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장 1절 10절 희망있는 교회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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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희망이 희귀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희망의 삶을 살아갈수 있는가? 에 대하여 9월 한달 동안 살펴 보았습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가장 절망적인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 전하여 주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여리고 도상의 맹인은 예수님을 만났을때, 어떻게 희망의 사람으로 바뀌에 되었는가?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밖으로 튀어 나올때, 믿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희망의 사람이 될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9월달은 마무리 하며, 희망있는 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 에 대하여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라고 똑같은 상황, 똑같은 기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건물이 모두 다 다르듯이, 교회의 상황도 모루 다 다릅니다.
어떤 교회는 희망으로 가득찬 교회가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근심으로 가득찬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활기차게 생활화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풀이 죽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물론 건물로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건물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 오히려 더중요한 것이, 그 교회 건물을 세운 성도들이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후를 따지자면, 교회의 건물은 그 교회의 성도들이 세웠으니, 사실 교회 건물보다가도, 그 교회 성도들이 오히려 더 중요하고, 핵심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핵심은 건물이 아니라, 그 교회의 성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희망이 있으면, 그 교회는 앞으로 희망이 있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희망이 없으면, 그 교회는 앞으로 희망이 없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절에는 희망찬 초대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5절 말씀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희망찬 교회의 모습을보니까...두가지입니다.믿음이 굳건해지고..
그렇습니다. 믿음이 굳건해질때, 그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믿음이 굳건한 희망이 있는 교회는 그 다음을 보니까...수가 날마다 들어가니라...
여기에서 날마다...라고 하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그래프로 그리면, 점점 추세가, 기울기가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절대적인 숫자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백명 있는 교회는 희망있는 교회다 그런것이 아닙니다.
10명이 있더라도, 그 다음을 보니까...11명, 12명...13명...15명. 자꾸 수가 늘어 갑니다.
우이쌰...우이쌰....그러면서 추세가 올라갑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희망이 있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한 5천명 있는 교회가.....5천명 이라면 숫자로는 어마어마 합니다.
그런데 다음에 보니까...천명이 확~~~빠져 나갔습니다.
5천명이 4천명 되고, 4천명이 3천명되고... ‘수가 날마다 줄어가니라’....이러면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주일에, 1백명이 예배드리는 총동원 초청주일로 지키자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다같이 힘쓰고, 그 목표에 동참하는 그 성도는 그 교회의 희망을 열어가는 성도라고 말씀드릴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모든 조건이 좋아서, 희망찬 교회가 되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초대교회는 희망찬 교회를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 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1. 희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초대교회가 희망찬 교회가 되는데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청지기로 세워졌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주인공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디모데가 되겠습니다.
믿음이 굳건하고, 믿음이 신실하고, 믿음이 충직한 성도는 교회를 희망의 교회가 되도록 합니다.
디모데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니까...“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디모데는 사람들 마다, 믿음 좋은 것을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나 혼자서....나는 최고로 멋있어...최고로 봉사를 잘하고, 겸손하고, 믿음이 좋고, 예배도 잘드리고.....그렇게 생각할 지라도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지 않습니다.
“아니 아니....최고로 봉사 잘하는 사람은 아무개 집사님이고,
최고로 겸손한 사람은 아무개 집사님이고..
최고로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은 아무개 집사님이고....“
그러면...나 혼자서는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더라도....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칭찬은 객관성을 띱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 주는 것입니다.
한사람 추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객관적으로 칭찬을 해줄때....
어느정도 그 사람의 믿음,봉사, 겸손,예배의 정도가 얼마인지 객과적으로 알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수님 앞에 칭찬받기 전에, 먼저 주위 교우들에게 칭찬받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디모데가 있으니까...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마음이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디모데를 데리고 가서, 교회에 직분을 맡기면, 교회가 희망찬 교회가 될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디모데를 데리고 가려고 했더니, 유대인이 방해를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찬찬히 가족을 살펴 보았더니,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입니다.그러니까 헬라인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유대인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러니까..결격 사유가 있다고,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럴때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레를 행하여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여 주어서,
유대인들이 지적하는 것을 해결하고, 데리고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할레는 유대인이 되는 통과의례입니다.
유대인 어린이가 성인이 되면, 할례를 받게 하여, 정식 유대인 이라고 인정을 해줍니다.
이방인도 할례를 받게 되면, 정식 유대인이라고 인정을 해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여,정식 유대인이라고 인정을 받도록 하여, 유대인의 방해를 무마시키고,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좋은 일꾼을 세우려면, 방해가 있습니다. 세상의 방해, 생활의 방해, 사탄이 심통을 부리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막는 다고 하는것입니다.
자 이러한 방해를 물리치고 서라도, 교회에 데리고 나와야 하는데,
오늘 말씀보니까...사도바울은 그 일을 지혜롭게 잘 하였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목표는 디모데를 초대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방해에 맞상대 하여, 불란과 대립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믿는데 할례가 무슨 소용인가? 그런 어거지 부리지 말고, 디모데나 빨리 내어 놓으시오...여러분이 뭐라고 해도 나는 디모데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방해의 논리를 잘 꿰뚫어 보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여, 유대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고, 입을 다물게 하고, 자연스럽게 덕스럽게, 디모데를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에 믿음좋은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데, 문제는 덕스럽게 순리대로
하지만 그사람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것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덕스럽고 순리대로 하여서, 분란과 대립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꼭 그 사람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바울은 동네를 다리면서, 믿음이 좋고, 신심이 좋고, 앞으로 큰 일을 감당할 좋은 사람이 보이면, 빠짐없이, 초대교회로 데리고 나올때,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10명, 그다음에는 12명, 그다음에는 15명.. 점점, 날마다, 그래프가 올라가고, 수가 늘어가는 희망찬 교회가 되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바울 처럼 살펴야 하겠습니다. 내 주위에 디모데 같은 사람은 없는가?....
긍정적인 눈으로, 적극적인 눈으로 살펴야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눈으로 보면 디모데는 결격 사유가 있어야 않됩니다.
아버지는 헬라인, 어머니는 dbei인...그러면 반쪽짜리 유대인 이니까...데모데는 않됩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의 눈은 다릅니다. 아버지는 헬라인, 어머니는 유대인 반쪽짜리 유대인이라면, 할례를 받도록 하여서, 온전한 유대인을 만들어서라도, 초대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않되고, 저 사람을 저래서 않되고, 교회에 나와서 천국갈 사람은, 내 주위에는 한 사람 없습니다. 그건 유대인의 눈입니다.
사도바울의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방울의 적극성, 사도바울의 긍정적인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반쪽짜리 결격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듬고 딲아서 온전하게 만들어서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쫓아갈 때 희망찬 교회가 됩니다.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인터넷에 보니까 ‘황당 뉴스’ 라고, ‘가상 뉴스 제목’을 만들것을 보았습니다.
맥아더- 노병은 죽지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
그랬더니 황당뉴스 제목입니다. "맥아더, 죽은 노병 가족들의 아픈 마음, 후벼파다, 구설수"
윌리암 클라크-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황당뉴스 제목은 "클라크박사, 심각한 차별적 발언으로, 전세계 소녀들로부터, 거센 항의가 빗발쳐!"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황당뉴스제목은 "사회적 지도인사의, 막말 파문! 국민에게, 반말을 해도 되는가?"
요즈음 우리사회는, 극단적 생각을, 부추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극단적 대결적 논리로 상황을 몰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용어도 극단적 용어가 난무합니다.
‘헬조선, 흙수저, N포세대...
자조적이고 풍자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과도한 좌절감, 과도한 분노감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좌절감으로 희망을 만들 수 있습니까?
분노감으로 희망을 만들 수 있습니까?
좌절감과 분노감은 상황을 악화시키면 시키지, 절대로 희망을 만들 수 없습니다.
희망은, 냉철한 판단과 신신중하지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대처를 통하여서만, 희망의 문을 열어 졎힐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초대교회에도 막막한 상황, 답답한 위기가 찾아온 것을 보게 됩니다.
6절 말씀을 보니까....“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아시아 지방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니까...방해가 심해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생기지 않습니다.
7절 말씀을 보니까..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바울이 아시아 지방에서 않되니까...그럼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서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그리고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려고 해도, 방해가 심해서, 비두니아 지방으로 갈수가 없습니다.
8절 말씀을 보니까..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그래서, 무시아로 갔다가...그것도 않되어, 드로아로 다시 더 내려 가게 되엇던 것입니다.
자 전도를 하려고 하니까...전도의 문이 너무너무 막힙니다.
아시아 지방부터 시작해서, 무시아로 갔다가, 드로아로 갔다가....계속하여도 방해가 심해서,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 이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만약에, 극단적 부정적 시각을 가진 뉴스라면, 이 상황에 제목을 붙인다면 “아무리 해도 전도의 문 닫혀, 이제 전도는 필요없는 시대. 성도들은 전도할 필요 없어”
극단적 부정적 시각을 가진 뉴스라면, 이정도 전도가 않되면, 이렇게 황당뉴스 제목을 달아도 달았을 것입니다.
전도가 않된다고, 초대교회가 이렇게 쉽게 손을 떼고, 이렇게 쉽게 전도를 그만 두었다면,
어떻게 희망찬 교회, 믿음이 굳건한 교회, 날마나 수가 늘어가는 교회가 될수 있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전도가 않되는 상황을 만날 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믿음의 방법으로 대처하였습니다.
똑같은 것을, 어떤 눈으로 바라 보느냐? 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라늄 덩어리를 볼때, 수석 감정사 들은 무엇을 보겠습니다. 겉모양이 시커멓고 형편 없습니다. 이 돌덩어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우라늄 덩어리를 볼때, 과학자들은 다르게 봅니다. 과학자의눈으로 우랴늄 속에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봅니다.
겉은 시커멓고 볼품 없이만, 이것을 핵발전소에 넣으면 엄청난 에너지가 나옵니다.
겉모습만 보면, 밖에 버려져 쓸데없는 돌덩어리 이지만, 누가 보느냐, 누가 사용하느냐 따라서, 돌덩어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뽑아 내는, 귀한 자원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보느냐? 믿음없이 보느냐?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그렇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6절을 보니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즉 성령님의 역사로 보았습니다.
전도가 않되는 것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그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다른 곳에 있는가 보다....그래서 무시아로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7절,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비두니아로 못가는 것을 예수님의 영....성령님이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잘 될 때는 하나님의 축복을 여기지만
잘 않될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않될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뜻이 다른데 계시는 것은 아닌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8절에 보니까...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계실까? 하나님의 뜻을 찾다가....찾다가..
결국 드로아 까지오게 되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드로아에서 밤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 시키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함을 받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할 때,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렇게 기도 하였습니다.
제일 신령한 기도, 제일 깊은 수준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이 열심히 기도할 때, 밤에 환상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마케도냐 사람이 서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세요.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인근 마을을 다녔습니다. 이마을에 가도 않되고, 저마을에 가도 않되고,
그런데 환상을 보니까...바다 건너편에, 마케도냐 사람이 도와 달라고 합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보통 힘이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를 건너면, 다른 나라에 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터어키에서 전도했는데, 지금 그리스에 가서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전도는 어디까지나 터어키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도는 내가 사는 동네, 내가 사는 이웃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환상을 보니,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가서, 완전히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를 해야 합니다.
정말 생각조차 하지 못한, 역발상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기도하면서, 신중하지만 냉철하게, 적극적이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다 건너에 있다면, 힘들고 험하여도, 바다를 건너겠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바다를 그리스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쫓아서, 바다를 건덜때, 사도바울은 희망찬 초대교회의 새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즉 그 전까지는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사마리아의 교회였습니다.
좀 더 확장되어, 초대교회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도바울이, 바다를 건널때, 초대교회는 그리스 교회, 로마의 교회로 엄청난 대부흥의 역사로 바뀌게 됩니다.
부흥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박해의 시작이 되어 집니다.
로마 황제들이 콜로세움에서 사자들에게 초대교회 성도들을 던져 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립니다.
하지만 그 박해를 믿음으로 이켜 나갈때,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180도 바뀌는 희망의 대역사가 나타나고. 유럽이 기독교 대륙이 되는 희망의 대역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단은, 서구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세장면...
시이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고,
사도바울이 네압볼리 앞바다를 건너고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는
유럽을 유럽이 되게하는, 역사의 위대한 장면으로, 우뚝서게 되어집니다.
희망의 대 역사는 매우 작은 절망의 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희망의 대역사는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사도바울의 시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희망의 대역사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던, 사도바울의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손쉬운 생각으로, 상황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뜻이 있구나.....
하나님의 계획을 쫗아가야 겠다...
믿음의 눈으로, 믿음의 순종으로 상황을 바라볼때, 희망의 대역사는 오늘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희망찬 교회는 성도가 굳건한 믿음위에 서야 합니다.
디모데를 할례를 받게 하여서라도, 초대교회의 사명자로 데리고 왔습니다.
전도가 않될때, 성령님의 뜻을 쫓아서, 바다까지도 건널때, 희망의 대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희망찬 교회를 만들어 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