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8장 41절 46절 믿음 멋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자기만의 멋이 있는 것 같습니다.
블루진, 청바지는 원래, 작업복입니다. 거친 환경에도 튼튼합니다. 때가 묻어도 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택사스 들판에서, 말을 모는, 카우보이들이 입습니다.
그런데 ‘카우보이’라는 말이, 말 그대로, ‘카우’ ‘소’입니다. ‘보이’,‘소년’입니다. ‘소를 돌보는 소년’ 바로 ‘목동’ 입니다.
카우보이,목동...얼마나 힘이들고 피곤하고 고달프겠습니까?
하지만, 카우보이들은, 스스로... 나는 들판에서 소나 돌보는, 별 볼일없는 사람이라고 주눅들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을 타고, 밧줄을 돌리면서, 소를 돌봅니다. 야생마를 잡아서 길을 들입니다.
그러면서 만족하며 보람있게, 살아갑니다. 스스로 자기만의 멋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카우보이를 멋있게 바라봅니다.
카우보이들이 하는 행동을 멋있게 보고, ‘로데오’ 경기를 합니다.
카우보이들이 입는 옷을 멋있게 보고, ‘블르진’--청바지를, 입습니다.
요즈음은 일반사람들도, 작업복 아니라, 멋을내기 위해 입는, 세계적인 패션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거리에 가면, 청바지를 어렵지 않게 볼수 있습니다.
어떻게, 소를 돌보는 카우보이들의 작업복이, 전세계적인 패션 아이템이 될 수 있었습니까?
카우보이들이, 자기들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며, 멋스럽게...자기만의 멋을 만들어 갈 때,
카우보이의 옷과 모자와 게임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아이템이 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며, 멋스럽게 살아가며, 나만의 멋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1. 엘리야는 믿음의 스타일이,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 엘리야 선지자는, 스타일이 사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위에, 17절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아합왕은 엘리야 선지자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멀리 서있는 한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멀리 서 있었고, 처음 보았지만, 보자말자, 그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 인줄,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먼저 겉모습이 멋이 있었습니다.
수염이 덮수룩 하고,
겉옷을 두르고,
누가 보더라고, 선지자의 멋이 났습니다.
“야 저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 인거 같애...”
심지어는 아합왕이 보더라도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우상을 섬긴다고 비를 않내리게 하는 당신이...신령한 엘리야 선지자 맞지요? ”
거기다가 엘리야 선지자는, 말씨와 행동이 더욱 멋 잇었습니다.
18절에 보면 말씀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겉모습 뿐만 아니라, 속 마음도...그 속에 있는 믿음도 선지자의 멋이 있었습니다.
강렬합니다.
믿음이 투철하고 확실합니다.
그래서, 아합왕을 만났지만, 오히려 아합왕이 부끄러워 하고, 기가 죽도록...믿음에 멋이 대단하였습니다.
외모는 중요한것 같습니다.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을, 알수 있습니다.
경찰의 옷을 입고 있으면, 그 사람이 경찰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반듯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그 사람이 단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누가 보더라도, 저사람은 선지자 구나 하고...알아차릴수 있도록
선지자의 멋, 선지자의 스타일이 있었습니다.
자 질문을 하나 드려 보고 싶습니다.
선지자가 부끄러운 것입니까? 선지자가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였고, 3년 반동안 비가 내리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북이스라엘이 엘리야 선지자의 말만 들었더라도, 나중에 나라가 멸망하고 없어지는 불행을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엘리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우상을 섬길때에...믿음이 점점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앗시리아가 처들어오니까, 오히려 앗시리아의 우상을 따라서 섬깁니다.
“우리는 앗시리라의 우상이 좋습니다. 우리는 앗시리아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유다는 바벨론에 끌려갔다고 돌아왔는데,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없어졌습니다.
외모는, 단순히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 그 사람의 가치관, 그 사람의 생각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을 들어내려고, 외모에 많이 투자를 합니다.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씁니다. 꽁지를 머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투블럭이라고 해서, 옆으로는 홖~ 밀고, 위로는 머리카락을 길게 기릅니다.
옷도 화려하게 입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 원색의 옷을 입습니다.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입어서, 주위의 시선을 끌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판사가, 꽁지머리에, 투블럭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 국회의원, 사장님이...빨간색 양복을 입고, 파란색 양말을 신고 다니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유명한 대기업에 입사하려고, 면접을 보러가도
정장에, 구두를 신고, 머리를 단정하게 빚고 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써, 멋이 나타나야 합니다.
외모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써 외모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2 에는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디모데전서 2:9 절에 말씀합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단정하게 옷을 입는 것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어떻게 보면, 능력과 권위가 쎌수록 단정하게 옷을 입습니다.
군인들 보면, 단정하고 반듯하게 옷을 입고, 어깨에는 번쩍번쩍 별을 답니다.
검사들을 보면, 단정하고 반듯하게 옷을 입습니다.
반대로, 능력과 권위가 없을수록, 단정하게 옷을 않입어도 됩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이, 천국에서 드리게 되는 예배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중심에는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서십니다.
주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섭니다.
천군천사들이 찬송을 합니다.
24장로가 머리의 면류관을 벗어서, 예수님 앞에 바칩니다.
그곳에는 구원의 예복을 입지 못한 사람은,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고, 이마와 오른손에 구원에 표가 있고,
어린양의 피에 씻음받아 거룩하게된 구원의 예복을 받은 성도들만, 그 예배에 입장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잔치를 열고 임금님이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복음 입지 않고 서 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믿음과 신령함과 거룩함의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 사람은 예복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합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미국의 히피는 히피의 옷을 입습니다.
영국의 상류층은 상류층의 옷을 입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또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멋스럽게 믿음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인의, 멋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2. 엘리야는 믿음이 멋스럽고, 권능이 있었습니다.
‘담배인삼공사’에서, 광고 경진대회를 열었습니다.
‘담배인삼공사’를 한줄로, 소개하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모집합니다.
한 신입사원이 한줄 공모에 응모를 하였습니다.
“담배가 망친 건강, 인삼이 찾아 준다. ‘담배 인삼 공사’”
병주고 약준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세상은, 병주고, 약도 않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좋다고, 세상풍조, 세상 문화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로써, 세상이 따라오도록, 믿음의 멋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엘리야는, 외모만 선지자 다웠는가? 아닙니다. 믿음도 선지자 다웠습니다.
42절 하반절에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렇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으면, 보통사람은 흉내낼수 없는 엄청난 기도를 합니다.
산꼭데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할 때, 다른 사람은 따라할수 없는 그 사람만의 기도를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멋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따라하기 힘든, 그 사람만 할수 있는 기도
다른 사람은 따라하기 힘든, 그 사람만 할수 있는 예배
다른 사람은 따하하기 힘든, 그 사람만 할수 있는 봉사
어떤분은 봉사에 멋있게 합니다. 그 사람 손만 들어가면, 그 많던 일이 척척 됩니다.
어떤분은 예배를 멋있게 드립니다. 그 사람만 있으면 예배당이 꽉~ 찬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분문에 엘리야를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할 때, 겉에 멋만 좋으면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에는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 관계가 있지 아니하면, 아무리 멋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귀한 것을 맡겨 주시지 않습니다.
어디 다니로 가면, 집을 봐달라고, 집열쇠를 맡겨야 합니다. 그럴대 누구에게 부탁 하시겠습니까?
집열쇠는, 아무 한테나, 선듯 맡기기가 조심스럽습니다. 평소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집 열쇠를 맡길수 없습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내가 제일 믿고, 내가 제일 신뢰하는 그 사람에게, 집을 봐달라고, 집열쇠를 맡길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합니다. “부귀를 주세요. 성공을 주세요. 건강을 주세요. 자녀의 복을 주세요. 이번에 합격되게 해 주세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부귀의 열쇠, 성공의 열쇠, 건강의 열쇠,...누구에게 주시겠습니까?
아무나 기도한다고, 선듯 주기가 조심스럽습니다.
평소 잘 모르는 사람이, 기도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잘 알고, 하나님께서 믿고, 하나님께서 신뢰하는 그 사람에게, 응답의 열쇠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성공을 주어도, 절대로 교만하지 않고,
부귀를 주어도, 절대로 본분을 잊어버리지 않고
아담과 하와처럼, 함부러 선악과 뚝~ 따먹어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것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하늘에서 비가 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엘리야의 기도의 폼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엘리야를 잘 알고, 엘리야를 신뢰하기 때문에, 엘리야가 달라고 하니까...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고, 불도 내려주시고, 비도 내려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에는 성장뿐만 아니라, 성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만나고 있습니까?
사무적 관계입니까?
일회적 관계입니까?
무조건 달라고 하는, 일방적 관계 입니까?
인격적 관계가 아니고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신뢰, 신임 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나타나는, 신령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만나면 누구나 서먹~ 합니다.
그러나 자꾸 인사를 합니다. 어렵지만 자꾸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 인격적 관계가 시작 됩니다.
“어~ 지난주 태풍이 지나갔는데, 별일 없으셨습니까?”
“요즈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데, 어떠 십니까?”
그러면서 친해지기 시작 합니다. 사무적 관계, 일회적 관계, 일방적 관계가 아닙니다.
인격적 관계입니다. 양방향 관계입니다. 커뮤니 케이션입니다.
신뢰가 생기고, 서로 존중하게 되고,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 지는, 자리입니다.
예배때, 하나님께 잘 보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때 깍쨍이 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자기 위주로, 자기 입장에서, 자기만 생각하며,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은 깍쟁이구나...그러고 기억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예배때 부시시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준비가 않되어서, 부시시 한 얼굴로, 모자 쓰고, 선그라스 쓰고, 나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은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그러고 기억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예배때 정성스럽게 , 하나님을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교회로 출발합니다.
시편에 보면, 120편부터~134편까지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교회로 오는 과정이 벌써,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의 시작 입니다.
그래서 정성스럽게 예배드리면, 예수님께서 나를 좋게 기억해 주실 수 밖게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회개합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봉사합니다. 영광 올려드립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은 옥토같은 마음밭으로 살아가는 성도이다. 그러고 좋게 기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만사형통입니다. 기도하는것 마다 응답받고, 봉사하는 것 마다 열매맺고, 생활하는 것 마다 감사하게,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풍조를 쫓아서 살아가고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멋, 믿음의 스타일을, 오히려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깊어질때, 권능과 능력의 신령한, 믿음생활을 살아가게 됩니다.
믿음이 성숙하고 성장하여서, 이러한 멋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