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29절 예수님을 바라보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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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배풀고 있었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물세례는 ‘예식’입니다.
물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성도로써 입회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물로 머리를 감습니다.
머리를 감을때는, 머리를 숙이고 샴푸를 칠하고, 골고루 손으로 비빕니다. 그리고 샤워기로 머리에 물을 붙습니다.
그러면 머리에 있던 비듬과 기름과 더러운 때가 씻겨지고 머리카락이 깨끗해 집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매일 아침마다 머리를 감을 때, 나의 죄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아무리 머리를 감아도 비듬과 때는 씻어 내려가도, 죄가 씻겨 내려가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나의 죄를 씻고 싶다고, 아무리 머리에 물을 부어도, 죄는 절대로 씻겨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죄가 쉽게 씻겨 진다면, 아마 텔레비전에, 광고가 벌써 나왔을 것입니다.
한꺼번에 죄를 싹~ 씻어 줍니다. ‘죄씻는 샴푸~~’
이런 연고로, 유대인들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도 없었고, 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물로 뒤집어 쓰고, 세례라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세례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앞에 보내니 그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고 하였는데
“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요,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의 오실길을 곧게 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이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계의 세례를 베풀겠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계의 세례를 배푼단다.~~”
죄를 씻는 세례를 베푼다고 하니까..사람들이 구름때 처럼, 모여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어떻게, 죄게 씻겨 내려가는, 세례를 베풀 수 있었습니까?
바리세인들이 찾아와서,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럴 때 세례요한이 찬찬히 대답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무슨 말씀 입니까?
나는 그가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먼저 물로 세례를 베푸는데
이제 곧 그분이 오시면, 그분은 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서,
세례가 완전하게 되게하여 주실 것이다.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를 불세례는, 거룩한 세례요, 나의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지는 세례요,
천국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세례 입니다.
세례는 바로 이, 물세례와 불세례 이 두가지가 같이 되어서, 완성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교회에서 물로 베푸는, 성예식 세례를 베풀고,
동시에 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님 앞에 진실된 믿음으로 간절하게 기다릴 때
예수님께서 성령세례, 불세례를 통하여, 진정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인처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바리새 인들에게 하고 난 이틑날...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르키면서, 사람들에게 말 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 나는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 보고 있습니까?
세례요한의 세례를 정말 완성시켜 주실 분...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분을 드디어 만나고...
세례요한은 너무너무 은혜를 받고 감격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소리첬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자, 우리는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을 바라 보고 있습니까?
세상죄를 지고, 나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왜 이말씀을 드리는고 하니...당시 유대인들도 세례요한의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얼마 후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모습에 유대인들이 너무너무 실망이 됩니다.
아니~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면.. 최소한 황금마차는 아니더라도, 큼지막한 말이 끄는 멋잇는 마차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 것인 아닐까?
어떻게, 세상죄를 지고 가는, 최고로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이,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실까?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중에 사람을 부르십니다.
마태를 부르십니다.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분노를 합니다.
세상죄를 지고 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저렇게 죄인들과 어울리고, 세리를 부르시는 것인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고개를 돌립니다.
예수님은 정말 이해가 않됩니다.
예수님은 내스타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 하고는 코드가 틀린것 같애요..
그리고, 예수님을 점점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 두사람...심지어는 와르르~ 예수님을 떠나 갑니다.
성경에 보면 심지어는 오병이어 직후에, 사람들이 밀물 빠지듯이 예수님을 떠나 가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개를 돌려서 질문을 합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 려느냐?”
지금, 죄를 씻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당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입니다.
“예수님, 어떻게 든지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십시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매어 달려도 부족한데...
오히려 뒤 바뀌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펴보고,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고..
“예수님은 않되겠어~ ”
“내가 예수님을 버려야 되겠어..”
그러면서,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자, 오늘날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루에 몇 번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러 보십니까?
예수님을 바라 볼때에, 나의 죄를 지고 가시는 분, 나를 구원하실 분으로 바라 보십니까?
아니면, 예수님 정말 이해가 않되요~
예수님 그건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죠~
예수님을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러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펴보고,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고...그러지는 않으십니까?
바라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라보는 것은 간절함이 들어 있습니다. 올려다 보는 것입니다. 나의 주로, 나의 구주로, 나의 산성, 나의 방패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펴보는 것은, 오히려 내가 주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여차하면, 이건 이렇게 해야 좋습니다. ~ 오히려 예수님을 가르켜 드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걸로 하시지요.~ 오히려 예수님께 한수 가르쳐 드릴려고 합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잘못 되었고, 예수님은 틀리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감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하고 같이 가실 분이 아니라고 판단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책 잡아서, 꼬투리를 삼아서, 예수님을 붙잡고,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 버렸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밤새 예수님을 두둘겨 팹니다.
로마군병들이 주먹질을 하고, 채찍으로 때리고,...예수님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됩니다. 나중에는 인사불성이 됩니다.
로마군인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에 머리에 씨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끌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면류관 때문에 피가 뚝뚝 흐르고, 온몸이 피멍과 살이 찢어져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쩔뚝쩔뚝 끌려나와 섰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들에게 외첬습니다.
“보라, 너희의 왕이로다”
예수님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이렇게 버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처음에 그 젊고 온화하고 활기차게,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모습..
이제는 피투성이가 되어, 가시면류관을 쓰고 조롱받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자 가시관을 쓰고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지금 마음속으로 상상하면서,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예수님으로, 보이 십니까?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너희의 왕’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한명의 죄수로, 보이십니까?
유대인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시면류관 쓴 예수님을 바라보고는 모두 한목소리로 소리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밖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우리의 왕은, 로마의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유대인들은, 모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 버리기, 참 쉽습니다.
내 마음에 않들어서 버립니다.
다른 것이 더 좋아 보여, 예수님을 버립니다.
세련되게 않보여서 예수님을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않보기 때문에..
내 마음에 않들면,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 오늘 우리는, 당시 유대인과 같이, 빌라도와 같은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서는 않되겠습니다.
세례요한 처럼,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나를 바라 보십니다.
할머니 세분이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 한테 진찰을 받았습니다.
첫 번재 할머니가 말합니다. “난 요즈음 건망증 때문에 심각해요. 걸어가다 서기만 하면, 이쪽으로 가야 하는지, 저쪽으로 가야 하는지 헷갈릴때가 있어요”
두 번째 할머니가 말합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난 앉기만 하면, 누워야 할지, 일어서야 할지, 헷갈려서 힘들어요”
세 번째, 제일 나이 많은 할머니가 말합니다. “다들 젊은 나이에, 건망증은 무슨 건망증, 난 지금까지 햇갈려 본적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칭찬을 합니다. “대단하십니다. 그 연세에 건망증이 없으시다니”
세 번째 할머니까, 깜짝 놀라더니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립니다. “어머나, 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이러고 있었습니까? ”
건강한 사람은 잘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교훈을 기억하고, 좋은 것 기억하고, 말씀을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에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말을 들을때는, 이미 세례요한의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불신앙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유대인들만 예수님을 바라 보았는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을, 거꾸로 바라 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눈으로, 바라 보셨습니까?
마태복음 14:14 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 보셨습니다.
저 사람들 중에, 아픈 사람들은 없을까?
저 사람들 중에, 상처받은 사람은 없을까?
저 사람들 중에, 믿음이 약한 사람은 없을까?
내가 고쳐 주어야 되겠다. 내가 상처를 치유하여 주어야 되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주십니다.
악수도 하여 주시고, 만져 주시고, 그러다가 아픈 사람을 발견하면, 안수기도하여 고쳐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의 눈’으로 바라 보셨습니다.
마가복음 6:48 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먼저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도록 보내시고, 예수님은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보시니까..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불어 옵니다. 풍랑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눈’으로 얼른 제자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그 풍랑에 위태위태하게, 괴롭게 노젓는 것이 보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저렇게 위험한데, 내가 가서 얼른 구해 주어야 되겠다”
마가복음 6:48 하반절에 말씀합니다.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제자들이 괴롭게 노젓는 것을 볼때에, 예수님의 마음이, 애가 타십니다.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할까?
제자들이 얼마나 힘들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고, 급하셨으면,
풍랑이는 바다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달려 가셨습니다.
사람은 물에 빠지는 것이,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드신 ‘법칙’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시니까, 제자들을 구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셨으면,
스스로 만드신 법칙도 깨어버리고, 제자들을 구하려고, 물위를, 달려 가셨습니다.
어떤 아이가 마당에서 놀다가 넘어졌습니다. “엄마~” 하고 울 때,
엄마가 급한마음에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내려가 아이를 끌어 안는데, 예수님의 마음은 더 급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에게 달려 오십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시다가 마음이 급하시면, 오늘날도 법칙을 깨고, 급하게 달려 오실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목에 힘이 없어, 고개가 기울어 져서, 고개가 들려지지 않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이제는 나이도 많아서, 어떻게 고칠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냥 그러고 사셔야 되겠습니다.”
이분이 낙심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병원에 갔더니 나이도 많고, 병원에서 고칠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고쳐 주십시요. 믿습니다.아멘~”
그렇게 매일매일 열심기 기도하였더니, 고개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고개가 들려 집니다.
의사선생님이 할말이 없습니다. 병원에서도 않된다고 했는데 고개가 들려지니까..
이분 스스로도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제는 고개가 쭉~ 펴지고, 허리도 쭉~ 펴지고,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버릴때가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않바라 볼때가 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나를 바라보시고,
예수님은 내가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 누구입니까?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과 눈을 맞추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의 눈빛을 깨닫고, 예수님의 향하여 고개를 듭니다.
나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바라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도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과...... 눈을 맞추고,
매일매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