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어 빌립보1장 6절 14절
2005.07.02 17:08:44 조회5374
빌립보1장 6절 14절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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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전도에 소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길 갈때도 전도하였고, 또 배길이 없어 발이 묶여 있을때도, 전도하였다고 하는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바울이 옥중에 매여 있을때에도 전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매임이라는 것은, 나의 뜻이 제한되는 공간과 시간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수 없습니다. 내 하고 싶은 데로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얽매이는 것을 요즈음 사람들은 아 주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얽어 매는 것이, 법이든, 관습이든, 사람이든, 심지어는 돈이던 간에,....
나를 얽매이게 한다면, 누구라도, 그곳에서 벗어 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얽매임의 반대인, ‘자유’는 오늘의 시대를 대변하는 시대 정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레서 세상의 자유를 가리켜 에릭프롬은, ‘프리덤 프롬’ 즉 무엇으로 부터의 자유...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나의 매임은,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매이게 되었는데...옥게 갖히게 되었는데...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뜻과 목표가 오히려 이루어 지게 되었다고 고백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임은 나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나의 뜻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바울은 자신의 자유와 뜻을 빼앗기는 매임을 당하였는데, 오히려 믿음으로 볼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고,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릭프롬은 이러한 신앙의 자유를 “프리덤 포” 즉 무엇을 위한 자유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의 자유를 더 귀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얽어 맬수 있는 위대한 자유 넘어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바울의 매임은 복음의 진보가 된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 전방에서는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류탄과 자동소총을 이용하여, 평소 같이 지내는 전우들을 8명이나 죽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저지른 군인은, 전혀 뉘우침의 모습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용서할수 없다. 당연한 일이라고 태연하게 말하였더라는 것입니다.
나의 뜻을 꺽게 만들고, 갖은 나쁜 것으로, 나를 얽매이게 하였던 사람들이었기에, 이 군인은 총을 난사하였고, 수류탄을 터트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불의한지 의로운지는 이 병사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나를 얽매이게 하기 때문에...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에...
내가 심판에 중심이 되어서... 그가 가진 총기와 수류탄으로 심판하였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이 병사의 시각으로 살아간다 하겠습니다.
불의함과 의로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 한가지...바로 내가 심판의 기준이 되어, 살아 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귀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심판의 기준이 되어 ,받아 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여기 말고는 다른 교회 없느냐고, 내 기분과, 내 편의 기준이 되어, 받아 들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이 꺽이고, 내 기분이 상하고, 내 권리와 자유가 얽매이면, 분노하고, 화를 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전도한다는 것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화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준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움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복음이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옥에 잡혀서, 채찍을 맞습니다. 갖은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하고 나쁩니다.
그런데 나의 옥중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이 찾아와서 안부를 묻습니다. 빌리보 교인들이 힘을 합하여 사도바울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래서 일의 결국은, 복음이 오히려 굳건하게 되고, 교회가 든든하게 되는 개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이 전하여 지는 것을 위하여서는 나의 매임도 기뻐한다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살펴보면, 아직도 내가 나의 중심에 서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옆에 서 게시게 만들고, 내가 중심에 서 있을 때, 예수님은 역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기도합니다.
“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님을 중심에 모실 때,
사랑과 지식과 모든 총명함이 풍성하게 되어 집니다.
정말 선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의의 열매로 가득한 삶을 살수 있게 되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실 때, 얽매임을 넘어서는 자유의 삶이 펼쳐지게 되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매일 때, 예수님을 신뢰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옥중에서도 감사합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또 말씀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바울은 나를 얽어매는, 유형 무형의 속박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 보았기 때문에,
나의 속에 착한일을 시작하신이가...그 날까지, 아름답게 열매맺게 이루실줄 확신한다고 하는 소망을 붙잡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소망과 절망은 종인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집값이 너무 뛰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는 신문기사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땅을 팔면, 캐나다를, 그 넓은 캐나다를 여섯 번 살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밥먹을때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민족으로 축복이라는, 과학자의 말은, 모든 것이 가능성에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하겠습니다.
요셉이 옥중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다 보니, 그만 주인집 아주머니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요셉의 용모와 지혜 있음을 보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이것은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사람으로써, 불의한 일이라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모함을 받아, 살아서는 나올수 없는 왕의 감옥에 갖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신앙은 옥중에서 더 빛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언약의 꿈을 주신 하나님을 붙잡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테스트가 없는 영광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댓가를 치루지 않고 쉽게 얻은 것으로, 쉽게 잃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묻습니다.
\"학생 이 지하철 기름으로 가는거 맞지? 기름으로 가는거 아냐? \"
당황한 학생이 말합니다.
\"아니요. 전기로 가는 데요.. 이 전철은 전기로 갑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놀랍니다. ‘아니 이 전철이 전기로 간다고?’ 그리고 후다닥 내립니다.
거참 별난 아저씨도 다 있네..전철이 출발하고 다음역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다음 역은 길음, 길음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그제서야 이 학생은 실수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학생처럼 누구나 시련은 있습니다. 실수 할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때 일수록,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얽매임이 시련이 아니라, 연단이 되게 하셔서, 나를 정금 같이 나오도록,
착한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바울의 매임으로 빌립보 교인들이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얽매임은 토픽이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빌립보 교인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찾옵니다.
그리고 바울을 위하여 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빌립보 교회의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럴때 사도바울은 자신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에 능력이 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 원한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한 소년이 어릴때, 다리를 다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서 다리를 끊어내고, 긴 의족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라면서 아이들이 놀립니다.
그래서 이 소년은 항상 그 의족이 원망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커서 이 소년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인관습을 지키는 원주민에게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여러명에 선교사가 이 식인부족에게 잡혀서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서운 원주민들이 이 선교사를 결박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죽음의 위기에서, 한가지 묘안을 떠오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내가 다리를 드릴테니, 먹으시오...그 다음에는 내 팔도 드리겠오...”
원주민들은 이 선교사가 주는 플라스틱 의족을 쌂아서 먹다가, 못먹고, 두려워 하면서, 선교사에게 의족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죽지않는 몸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지면서, 이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의 사고는 개인에 고통이지만, 신앙안에서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원주민 전체가 은혜받는 통로로 사용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매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가치가 변화되어 집니다.
매임은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공동체의 영역인 것입니다.
믿음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매임을 바라볼때, 그속에서 복음의 진보가 나타나게 됩니다.
매임은 분노와 분냄의 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더욱더 세워 나가는 통로가 되어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임은 나누고, 기도하고, 말씀을 바라보는 창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매임이 소멸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임을 통하여, 오히려 세상을 이기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매임이 사라진다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나의 의가 되어, 살아갈때에,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온전히 이루는 통로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노라 고백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