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11절 13절 나는 죄인 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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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기를 보내면서 매일매일 골고다 언덕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오늘 설교말씀은 “나는 죄인 입니까?” 라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본문에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죄인’ 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패러독스, 역설이 아닐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을 찾아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을 보면, 죄인은 적고, 의인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자각하는 사람은 찾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로 가득합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라고 하기보다는 ‘다른 연유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 것을 흔히 듣게 됩니다.
분명,.. 내가 죄의 상황중에, 놓여 있음은 인정합니다.
나에게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 합니다.
하지만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이요, 죄에 감염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네가 선악과를 먹었느냐?”
“먹었지만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내가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하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여자를 탓합니다.
뱀을 탓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습니다.
죄에 감염되어, 죄에 빠질 때,
스스로를 죄인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죄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도 죄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을 탓 합니다.
이것이 죄인임을 자각하지 않는, 죄인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 바리새인은 죄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보시고,‘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집에 모셔 드립니다.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마태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팩트채크’를 하자면, 마태의 직업인 세리는, 오늘날 세무 공무원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둘 때, 오늘날과 같이 컴퓨터 전산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충 거둘수 밖게 없습니다. 편리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청하는 유대인에게, 돗내기로 할당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50억의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바칠 사람을 구합니다.
그러면,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신청을 하고, 세리가 됩니다.
자 이렇게 세리가 된 사람은, 그 마을에서, 50억만 거두어 바치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60억도 거둘수 있으면 거두고, 70억도 거둘수 있으면 거둡니다.
거둔것 중에 50억만 로마에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가 꿀꺽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리들은 악착같이,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세금이라고 돈을 뜯어 갑니다.
로마에 바치는 할당량 보다가, 자기가 꿀꺽 하는 돈이 더 많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유대인들은 로마사람들 보다가, 같은 민족이지만, 세리를 더 싫어 합니다.
그래서 세리를 죄인으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그런데..예수님이 세리를 제자로 부르고, 예수님이 죄인인 세리의 집에 들어가니까...
바리새인은....예수님은 왜 죄인과 어울리고, 죄인과 함께 하십니까?
불평과 의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질문이 이해가 않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요,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요,
세리는 부패한 관리입니다.
세리 때문에 힘들고, 고생하고, 괴로워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결과 바리새인은 세리를 죄인이라고 정죄 하였습니다.
같이 어울리는 사람도 죄인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그 옆에 있으니까... 죄인이 되려고 하십니까? 정죄 하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태와 비슷한 사람을 가끔씩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주위에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끼칩니다.
그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자 이런 마태와 같은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장 4절에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당연히 의인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찾아내기 까지 찾으시는 사랑의 마음을 말씀 합니다.
의인 구십 아홉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죄인 한명이 회개하여 의인이 될 때, 기뻐하고 기뻐하신다고 말씀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죄악의 상태에 있는 죄인의 죄된 현재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의 상태에 있는 죄인이, 그 죄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미래의 의인된 모습을 보시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사랑의 눈으로 바라 보십니다.
십자가의 눈으로 죄인을 바라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의 집에 들어가시고, 마태의 집에 있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8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깨끗하고, 죄가 없고,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 죄인 이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나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본래부터 의인이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본래부터 죄와 관계 없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은, 마태를 볼 때, 무슨 눈으로 본 것입니까?
의인된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죄인 이면서도, 그 죄를 자각하지 못하고...죄 중의 눈으로, 죄인을 본 것이요..
더 나가서, 그 죄의 눈으로 예수님까지 바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 눈은 나의 죄를 자각하고 죄인됨을 고백하는 눈이 아니요,
교만한 눈이요,
정죄하는 눈이요,
불평과 불만의 눈이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도, 성삼위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판단하고 불만과 불평을 할수 밖게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기에 매일매일 골고다의 십자가를 바라 보자고 합니다만,
죄의 눈을 가지가 바라 보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판단과 정죄와 불평과 불만만 나올수 밖게 없습니다.
2. 그렇다며 어떤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합니까?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어떤 할아버지가, 단골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물건을 사서 나오다가, 장난기가 발동을 하여, 계산대 직원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가씨, 내가 몇 살로 보입니까?”
계산대 직원이 말합니다. “40대 후반으로 보입니다.”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내가 그렇게 젊게 보입니까?”
계산대 직원이 말합니다. “우리가게는, 단골손님에게 40% 활인을 해 드립니다. 당연히 40% 활인해서 보니까, 40대 후반입니다. 계산이 맞지요? ”
활인해서 보아서, 젊게 봐 주었습니다.
미국에 가면 ‘매노 나이트’ ‘맨노파’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철저하게, 죄와 접촉하지 않기 위하여, 힘쓰며 살아갑니다.
입는것, 먹는것, 생활하는 것,...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철저하게 죄의 요소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입는 옷이, 사람에 마음을 자극하여 죄에 빠지게 할까봐, 옷도 수수한 16세기 옛날 옷을 그대로 입고 살아갑니다.
자동차를 타면...점점 더 편한 것을 추구하고 나태하게 될까봐, 자동차를 타지 않습니다.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닙니다.
경운기 트랙터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소가 끄는 쟁기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습니다.
전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등 대신, 가스등을 사용합니다.
냉장고도 전기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스를 사용하여 얼음을 만들고, 음식물을 보관합니다.
욕심 나게 만들고, 태만하게 만들고, 죄에 빠지게 될까봐...철저하게 현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늘날도 16세기의 생활방식, 생활모습으로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죄와 접촉하지 않고 옛날 방식으로 살아가면, 죄가 나에게 않들어 옵니까?
심지어는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을 만들고, 죄짓는 일은 아예 하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정말 죄와는 상관없이 깨끗하게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까?
바리새인은 죄를 멀리하고, 세리와 가까이 하지 않으면,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자신은 깨끗하고, 마태는 죄인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합니까? 죄와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교만한 자요, 죄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요,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죄중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마태는 어떠합니까?
죄인이 맞습니다. 스스로도 다른사람에게도 손가락질받는 죄인으로 인정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다음 변화가 생겼습니다.
병든자가 의원에게 치료를 받듯이
마태를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십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마태는 세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생활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바로 마태의 자서전적 고백입니다.
마태가 쓴 마태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마태는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가 고마워..
예수님을 잊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기록하였습니다.
4복음서 가운데, 제일 첫 번째 복음서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자신을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자신이 죄인 아니라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절대적으로 죄인 이었는데,
자신은 바리새인에게도 손가락질 당하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은혜는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만 높혀 드리는, ‘복음의 죄인’의 되었습니다.
출발은 죄인이었지만, 그 끝은 ‘죄 중의 죄인’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죄인’..예수님의 제자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었던, 마태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병든자가 의원을 갈급하듯,
마태가 예수님을 갈급하는...바로 그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야고보서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사실.... 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스스로가 제일 잘 압니다.
어제까지는 거뜬 했는데, 요즘 들어와서 허리가 아픈것 같습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코가 맹맹한데,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해도, 자기 스스로는 자기의 몸 상태를 제일 잘 압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러한 죄 중에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스스로 제일 잘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자각, 회개하는 마음이 있을때,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일 어리섞은 것은, 스스로 속이고, 스스로 나는 죄가 없다고 자만하고
예수님을 찾지않고, 세상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경건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언행은 재갈물리지 아니하면...,
재갈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부리기 위하여, 말의 입에 물리는 막대입니다.
이 재갈에 고삐를 연결하여, 말에 탄 사람이 당길 때,
말은 자기 맘대로가 아니라, 말에 탄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집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한 사람은, 말을 할 때, 내 맘대로 말을 해서는 않됩니다.
예수님이 원하는대로, 말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는대로 말과 행을 하는, 그것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경건한 행동이 있습니다.
분명히 상스러운 말이 있고, 경망스러운 행동이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가 경건한 목소리 입니까? 내가 스스로 제일 잘 압니다.
어떤 행동이 경건한 행동입니까? 내가 스스로 제일 잘 압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따를 때,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님께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스스로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복음의 전달자가 되고, 복음의 기록자가 되고,
복음의 사람, 진정한 의인으로 완성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나는 교만한 의인입니까? 아니면 갈급한 죄인 입니까?
골고다의 십자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바리새인은 의인이라고 하면서 죄중에서 살아 갔습니다.
마태는 죄인이었지만, 의인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순절기, 마태의 변화를 나의 변화로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