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장 35절 41절 튼튼한 감사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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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좋은 일이 나에게 생기는 1회적 요행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컴뮤이케이션입니다.
감사는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어 갑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볼때는 불평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는 과정임을 알게 될 때, 육체의 가시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실제적인 감사생활’에 대하여, 살펴 보려고 합니다.
1. 감사하는 사람은 요동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 3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을 전하여 주십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돌밭에 떨어집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밑에 떨어집니다. 더러는 길에 떨어집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집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의 뜻도 다 설명해 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등불비유, 겨자씨 비유...를 계속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너무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천국을 맛보는 것 같습니다.
믿음생활 정말 잘 해야 되겠다는 다짐이 저절로 됩니다.
너무너무 재미가 있고, 너무너무 은혜가 있으니까...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하지만 벌써 어두워져 저녁이 되었습니다.
날이 저물게 되니까..예수님께서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배를 몰아서, 건너편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셔서 피곤하신지, 어느틈엔가 곤히 주무십니다.
딱~ 이장면만 보면, 100점 만점에 100점 상황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루종일 좋은 말씀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은혜가 충만하여, 배를 몰고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위에서 곤히 주무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서 장면이 홖~~ 바뀝니다.
바람이 좀 쎄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풍랑이 일렁일렁 합니다.
곧 배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파도가 막~ 배안으로 넘어 들어 옵니다.
그러자 정신이 없습니다.
바람은 불고, 어디가 앞인지 분간이 않되고... 배 안에는 물이 가득차 있습니다.
이때, 38절 말씀 보니까..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배개를 배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배 고물이라 함은, 배의 선미, 배의 뒤쪽 부분이 되겠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 나이까”
자 이 말을 들여다 보면, ‘선생님’ 이란 말만 빼면, 엄청난 원망과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죽게 되었는데...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잠만 주무시고, 너무하십니다. ” 이런 글자만 않들어 있지,
제자들의 원망, 혼란, 불안을 고스란히 느낄수 있는 말이 아닐수 없습니다.
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하루종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자라나고, 깊어지고 성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풍랑을 만나니까, 그 믿음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원망과 근심 걱정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믿음이 충만하였다가, 원망이 충만하였다...왔다 갔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상태에서 오늘 본문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제자들이 감사하는 장면은 도무지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급하게 깨어나셔서,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해 주셨습니다.
풍랑 때문에 원망 근심 걱정이 생겼는데, 그렇다면,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해 주셨으니, 이제는 제자들이 감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41절에 보면, 제자들은 얼이 빠져서, 멍~하게 예수님을 보면서 말합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말씀들을 때는 은혜롭다고 기분이 좋아 하다가, 풍랑을 만나니까 이번에는 갖은 원망과 불안과 근심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제자들...과연 믿음이 깊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40절 하반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왔다 갔다 하는 믿음, 요동하는 믿음은 감사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방금전에는 하늘을 찌를듯 합니다.
기도하면 하늘에서 불도 비도, 떨어뜨리를 것 같은, 기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무슨일을 만나면, 어쩔줄을 몰라 합니다. 원망 불안 근심 걱정...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오히려 더 불안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 7절에는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학생들이 말하는, 유머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장군이, 산에 올라갔다가, 이산이 아닌가 벼~~
그리고 옆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서는, 아까 그 산인가 벼~~ 라고 했답니다.
만약,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이렇게 결정이 왔다갔다 하고, 작전이 왔다갔다 하고, 감정이 왔다갔다 하면...
부하들의 신뢰를... 얻을수 있겠습니까? 따르는 부하들이 오히려 불안 합니다.
어떤 집안에 아버지가 결정이 왔다갔다 하고, 어머니의 감정이 왔다갔다 하면...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리학적으로, 어릴 때, 부모님이 과도하게, 작은일에 즉각즉각 반응을 하게 되면, 그 아이는, 결정장애, 불안장애의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고 합니다.
작은 일에도, 너무 과도하게.. 아빠 엄마가 감정적으로나, 결정이 왔다갔다 하면, 아이는 어떻게 대처 해야할지 힘들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는, 세상은 이렇게 불안한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인식하고, 그 아이의 정서에는 불안이 자리를 잡게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제자들은 방금전까지 은혜받고 기분좋다가, 풍랑을 만나니까..
이번에는 거꾸로 어쩔줄을 모르고, 근심, 원망으로 예수님을 바라 볼 때..
감사가 절대로 일을수가 없고, 불안과 혼란만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라고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요동하는 그리스도인은 감사생활이 사라지게 됩니다.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근심 걱정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요동하지 않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을 나의 반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아버지는 불 끄고 글씨 쓸수 있어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물론이지. 아버지는 전등을 끄고, 깜깜해도.. 글씨를 쓸수 있단다”
아이가 말합니다.
“아버지 그럼 불 끄고, 여기... 성적표에 싸인 좀 해 주세요”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겪은 풍랑은, 물론 적은 일은 아닙니다.
풍랑이 불어서, 배가 가라앉으면, 보통 사고가 아닙니다.
하지만,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제자들 너무 과도하게 요동하였음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베드로 안드래 야고보 요한, 모두 갈릴리에서 어릴 때부터, 배를 몰고, 고기를 잡던, 어부들 입니다.
배에 대하여서는, 일가견이 있던 분들 입니다.
또한, 바로 뒤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자, 배를 모는데 전문가 들이, 여러명 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분하게 대처를 한다면, 풍랑이 그렇게 겁낼 일 만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자들은, 풍랑만 볼줄 알았지,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서, 침착하게 대처하기 보다는, 요동하고 원망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생활 속에서 어떤 일을 만날 때, 그 일만 바라보고, 정작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못보고, 잊어버릴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일만 바라보고, 과도하게 요동하고 원망하면서, 감사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지금 나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생활하고 있으십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사울왕이 나옵니다.
사울왕은 제비뽑기를 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제비뽑기를 하여 왕이 되었다면, 요즘으로 치면, 로또에 당첨 된 것으로 비유를 해 볼수 있을까요? 정말 이만저만 행운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혀 준비도 없고, 생각도 없다가, 엄청난 행운을 만나고 나니까...그 행운을 감당할 줄을 모릅니다.
사울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왔다갔다 합니다.
블레셋이 처들어 오니까...어쩔줄을 모릅니다. 마음이 급하다고 스스로 예배를 주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다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스스로 좋은 물건은 따로 남겨 둡니다.
심지어는 충성된 신하인 다윗이, 샘이 난다고, 창으로 다윗을 찔러 죽이려고 합니다.
훌륭한 신하를 잘 거두면, 나라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왕이 그릇이 않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 한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엔돌에 신접한 박수 무당에게 찾아가서 초혼을 합니다. 죽었던 사람을 불러 내려고 합니다.
이쯤 되니까, 옆에서 지켜보는 신하들이 더 불안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덕스러움과 감정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수 있겠습니까?
결국에는 길보아 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한편 다윗은 반대입니다.
행운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일 낮은 양치기에서 시작합니다.
일반 병졸로 전쟁에 참가 합니다.
사울왕의 미움을 받아서, 도망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고난이라는 고난은 모두 당합니다.
억울한 일이란 일은, 모두 당합니다.
이렇게 일이 않풀릴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다윗은, 고난과 억울한 일을 바라보고, 원망하고 근심하고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편 62편 1절 2절
다윗은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풍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반석되신 하나님을 바라 줄 알았습니다.
그럴 때, 차곡차곡 능력이 쌓여지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능력, 다스리는 능력,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능력이 점점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왕이 되자, 절대로 요동하지 않습니다.
적군이 처들어 와도, 전혀 요동하지 않습니다. 착착 작전을 세워서 기도하면서 대처를 합니다.
임금님이 흔들리지 않으니까...나라가 평안합니다.
다윗왕이 왔다갔다 하지 않고 중심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니까..
신하들도 자기맡은 자리에서 일을 척척~ 합니다.
나라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나라가 튼튼하게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감사할일 하나도 없고, 걱정꺼리만 있습니다.
나는 되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에도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 나에 옆에서,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풍랑만 바라보고 계십니까?
제자들 처럼, 풍랑만 바라보면, 혼란속에 살아갈수 밖에 없습니다.
사울왕 처럼, 행운만 바라보면, 생겨도 요동하여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윗처럼,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때에, 튼튼한 감사의 역사가, 나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래성은 하루 정도만 하면, 잘 만들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도가 한번 왔다가 가면, 금방 무너지게 됩니다.
파도가 아니라 풍랑에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성은 하루만에 절대로 지을수 없습니다.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벽을 튼튼히 세워야 합니다. 지붕을 튼튼히 올려야 합니다.
그럴 때, 비, 바람, 풍랑에 요동하지 않는, 튼튼한 집을 세울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튼튼한 감사의 인생은 어떻게 세울수 있겠습니까?
한번 요행으로 세울수 없습니다.
왔다갔다 하는 믿음으로는 절대로 세울수가 없습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요동하지 않는 믿음으로 꾸준하게, 차곡차곡 세워 나갈 때,
비로서 튼튼하게 감사의 인생을 세울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요동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감정이 요동하고, 생각이 요동하고, 믿음이 요동할 때, 감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요행은 감사가 아닙니다. 요행으로는 아무것도 세울수 없습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과정으로 준비할 때, 차곡차곡...튼튼한 감사를 세울 수 있습니다.
비, 바람, 풍랑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감사의 삶을 세워나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