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장 4절 15절 은혜의 통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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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달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달’로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믿음이 깊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은, 믿음이 건강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건강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영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몸만 건강한 것이 아니라, 생각도 건강하고, 영혼도 건강하여, 나의 전 존재가 건강할때만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있게 됩니다.
‘화이트 해드’ 라는 말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희긋희긋 해져서, 머리가 하얗게 될 때, ‘화이트 해드’ 라고 하지요.
하지만 철학자 중에도 ‘화이트 해드’라는 이름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화이트 해드는, 과정철학으로 유명합니다.
좀 어렵습니다만, 가을입니다. 깊이 사색하고, 말씀을 가지고 깊이 묵상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화이트 해드의 과정철학은, 간단히 설명을 드리면,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근대에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을 통하여, 모든 존재가 단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은총을 향하여, 조화롭게 변화되어가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화이트 해드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을 더 발전 시켰습니다.
만유는 서로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변화 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 이런 철학자들의 주장은, 우리 생활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질문에서... 시작된 주제입니다.
자, 나는 무엇이, 나 입니까?
사람의 몸은, 여러지체가 하나가 되어 온전한 ‘나’를 이룹니다.
건강한 사람은, 피가 건강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뼈가 건강 합니다.
그런데 피를 만드는 조혈세포, 혈세포는 20일 30일만 되면, 다 새롭게 교체가 되어, 배출 됩니다.
간세포도 20일 30일만 되면, 다 새롭게 교체가 되어, 배출 됩니다.
사람의 몸을 이루는, 세포의 주기는, 거의가 한달 정도가 되면, 모두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습니다.
어릴 때, 나의 세포는 지금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 세포가 다 없어졌다고, ‘내가 없어졌다’고 하는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멀쩡하고 있는데...내가 사라지다니요..
어릴 때 내가.. 크고 자라서, 지금의 내가 되어 있습니다.
바로 과정입니다.
어릴 때 나의 모든 것은, 분명 사라지고 없습니다. 어릴 때 머리카락, 어릴 때 뼈, 어릴 때 피부는 벌써 없어졌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나의 과정은, 점점 성장하고 자라나서, 어릴때의 나는 사라졌지만, 어른의 나로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1. 온전히 자라고 있습니까?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어릴 때, 나의 세포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릴 때, 나의 세포가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는 이러한 변화를 주장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고, 말씀 합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만유’라는 단어는, 한문으로 ‘만만’ ‘있을 유’입니다. 모든 존재,
만유의 아버지는, 하나님 이시요,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않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않변한다고 생각할 뿐이지, 어제의 그 존재는 다시는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시간도 변화 합니다.
모습도 변화 합니다.
존재도 변화 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에는 방향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좋게 변화 하기도 하지만, 나쁘게 변화 할수도 있습니다.
성장할수도 있지만, 퇴보 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15절 하반절에는 말씀합니다.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저는 지금도 가끔씩 어릴때의 기억이 떠 오릅니다.
그 중에 하나는, 초등학생 때, 이빨이 흔들려서, 아버지가 이빨을 뽑아 주시는데, 얼마나 아프고 무서운지...
지금은 치과에 가서 이빨을 뽑지만, 옛날에는 집에서 다 실로 묶어서, 흔들리는 이빨을 뽑았지요..
이빨에 실을 묶어서 잡아 당기는데, 이빨이 않뽑힙니다. 도리어 실은 끊어지고..입에는 피가 납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이빨을 않뽑고 놓으두면, 덧니가 되지요. 유치는 뽑아야 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고 하니...좋은 결과는, ‘편안한 과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를 죄를 사하려,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부활의 산 소망이 되시려고, 죽음의 자리에 내려 가셨습니다.
좋은 결과를 위하여, ‘기도의 과정’이 필요하였고, ‘오래참음’의 과정이 필요하였고, 하나님을 붙잡는 과정이 필요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기도의 과정, 인내의 과정, 성숙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말씀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일과 아는 일을 힘쓰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기도하기가 힘이 드십니까? 나의 기도가 자라고 있는 증거입니다.
성경보기가 힘이 들고, 봉사하기가 힘들고, 예배드리기가 힘이 든다면.. 오히려 땀을 딲으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자라는 과정을,...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힘들다고, 그 과정을 않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과정이 어렵다고,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온갖 교훈, 세상의 풍조에 밀려,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를 벗어 버릴수 없게 됩니다. 믿음이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결과가 나올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과정속에 있으면, 그 사람은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순례자인 것입니다.
자 이 고백이 바로, 사도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무엇을 이루엇다고, 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믿음의 과정 속에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2. 그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유머입니다.
무신론자 찾아와서 말합니다.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를, 하나라도 보여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혹시 성경을 읽어 보셨나요? ”... “아니요”
“그러면, 혹시 신학 서적은 읽어 보셨나요? ”... “아니요”
“그러면, 혹시 신앙 서적은 읽어 보셨나요? ”...“아니요.. 난 그런 책은, 절대로 않 읽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무신론 자가 아니라, 무식 론자입니다.”
믿음이 깊어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는, 사탄의 유혹도 있지만, 내면의 나태함이 영향을 끼칠때가 있습니다.
오늘 분문에, 만유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7절에 말씀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가 건강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가 지혜롭습니다. 리더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물은, 내가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선물을 통하여, 더 큰 은혜를 받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더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요 사명입니다.
11절에 말씀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은, 사도의 직분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전하는 자의 직분을 주십니다.
목사의 직분을 주십니다. 교사의 직분을 주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로와 집사와 권사와 찬양대와, 선교회와 부서와,.. 여러 사명과 직분을 맡겨 주십니다.
그런데 그 직분이 과정이 아니고, 목표가 될 때, 문제가 발생이 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하루는 자신을 돌아볼 때, 자신에게 주신것이 너무너무 않좋게 보이고, 별볼이 없고, 심지어는 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건강의 은사를 주시고, 직분도 주시고, 복도 주시고..
나에게는 건강도 않주시고, 직분도 않주시고...복도 않주시고..
하지만, 사도바울은 기도 하나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 번 작정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너무너무 않좋고, 이건 ‘사탄의 가시’입니다. 이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십시요..
사도바울도 참 그렇지요. 얼마나 그것을 나쁘게 바라 보았으면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 하였겠 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이 바꾸어 달라고 하는 ‘육체의 가시’ 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셨는가? 아닙니다. 그대로 하라고 두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에게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사도바울은 이때부터, 크게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고,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이것을 주셨으니,
내가 이것을 품고 겸손하게 살아가면,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머무는,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갈수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예수님의 능력이 온전히 머무는 사람을 향하여, 나가는 과정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육체의 가시가,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라, 은혜의 통로 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은사는 직분을 잘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직분은 예수님을 뜻을 잘 받들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은사와 직분은 통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12절에 말씀 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문제를 일으키는 연애인이나, 운동선수들이 있습니다.
재능이 자기 것인줄 착각하다가 보니..
그 재능을 잘 사용할줄 모르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내가 받은 재능과 건강과 생명이 있습니다.
나의 것인 줄 착각을 하고 살아가다 보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귀한 직분을 받은 사람이, 문재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목표가 되다 보니, 선거때만 되면 출마를 합니다.
학력을 위조하고, 상대방을 비방하고...
국회의원이 목표가 되니까..과정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파렴치한 행동을 합니다.
어렵게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국회의원의 직을, 한번 누려보자...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자리라는 것을 잊어 버리니까, 자기를 생각하하고 물의를 일으킵니다.
집사는 왜 이렇게 작게 느껴질까? 혹시 그렇게 생각 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이 한달란트 같은 직분, 땅에 파뭍어 버리고, 잊어 버렸다가...
연말이 되면, 다시 꺼내어서 기억을 하자....나도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목사와 장로가 목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직분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과정일 뿐입니다.
야고보서 3장 1절에는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직분은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직분은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과정입니다. 그 봉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직분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그 직분은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직분을 맡았지만, 그 직분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직분은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불평불만 하는 통로, 불신앙의 통로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소유적 자기 만족적,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
예수님을 향하여 나가는 ‘은혜의 통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힘차게 과정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옛사람은 뒤로하고, 날로 새로워 집니다.
항상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 과정은 목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과정이 목표가 되면, 나는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만나는...과정, 은혜의 통로로 살아갈 때,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자 이믿음으로 살아가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