입니다. 특출하지 않으면 평균화가 다 되었습니다.
하지만 음식점에 분위기는 천차만별입니다.
분위기가 냉냉한 식당은 음식맛을 떠나서, 앉아 있기가 부담스럽습니다. 다시찾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갑게 인사하고, 맞이하는 식당이 있습니다.
활기차게 인사합니다. 따뜻한 음성으로 인사를 합니다.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합니다.
심지어 밥을 다 먹고 나설때도, 인사를 열심히 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요.” “안녕히 가십시요.” 여기 저기서, 음식점 문을 나서는데도, 직원들이 인사를 합니다.
나를 반갑게 맞이 해주고, 나에게 따뜻하게 인사해 주는 식당은, 다시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점만 그렇습니까?
오늘 성경말씀을 보니까, 교회에서도 인사를 하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성도를 맞이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교회에서 성도들을 내어 쫓는 사람이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1. 겸손한 자가 되어, 먼저 인사해야 하겠습니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성경은, 문안하라고 말씀합니다.
문안은, 물을 문, 편안 안.... 편안한지 묻는 것입니다.
한글사전에는, 웃어른께 안부를 여쭘...또는 그런 인사. 라고 설명합니다.
오늘 말씀 15절에 보니까,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문안하기를 기뻐하고 힘씁니다.
요한3서는, 사도 요한이, 가이오 장로에게 보낸 편지가 되겠습니다.
사도요한이, 가이오에게 편지를 쓴다고 하니까,
사도요한 옆에 있던, 많은 성도들이, 반갑게 가이오 장로에게 문안 인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문안인사를 전하면서, 가이오에게도
“너도,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서 문안” 하라고 당부하고 권면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문안 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하기를 힘씁니다.
박정옥 권사님 평안 하셨습니다.
김집사님, 이집사님 평안 하셨습니다.
반대로,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문한하기를 힘쓰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문안 받기는 기대를 합니다.
누가복음 11:43 말씀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성숙하지 못한 인격과 신앙을 책망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대접받기는 기대합니다. 하지만 먼저 남을 대접하기는 싫어합니다.
바리새인은 문안 받기는 기뻐합니다. 하지만 먼저 남을 문한 하기는 싫어합니다.
문안 받는 것은 기뻐하고, 먼저 문안하는 것은 싫어하는 바리새인은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깊지 못하고, 외식하는 사람이 아닐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이름은 ‘디오드레베’입니다.
이름의 뜻은 너무너무 좋습니다. ‘양육 받은자’입니다. 하지만 이름과는 반대로 양육을 잘못 받았습니다.
말씀의 양육, 신앙생활에 대한 양육을 잘못 받아서,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 말씀 보니까...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디오드레베는 높아지기를 좋아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에헴 거리기를 좋아하고, 어른대접 받기를 좋아하였지만,...
높아지고 대접받는 만큼, 겸손하게 먼저 남을 남을 높여주고, 겸손하게 먼저 남을 대접하기는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이해가 않됩니다. 으뜸 되고 높은 사람이 왜 겸손해야 합니까?
대접받는 사람이, 왜 남을 먼저 대접해 주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천국생활과 세상생활의 차이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내가 더 높다. 아니다 니가 더 높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 하나님 나라의 생활은 이 세상과 다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행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애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려고 애쓰는 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높아지고, 교만해지고, 에헴 거리기를 힘쓰지만
교회에서는 반대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오히려 섬기고 대접하고 문안하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조금만 했다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텐데,
오늘 말씀에 ‘디오드레베’는 어떻게 양육받았는지,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한자가 되었습니다.
대접하지 않고, 대접받는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10절 말씀 보니까...다른 성도들을 악한 말로 비방하고, 문안하고 대접하고 맞아들이기는 커녕, 문안하고 대접하고 맞아들이는 사람들을 오히려 방해하고 훼방하고, 교회에서 내어 쫗기 까지 하는, 지극히 잘못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는 그것이 얼마나 나쁜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쁜 습관은, 악한 신념이 되고,
악한 신념은 스스로와 교회를 시험에 빠뜨리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질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이 침울하거나, 새침하거나, 무뚝뚝하게, 날카롭게 생긴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절대로 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옆에 가기가 어려운 분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과묵한이 점잖은 것으로 인식되고,
날카롭게 생긴것이 스마트 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하였습니다.
과묵하면, 하루종일 있어도, 물건 하나 못 팝니다.
점잖고, 날카롭고 새침하고...이젠 갖다 버려야 합니다.
화사한 미소, 따뜻한 표정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연습하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스튜어디스들의 일상을 방송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따뜻한 미소로 맞아 줍니다. 항상 활기차게 안내를 합니다.
그런데 스튜어디스들은 본래 얼굴이 화사하고, 활기차고...물론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튜어디스들이 비행기에 오르기전에 준비를 하는데, 사무실에서 거울을 보면서, 몇번이고 미소연습을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코리아 에어라인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스스로 마음에 들때까지,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연습을 합니다.
입꼬리가 균형잡히게, 올라가는 것을 연습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고개를 끄득이게 되었습니다.
인사하는 연습, 화사하게 웃는 것을 스튜어디스들이 연습하는 구나...
그래서 저는 한동안,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한적이 있습니다.
웃을 때, 입꼬리가 균형잡히게 미소를 잘 짓고 있는가?
화사하고 따뜻하게 웃고 있는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보면, 하나 둘...까지는 괜찬습니다. 그런데 셋~~~ 그러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 집니다.
나중에 사진에 나온 얼굴을 보면, 표정이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카메라고 사진찍을 때, 억지로라도 웃어야 되겠다. 그리고 연습을 하곤 합니다.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히히 하하 호호, 히히 하하 호호
평안하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오늘 말씀으로 돌아와서, 먼저 문안하고, 먼저 대접하는 것은, 내가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성숙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자이기 때문에, 할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11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1절 하반절에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엿느니라” 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2. 먼저 문안하고 대접하기를 힘쓰는 사람에게는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디오드레베 처럼, 교만하여, 으뜸되기를 힘쓰고, 먼저 문안하지 않고, 대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겸손하며, 문안하며, 대접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마을 어귀에서 쉬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이 먼저 인사합니다. 먼저 집으로 모셔다가, 대접을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강권에 마지못하여, 아브라함에게 인사를 하고, 대접을 받습니다.
그때까지도 몰랐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자 엿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고, 어렵게 입을 떼어서 축복을 합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내년 이맘때 쯤에, 아들이 있으리라”
그래서 100세에, 이삭이 태어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알지 못하였지만, 평소에 먼저 문안하고, 먼저 대접하는 겸손한 습관, 좋은 습관이 있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지불식 간에, 하나님의 사자를 문안하고, 하나님의 사자를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대접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42 말씀입니다.
아무리 하찬은 사람이라도, 먼저 인사하고, 먼저 대접할 때,
그것은 너무나 작은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지만 꼭 기억되고, 그 상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12절에서, 나쁜 디오드레베 와는 반데로,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데메드리오’
‘데메드리오’는 반대입니다. 얼마나 문안을 잘 하고, 얼마나 성도들을 잘 대접하고 섬기는지.
믓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이오를 향하여, 데메드리오는 본받고, 디오드레베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잇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증은 좋은 간증이 아니라, 본받으면 않되고, 조심해야 할, 신앙생활에 대한 간증이었습니다.
이 분은 대형교회를 다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교회가 크고 좋은데 왜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까?”
네...그 교회는 사랑이 없는 교회 였습니다. 제가 예배드리러 가도, 누구하나, 저에게 따뜻하게 인사해 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누구하나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교회에서 너무나 힘들어서, 결국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어서 교회를 떠났다니, 그것 뿐이었습니까?”
한가지가 더 잇습니다. 그교회 목사님도 좋고, 교회도 좋았는데, 결국 그 교회를 떠나게 된것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네 어떤 상처를 받았습니까?”
제가 가면, 저에게 인사해 주는 집사님이 한명 있엇는데, 너무나 저를 괴롭게 하였습니다.
“아니 인사를 하는데 괴롭게 하다니요”
부정적인 말, 찌르는 말,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였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잘못하여서 죄를 받았다.
않좋은 일이 생기면, 그건 시작이다. 더 큰 벌 받기 전에, 회개해라..
그러면서, 어려운 일, 않좋은 일을 여기저기 소문을 냏어서, 나중에는 얼굴들고 교회에 나갈수가 없었습니다.
내 자신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결국 그 교회를 떠날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저를 아무도 모르는,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아타까운 사연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반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는 먼저 문안하고, 들어오면, 여기 저기서 서로, 인사하고,
헤어질때도, 반갑게, 여기 저기서, 인사하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열심히 인사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실줄 믿습니다.
겸손하게 먼저 문안하면, 교회가 부흥합니다.
먼저 대접하면, 오히려 내가 높임을 받습니다.
김포상도교회의 데메드리오..
문안 잘하고, 대접 잘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하나님께 증거를 받는
김포상도교회 데메드리오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이 되겠습니다.
샬롬은 평안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냥 평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평화롭게 하시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항상 은혜롭게 활기차게,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다위성의 이름도 예루살렘으로 바꾸었습니다. 예루...라는 말을 기초라는 말이고, 살렘은 샬롬이라는 말입니다.
평화의 기초...하나님의 평화위에 세워진 도성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 평화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샬롬은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에 거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평화의 삶을 묻고, 나누고, 힘쓰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끝절 15절에서, 사도요한은 예수님 안에서, 샬롬이 있기를 인사합니다.
믿음의 친구들이 샬롬으로 인사하는 것을 전합니다.
나도,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일일이 부르며 인사하기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나의 주위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의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게, 친천들에게,
예수님의 평안으로 겸손하게 먼저 인사하고, 먼저 대접하고, 먼저 섬겨서..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을 대접하고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의 섬기고,
그래서 그 상이 크게 하나님 나라에거 기억되는, 샬롬의 삶을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