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아 29장 10절 13절 참 희망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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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제일 많이 말씀을 전한 선지자는 예레미아 선지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희망, 소망에 대하여, 말씀을 찾아 보면, 예레미아서가 단연코 제일 많습니다.
예레미야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예레미야 31: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예레미야애가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 시피, 예레미아 선니자는 가장 절망의 시대 가운데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직접 지켜 보았습니다.
자 가장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살았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레미아 선지자는 제일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을 전할수 있었을까요?
예레미아가 전한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희망과는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이었기 때문에,
예레미아는 절망의 자리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고, 희망을 전할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희망’이라고 하면, ‘장밋빛 희망’이라는 말을 흔히 떠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잘 되고, 저렇게 잘 되고, 멋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으면, 너무너무 마음이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희 듣자말자 곧 ‘장밋빛 희망’을 떠올리게 됩니다.
장미꽃의 색깔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잎이 약하여 만지면, 금방 부서져 버리는 것 처럼
장밋빛 희망은, 겉모습이 너무나 화려합니다만, 하지만 실상은 장미꽃잎이 부서져 버리는 것 처럼, 젼혀 관계 없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선거를 할때, 공약은 너무나 대단합니다. 하지만 장밋빛 희망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강대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곧 평화통일을 이룰 것입니다.
언듯 들으면, 너무너무 화려합니다.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장및빛 희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대국이 되기 위하여, 가야할 과정을 이야기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이 되기 위하여, 평화통일을 하기 위하여서는, 희망뿐만 아니라, 그 목표를 위한 수고가 분명히 있습니다.
선진국이 되자면,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
평화통일이 되면, 낙후된 북한을 다시 건설하는데, 많은 노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수고입니다. 어떻게 보면 희생입니다.
수고와 희생의 댓가가 분명히 들어 가아먄, 선진국이 되고, 평화통일이 되는데....
수과와 희생의 댓가는 쏙 빼먹은체, 장밋빛 희망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온전한 희망,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바로 그 희망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부분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오늘 말씀은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나오는, 그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믿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신앙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셨습니다.
일이 잘 됩니다. 사업도 평안하고, 가정도 평안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았더니 무당을 불러 놓고, 굿을 하고, 푸닥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하는 것이 너무너무 재미있고, 너무너무 좋다...고 도리어 즐거워 합니다.
목사님, 예가 좀 지나쳣습니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딱, 그 모습이 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을 주시고, 그의 자손들은 선민이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라가 잘살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평안합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았더니,
바알과 아세라와 말둑의 우상을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을 불러다가, 푸닥거리를 합니다.
오늘은 바알, ‘길일’이다. ‘아세라 제삿날’이다. 그러면서 바알과 아세라 제사드리는것을 너무너무 재미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딱딱하고 어렵고, 힘든데,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것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좋습니다. 그리고 즐거워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이 보시기에,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 어떻습니까?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지요?
죄악의 병, 우상의 병, 멸망의 병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보통병이 아닙니다. 중병이 들었습니다.
죄악과 우상의 중병이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간단 합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희망’입니다.
병을 고치고, 아픈 것이 낫는 것이, 중병에 걸린 사람의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기침이 너무 심합니다.폐렴이 걸렸습니다.
배탈이 너무 심합니다.장염에 걸렸습니다.
희망이 무엇입니까? 빨리 기침이 낫고, 폐렴이 나아서, 다시 건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릴때 보면, 아이들이 병원에 가는것을 너무너무 무서워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배에 손만 갖다 데도, 으앙~~~~ 하고, 웁니다.
청진기 라도, 배에 갖다 데면....몸을 비틀면서, 울고 불고...난리가 납니다.
의사 선생님이 “배탈이 났으니, 주사를 맞아야 되겠습니다.”
드디어, 주사가 등장하면, 배아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눈물콧물 흘리면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울면서, 병원복도 끝까지 도망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자 역사적으로 보면, 예레미사 선지자가 예언한데로,
이스라엘에 바벨론이 처들어 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끌려 갑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놀아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벨론에 잡혀가는 것은 고통이요, 공포요, 무서운 일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에 잡혀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이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됩니다.
우상이 얼마나 죄악이고,
우상이 얼마나 멸망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엄청난 하나님의 주사를 맞습니다. 영의 주사, 치료의 주사를 받습니다.
이러한 치료를 받을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점점 살아나게 됩니다.
얼마나 믿음이 다시 돌아왔는가?
모든 사람들은 우상에게 절을 하라고 하엿더니,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속에 던져 집니다. 그래도 절대로 우상에 절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속에 던져 넣읍시다. 그래고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사자 굴속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단순히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친구들 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바벨론에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화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 서를 보면,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되는 것입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바벨론이 이스라엘에 처들어오 오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괴로움입니다.
하지만,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죄악의 중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큰 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큰수술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건강을 다시회복 시키는, 희망의 과정이요,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술해야, 건강을 되찾습니다. 수술 할때, 절망의 사람이 희망의 사람으로 진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도 큰 수술을 하신분들이 한두분이 아닙니다.
이강백 장로님은 심장수술을 하셨습니다.
원장로님도 방광수술을 하셨습니다.
김윤곤 안수집사님은 입천장 안쪽, 비공 수술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수술만 생각 한다면, 수술의 과정이 너무너무 무섭습니다.
꼭 그렇게 무서운 수술을 해야 하는가? 지금 내가 아픈것 보다가, 수술 자체가 더 무섭기 까지합니다.
심장을 수술 하려면,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갈비뼈를 벌리고....
요즈음은 의술이 발전 되어서 겨드랑이 쪽에 정맥을 찾아서, 작은 로봇을 심장까지 집어 넣어서, 수술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수술을 할때, 병의 근원이 치료가 되고, 다시 건강이 찾아오는 됩니다.
이강백 장로님 얼마나 건강하십니까?
요즈음은 헬스장에 가서 헬스트레닝 까지 하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술받는 것이, 무섭고 고통이고 괴롭다고, 수술의 아픔만 보고, 그 수술을 절망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수술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이렇게 고통 가운데 있게 하시는가?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절망하였습니다.
즉,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우상만 섬기고, 믿음이 없어지다 보니, 믿음이 눈, 영의 눈으로 하나님이 치료하신다는 것을 볼수도 알수도 없엇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아 선지자는 반대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영의 눈으로 보니까..
잠깐 아픈것, 괴로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냉철하게, 역사의 큰 흐름을 볼때에....더 나아것, 믿음으로 볼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치기 시작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너무너무 중병에 걸리다 보니까....더 놓아 두면, 진짜 이방인이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선민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축복, 구약성경의 그 놀라운 축복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더 늦출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정능력이 없습니다. 스스로 잘 못 되었구나....그리고 멈추어야 하는데,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데,
스스로 치료하고, 스스로 고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는 멸망과,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수 밖에 없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대수술을 시작 하셨습니다.
잠깐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수술 해 주시고, 고쳐주시면,
중병에 걸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술 받을때는, 아프고 괴로워도, 수술이 끝나면, 다시 예전처럼 건강한 이스라엘로 회복이 됩니다.
축복의 이스라엘, 선민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으로 회복이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다.
을마나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희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아 선지자가 발견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희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 하는, 희망과는, 완전히 급이 다른 희망입니다.
절망 중에 있으니까, 힘을 내라고,
않좋은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는 알수 없지만, 그저 힘을 내라고,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장밋빛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되살아 나는 희망
잃어버린 축복을 다시 회복하고
버림받은 선민을 다시 회복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세워지는, 놀라운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을
예레미아 선지자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치료하시는지,
왜 이러한 치료가 필요한지,
이 치료를 받으면, 어떻게 예전처럼, 건강을 회복하는지...
치료의 과정이 다 나와 있습니다.
흔히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요...
혹시 배탈이라도 나서, 병원에 가보면, 의사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시는데, 잘 이해가 않됩니다.
병명도 그렇고, 약이름도 그렇고, 약의 성분도 그렇고....너무너무 어렵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사람을 고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 있다가 보니,
어떻게 고치고, 어떻게 수술을 하고, 어떤 약 성분을 처방해야 하는지...
그 계획이 다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치료 설명서라고 할수 있습니다.
자 먼저,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0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치료의 목표입니다. 이번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대수술을 하고 난 다음, 70년 후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치료의 일정이 딱 나와 있습니다.
치료의 목표가 딱 나와 있습니다.
그러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이번 대수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이요, 고통이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아닙니다. 오히려 평안을 위하여, 믿음의 백성, 축복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 수술입니다. 그래서 이수술은 오히려 미래에 희망을 주는 수술인 것입니다.
수술하는 동안, 부분적으로 더 아플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않보시고,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혹시나 너무 아퍼서 소리치면, 병원에서 무통 주사를 놓아 줍니다. 그리고 치료한 부분이 어떤지 자세히 살펴 보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우리를 살펴 주십니다.
그것이, 11절 12절 말씀입니다.
12절,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절,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섬세한 분이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자상한 분이신지 모릅니다.
혹시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속에 불안할까봐,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꼭 필요하고,
언제까지 무작정 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딱 70년 동안만 시간이 걸리니까...
길게 하지 않을 것이니까...
치료에 잘 임하고, 혹시나 앞으면 바로바로 말하면, 또 그때 그때 무통주사도 바로바로 놓아주겠다고, 설명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심...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비정상을, 정상으로,
건강하지 못한 나를, 건강하게 바꾸어 가시는 과정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꼭 있어야 하고,
이 과정이 있어야, 내가 항상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영속적으로 살아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참희망, 진정한 희망을 발견해 왔습니다.
시편 42:5 말씀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로마서 5:4 말씀합니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리스도인들은, 참희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절망속에 장밋빛 희망을 가지고 불안을 감추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나를 전적으로 사랑하시고,
혹시나, 내가 믿음의 위기가 와도,
오히려 나보다, 더 두손을 걷어 붙이고,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고쳐 주시고, 내가 건강하고, 변함없이 구원의 자녀로 살아갈수 있도록,
항상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십니다.
아니,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세워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런 하나님의 나를 향한 역사하심...이것이 바로 참 희망이요, 온전한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일로나, 나의 일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속상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하게, 미래에 희망을 주시려고,
오늘도 나를 인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힘차게 든든하게, 참희망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