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장 40절 42절 요나의 전도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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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개학이 가까워 졌습니다. 방학숙제가 밀렸습니다.
옆에 있는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5대양 6대주가 뭐야?”
그러자 아빠가 대답합니다.
“음..5대양은 김양 이양 박양 최양 강양 이고...
6대주는...음 폭탄주 소주 맥주....모르겠다. 대충 적어 보아라..”
아이가 받아 적어서, 학교에 갔다가 와서 말합니다.
아버지 틀려서 선생님께 혼나고 왔어요..
아버지 좀 똑바로 아세요..
5대양 6대주... 전세계 5개의 바다와 6개의 대륙을 뜻하는 것이지요.
5대양은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빙양, 북빙양
6대주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호주,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은 바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면서,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교회는, ‘위기의 시대’ 입니다. 하지만 이 위기를 해결할 한가지 답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잘됩니다. 전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와 축복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전도하는 나라도 잘됩니다.
더 나아가서, 전도하는 교회도 잘됩니다. 전도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1. 전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3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전도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전도하시면서, 이 마을, 저마을로 다니면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세우셨는데, 그 목적에 대하여, 마가복음 3:14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즉 예수님께서는, 전도하게 하시려고, 12제자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오늘날도 전도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갔습니다.
사도행전 5:42 에는 말씀합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왔든지, 또는 생활하러 세상에 나가든지..
날마다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도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전도하는 것을, 높게 평가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1:8 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빌립은 최초의 일곱 안수집사님 중에 한 분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전도를 열심히 하였는지,
안수집사라는 직분에 하나 더하여, 전도자 빌립 이라는 명칭을 덪 붙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초대교회를 꿰뚫는 큰 중심이 있다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는 많은 박해를 초래 하였습니다.
박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겪는 냉소적인 반응, 환경적인 요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방해, 심지어는 생명까지 잃게 될 정도로, 핍박을 받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았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전도하다가, 붙잡혀서, 죽을 정도로 두드려 맞고
전도하다가, 옥에 들어가서, 형을 살고... 이런 박해는 없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있던 시대에는 전도할때, 이러한 극심한 박해를 무릅쓰고, 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얼마나 믿음생활이 힘들었던지, 터어키의 갑바도기아에 가보며,
초대교회 성도들이 땅을 파고, 들어가서 생활하던 지하 동굴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하동굴이라고 하니까. 그저 땅을 파고, 동굴을 만들었겠거니....쉽게 생각할수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지하로 80m 가 넘게 파고 내렸습니다. 층으로, 지하 8층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지하주차장이 지하8층 짜리, 잘 없지요?
그런데 그 옛날, 지하로 8층이나 만들고,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면서, 로마군인들 한테 잡혀갈까봐... 떨면서도,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서, 지하에서 만명의 성도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였던 전도...
아니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주신 사명인 전도....를 오늘날 잃어버릴 때,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문을 힘을 잃어 버립니다. 문을 닫습니다.
요즈음, 영국교회 전도하지 않습니다.
독일교회 전도하지 않습니다.
네델란드, 프랑스... 전도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요나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41절 보니까..심판때에 니느웨에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사람들을 정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니느웨라면, 이방인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포악한 사람입니다.
그런 니느웨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 시대 사람들을 정죄할수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단 한가지....가장 중요한 자격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할 때, 그 전도를 받아들이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41절 하반절에는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그렇습니다. 니느웨의 사람들은, 요나가 전도할 때, 그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기에,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할줄 모르는 완악한 이 세대 사람들을 향하여, 정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어떻게 전도를 받았는지...궁금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도한 요나의 전도에 대하여, 관심이 않갈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요나는 어떻게 전도하길래....전도의 모델 케이스가 되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가?
그런데 구약의 요나서를 읽어 보면 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나 선지자는 전도의 사명을 싫어하였던 선지자 였습니다.
요나는 전도하기를 부담스러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향하여, 너는 니느웨에 가서 전도하라...고 말씀하시니까...
전도하기 싫어서, 니느웨가 아니라, 정반대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가버리고 맙니다.
전도하기 싫어하고, 전도하라고 하니까..도망치는 요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팽개치면, 팽개칠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풍랑을 만나고, 고생을 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는 두손 두발 다 들고, 울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늦께라도 깨닫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그 사명 감당하도록 만드시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만약,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면, 사명 감당 않하면, 벌을 내리고, 저주를 내릴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교만하고, 그때는 내가 어리섞어서,
그래도 되는줄 알고, 교만하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불신앙을 책하지 않으시고, 연단하십니다. 깨우치십니다.
나중에는 내가 스스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교만하여서, 하나님께서 전도하라고 하니까..도망처 버립니다.
정말 그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선지자로써 자격이 없습니다. 사명자로써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전도의 자리로, 사명의 자리로 가도록 이끄십니다.
풍랑을 일으켜서,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리를 준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자신의 교만과, 불순종을 깨닫고, 기도합니다.
한번만 살려 주십시요.
이번에 한번만 살려주시면,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요나는 회개를 합니다.
3일후에 초스피드로, 물고기가 니느웨로 가서, 요나를 토해 냅니다.
요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니느웨를 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좀 이상한 상황이 발생됩니다.
요나서 3장 3절에는 말씀합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니느웨가 얼마나 큰 성읍이던지, 사람이 걸어서, 이쪽끝에서 저쪽끝까지 가려면, 3일을나 걸립니다.
요즈음 서울 이끝에서 저끝까지 걸어가려면, 3일 걸릴까요?
정리를 하자면, 요나가 니느웨에서 전도할 때,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회개하세요. 하나님을 영접하십시요” 라고 한다면, 시간이 너무너무 많이 걸릴것입니다.
친절하게 전도하는 것 없이, 그냥 직선으로 걷기만 하더라도, 3일이나 걸리는 도시가 니느웨 였습니다.
자 이런 도시에서 요나는 몇일을 전도하였을까요?
한달, 일주일...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말씀합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3일은 커녕, 하루만 전도하고, 종료를 해버렸습니다.
대단히 불성실 합니다. 대충대충입니다. 그냥 걸어만 가고, 이쪽끝에서 저쪽끝까지 완주는 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완주는 커녕, 하루 딱 전하고, 전했다고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전도하기 싫어하고, 이렇게 전도에 무책임한 선지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마, 이 성경구절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과연 요나가 그 하루동안도, 성실하게 전도하였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듣든지 말든지.... 니느웨 성읍은 크든지 말든지...
전도 않하면, 하나님 앞에 죄송하니까.... 전도 했다고 도장만 찍고...하루만 떼우고 끝내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의 불성실 과는 다르게, 니느웨는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왕으로부터, 대신들, 심지어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들에게도 금식을 시키면서,
전국민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요나도 놀랐습니다.
어떻게 누가 소문을 퍼뜨렸는지, 전국민 하나같이,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울며울며 회개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2. 전도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입니다.
전도는 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일부분입니다. 나는 도구일 뿐입니다.
요나가 능력이 대단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대충대충, 건성건성, 마지못해, 듣든지 말든지 전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까... 니느웨의 전국민이 울면서 부르짖어, 회개하는 전도의 역사가 일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의 열매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책임만 감당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하라고 하시니까...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나의 전도가 어떻게 되어서, 어떻게 열매맺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4 에는 말씀하십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사도바울은 전도를 어떻게 하였는가? 지혜의 말과 설득력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나타내심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왜? 요나처럼 전도하기 힘들어 하고, 어려워 합니까? 나의 능력으로 하려고 하니까... 힘들고 부담스럽습니다.
만약 요나가 자기 힘으로, 니느웨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 만나서, 설득하고, 회개시키려 했다면, 과연 몇 명이나 회개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니까... 자신은 책임만 감당하였는데도, 전도의 큰 역사가 나타 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할 책임을 내가 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불성실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전도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골로새서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전도는 기술이 아닙니다.
전도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전도는 영혼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꼭, 함께 같이 가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전도할 때, “하나님...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고, 전도할때 예수님을 힘있게 전할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전도하기를 주저 한다면, 내가 전도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는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없이 전도는 절대로 성공할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 안에서 아들을 삼은 사람이 두명이 있습니다. ‘디모데’와 ‘디도’가,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그런데 두 믿음의 아들들에게 ‘전도’에 대하여서 똑같이 강조를 하였습니다.
디모데를 향하여, 디모데후서 4:5 에는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도를 향하여 디도서 1:3 에는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사도바울은 두 말씀에서 전도에 대하여 똑같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디모데에는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도에게는 ‘이 전도는 내게 맡기신 것이라.’
즉 사도바울은 전도를, 사명과 직무로 이해하였습니다.
전도는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음, 직무와 사명입니다.
직무와 사명을 받은 사람은 무엇으로 평가합니까?
그 직무와 그 사명으로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골에 내려가서 부흥회를 하였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하는데, 한 젊은 아가씨가 울면서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영접합니다. 기특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여,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에, 다시 부흥회를 인도할 기회가 생겨서 시골로 내려갔는데, 우연히 그 아가씨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이제 결혼을 하여,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믿음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떠나고, 예배도 드리지 않고, 남편도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목사님은, 다시 부흥회를 하니까..꼭 남편을 데리고 와서 부흥회에 참석하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그 남편은 커녕, 그 여자도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생각했습니다. 그가 정말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였을 것이고,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고, 또, 그의 가정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쉬운 생각을 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내가 건강한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활력있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라도,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은, 건강하고, 활력있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전도하는 교회는 건강하고 활력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전도를 통하여. 건강한 믿음, 활력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