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9절 17절 진정으로 멋있는 사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한국인의 관광취미는 유별나서,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에 갔더니, 거기에 이런 흔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홍길동 왔다 간다. 옆에 순자도 같이 있다”
아무리 세계적인 관광지라도, 한쪽 귀퉁이를 살펴보면 어김없이, 한국인의 흔적을 찾아볼수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족적을 남기는 것은 명예가 아닐수 없습니다.
탐험가로써 족적을 남깁니다.
학자로써 족적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족적을 남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큰글씨로 갈라디아서를 써서 보내었습니다.
왜? 큰 글씨로 썼겠습니까? 단순히 큰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큰 글씨로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 좋은 모습으로, 흔적을 남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9절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그 사람의 그림자가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빈자리가 큰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비존재가 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빈자리가 오히려 속 시원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편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나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은, 단순히 나의 소유가 넓어지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좋은 영향력이 넓어지는 것이요,
나의 좋은 흔적이, 넓어지는 것이라고 설명을 드릴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없어지고, 지워지고, 사라지면,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유~ 지긋지긋 해. 그 심술~ 그 성격~ 그 행동~
그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자리를 피합니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편하게 생각합니다.
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지경이 아무리 소유가 넓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지경이 넓은 사람이라고만~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은 지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지경은 마이너스인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있으면 분위기가 좋아 집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문제가 생겨도 술술 풀립니다.
그 사람의 소유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지경은 대단히 넓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9절에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나는 선한 족적을 남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선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선한 족적을 남기고, 선을 행하며 살아가면, 거두는 것이 적다고, 낙심하고 상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10절에서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기회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일을 하고,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하라고 말슴하고 있습니다.”
------------------
전도서 3장에는 말씀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심을 때가 있고, 거둘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선한 족적을 남기고, 기회있는대로 착한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이 때를 놓쳐 버리는 사람이라고 말씀 드릴수 있겠습니다.
항상 젊을 줄 압니다.
항상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항상 내 맘대로 살수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때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곧 얼마가지 않아, 갑이 을이되고, 을이 갑이 되는 때가 옵니다.
건강이 싹~ 달아나 버리는 때가 옵니다.
사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건강한 때는 적습니다. 오히려 건강 안할때가 많습니다.
인생을 백살로 보면, 어릴때는 자라나면서 힘이 없습니다. 20대 30대 때, 힘을 씁니다.
하지만 40대 부터는 조금씩 탈이 납니다. 힘을 쓰는 때를 지나가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5분의 1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간이고, 나머지 5분의 4는, 힘을 발휘할수 없는 기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리가 아파요, 허리가 아파요. 그러면서 힘을 못쓰는 것이 잘 못된 것으로, 고장난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아닙니다.
아픈것이 오히려 정상이고, 않아프고 힘을 막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5분의1 때...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은혜로 모릅니다. 막뛰어 다니고, 팔팔하게 힘쓰는 것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팔팔하게 힘쓸 때, 선한일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청년의 때를 넘어가서, 팔 다리가 아플 때, 아프다고 원망하며, 왜 고장 났느냐고, 내가 비정상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때를 알고, 기회를 만났을 때, 착한 일을 하고,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믿음으로 대하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은 믿음의 좋은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그림자가 그리워 지고,
그 사람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고
그 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반가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흔적으로 나를 가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은 12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는데, 신경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 보는것은 아닌가?
그래서 경차를 사려다가, 소형차를 삽니다. 소형차를 사려다가 중형차를 삽니다.
어떤 골목에 차를 주차시켜 놓았는데, 큼지막한 외제 차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전화를 하였습니다. “ 1234번 차주 되십니까? 나가려고 하는데 차를 좀 빼 주십시요.”
요즈음은 전화를 해도, 전화도 않받고, 않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보았더니 누가 요령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럴때는 문자를 보내면 된다고 합니다.“1234번 차주 되십니까? 주차하다가, 차에 기스를 내드렸습니다. 그냥 갈까요? 아니면 보상을 해드릴까요?”
그러면, 차주가 단번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여튼 그 골목에 외제차 주인은, 금방 나왔습니다.
그런데 30대 초반의 젊은이 입니다. 모자를 쓰고, 목에는 금사슬 목걸이를 하고, 팔에는 금사슬 팔지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차가 필요해서, 이 차를 샀는지, 아니면 육체적의 모양을 내려고 샀는지..
아마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도바울은,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기 위하여, 할례를 행하고
그러면서 정작 율법은 지키며 않고 살아가고
즉 남에게 겉으로 보이기 위하여 살아가는, 외식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겉으로 들어납니다.
믿음은 겉으로 들어나지 않습니다.
율법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고, 율법의 정한 옷을 입습니다.
믿음은 회개를 하고,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겸손하게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겉모양으로, 육체의 모양을 내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고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발자국만 물러서서 바라보면, 겉모양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섞은 일인지 금방 깨닫게 됩니다.
자~ 사람이 눈으로만 바라보느냐? 아닙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영의 눈으로도 바라보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색깔은 색깔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색깔에는 고유한 느낌과 정서가 들어 있습니다.
노란색은, 단순히 노란 색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에 노란색으로 선을 그려 놓으면, 경고의 느낌을 받습니다.
“무언가 표시할려고, 노란 색으로 그려 놓았구나”
사람은 눈으로만 색깔을 보는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도~ 색깔을 봅니다.
어떤 색깔을 보면,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을 가집니다.
어떤 색깔을 보면, 어두컴컴하고 차가운 느낌을 가집니다.
눈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색깔의 감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도 그 사람 만의 고유의 색깔이 느껴지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겉모양을 멋있게 꾸몄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면, 시커먼 느낌이 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차가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어두컴컴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을 만나면, 따뜻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화하고, 평안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을 보아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눈으로 볼때에,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따뜻한 색깔, 차가운 색깔을 ...마음으로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나에게서는 어떤 색깔의 빛이 나오고 있습니까?
밝고, 온화하고, 환한 색깔이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둡고, 차갑고, 무거운 색깔이 나오고 있습니까?
아무리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며도, 조금만 이야기 해보면, 어두운 색깔, 차가운 색깔, 무거운 색깔을 알아치릴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모습은 수수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이야기 해보면, 따뜻한 색깔, 온화한 색깔을, 그 사람에게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사람은 겉모양만으로 기억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사람 에게서 나오는 색깔까지 합처서, 종합적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5절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겉으로 할례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새빛이 나와야 되는데,
겉모양만 신경을 쓰다보니, 겉으로는 좋은빛깔로 치장을 하였을지 모르지만..
속사람의 빛은, 새 사람이 아니라, 옛사람이 빛이 나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초면에는, 겉사람 때문에 호감을 가질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하면 생활할수록, 겉사람 보다는 속사람이 더 중요해 집니다.
속사람이 신뢰를 판가름 합니다.
속사람 때문에 존경과 높임을 받게 됩니다.
더 나가서, 그리스도인은... 나의 믿음이 빛깔은 어떤 색인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9절에는 말씀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또 말씀합니다.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성령님께서 사도요한에게, ‘영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영의 눈’으로 보니까..
겉모습은 환란과 궁핍 가운데 있는데, ‘영의 눈’으로 보니까, 실상은 이분이 대단히 부요한 자 이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대단히 부요하니까, 천사들이 보고 부러워 합니다.
상급이 대단히 부요하니까,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보고 부러워 합니다.
“야 너무너무 부럽다. 저렇게 믿음이 부요하고 상급과 면류관이 부요 하다니....”
반대로 자칭 유대인이라고 겉모습으로는 요란하게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의 눈’으로 보았더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의 눈’으로 보고, ‘영적 사건’을 알아차리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받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경험할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육적으로 보고
영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육적으로 계산하면..
영이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도무지 알아 차릴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 사람에게서는 영적으로 좋은 빛깔이 비칩니다.
항상 밝고, 온화하고, 은혜롭습니다.
그러니까..악한 기운이 그 사람에게는 얼씬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그 사람 속에, 은혜를 막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서는 영적으로 침침한 기운이 비칩니다.
어둡고, 침울하고, 껌껌 합니다.
그러니까..악한 기운이, 그사람에게는 졸졸 따라 다닙니다.
죄악이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아서, 죄악으로 인하여 은혜의 기운이 가로막히게 되니까...
그 사람은 영적으로 나쁜 빛깔이 나올수 밖게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라살기로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고,
예수님을 따라서 나도 십자가에 못박히는 생활을 살아갈 때,
예수님의 모습이,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악한 기운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하는...
영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의 빛, 사랑의 빛, 영광의 빛이 가득한
사도바울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 합니다.
좋은 모습으로 흔적을 남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좋은 빛깔이 뿜어져나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속사람으로, 나의 영적의 모습으로 인하여,
사랑받고 존경받고 높임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 이 믿음 살아가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