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21절 25절 부활하신 에수님을 바라보자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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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 부활 후 첫 번째 주일이 됩니다.
자 나는 예수님의 부활 후를....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질문이 가장 당면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이 없다면, 나는 예수님의 부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일회성 사건으로만 보고 끝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아무런 관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후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을 중요하게 할수 밖게 없었던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사건입니다.
24절 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의 극적변화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되겠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씀중심의 삶으로 극적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철저하게 말씀중심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전통이 오늘날 까지 이어져서, 우리도,‘말씀중심’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듣게 됩니다.
교회생활을 할 때,‘말씀중심’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중심의 삶’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예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면,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예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면,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60년에 만든 영화입니다.
당시 아카데미 4개부분을 수상한, 당대의 걸작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1960년 당시 명배우로 이름을 떨치던, ‘커크 더글라스’입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로마의 수많은 종들,노예들, 검투사들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이들에 요구사항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시요’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당연시 여기고, 어떻게 보면 공기처럼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유는 당연히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유가 없던, 로마의 종들은 자유가 너무너무 소중하여, 목숨을 걸고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시요’
로마가 어떻게 하였을까요? “그렇게 소중한 자유는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다.”
“종들, 노예들, 검투사들은 절대로 자유를 줄수가 없다.”
그리고는 로마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을 합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건 뭐, 협상을 하고, 이야기를 해서 해결될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달라고,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전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로마군인들은 무자비하게 진압 합니다.
대부분의 종들은 죽습니다. 살아남은 종들은 쇠사슬에 묶여서, 줄줄이 끌려가게 됩니다.
로마의 장군은, 쇠사슬에 끌려가는 살아남은 종들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합니다.
로마에 들어가는 엄청난 먼~ 길 양쪽으로..끝없는 십자가가 세워지게 됩니다.
종들은 모두 도망가거나, 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올라 가라고 하면, 고개를 떨구고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서 섭니다.
누구하나 도망갈 생각 조차 못합니다....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스파르타쿠스가 매어 달립니다.
온갖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때 마침 스파르타쿠스가 사랑했던 여인이 나타납니다.
울면서 말합니다. “전쟁 가운데, 우리 주인이 나에게 자유를 주었어요.
이제 나는 자유인이 되었어요..
여기 당신의 갓난아이도, 이젠 자유를 갖게 되었어요..
품안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아기를 보여 줍니다.”
자유를 못얻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수많은 노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여자와 한아기가 자유를 얻어서...
자유가 없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저는 그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서, 가슴 찡~ 하였습니다.
자유가 없어서 십자가에서 저렇게 죽어 갔다니...
자유를 얻어서 멸망을 벗어나는 한 어머니와 아기...
우리는 오늘날 당연히,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죄의식과 멸망과 불안이 없습니다.
소망과 기쁨을 당연시 여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죄로부터 자유함을, 너무나 당연시 여깁니다.
너무나 당연시 여기다 보니, 그것이 없는 것 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나 당연시 여기다 보니, 그 소중함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하여 주신, 예수님의 죄사함은, 아무나 얻을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참으로 소중하게, 죄에서 자유함을 받게 되었고,
더욱더 부활승리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잊어버리지 말자,
죄에서 자유하게 된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살피며 살아가자..
그래서 철저하게 말씀중심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중심의 삶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입니다. 가까이 해야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성경말씀을 듣고..
성경말씀을 외우고,
또한 말씀중심의 삶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경말씀에 있는대로 살아갑니다.
성경말씀을 적용하며 살아갑니다.
2.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직업별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변호사는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이라면, 싫어 한다고 합니다.
약사는 세월이 약이겠지요. 그러는 사람은 싫어 한다고 합니다.
학원강사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아이는 싫어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첫 번째로는, 성경말씀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요,
두 번째 답은,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22절 말씀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알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도 알고 싶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베드로는 요한이 죽는 때도 알고 싶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우리나라는 언제 강대국이 됩니까?
우리집은 언제 부자가 됩니까?
알고 싶은 것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도 이런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의 관심,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심, 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관심은 온통 요한에게 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사랑받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요한을 더 챙겨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시기질투심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미움이 발동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생활할 때, 옆 사람에게 괜히 미움이 발동하고, 시기심 질투심이 발동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개 집사님을 더 잘 챙겨주시는 것 같애~.
아무개 집사님은 잘못해도 그냥 넘어가 주시고...예수님은 편애하시는 것 같애~
똑같은 장면이 탕자의 비유에 나옵니다.
탕자가 온갖 나쁜짓하고 돌아와도,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 줍니다.
그럴 때 맡아들이 화가 납니다.
“아버지는 왜 탕자를 그렇게 편애하십니까?”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씽~씽~ 뛰어다니는 맡아들을 챙기겠습니까? 걸음마도 못하는 동생을 챙기겠습니까?
당연히 걸음마도 못하는 동생을 챙길수 밖게 없습니다.
그것은 동생을 더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못하기 때문에 떠 잘하라고 챙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맡아들에 입장에서는, 그 신호를 반대로 해석합니다.
못해서 잘하라고 챙기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해서 챙기는 것이라고, 그 신호를 반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는데, 아직도 베드로는 요한을 향한 시기질투 때문에, 예수님께 “요한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새소망을 활짝 열어 주셨지만, 베드로는 옛사람 그대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 2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새시대가 활짝 열렸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세 사람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행하던 시기, 질투, 훼방...바뀌어야 합니다.
새사람이 되어, 섬김, 격려,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옛사람이 행하던 구습, 잘못된 습관, 행동...바뀌어야 합니다.
새사람이 되어, 바른 믿음, 모범된 행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집에가서도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집안에 물건도 청소하고, 필요없는 물건도 정리하고..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새 집에 이사를 하면, 옛날물건 그대로 몽땅 다 가지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 집에 맞도록, 버릴건 버리고, 필요한 건 새로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구습을 쫓아, 옛사람 그대로....요한이나 시기 질투하고..
설사 내가..그렇게 요한에게 해 준다 할지라도, 그것에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상관’이라는 단어가 되겠습니다.
옛사람은 옛사람으로서 ‘상관’하는데가 있습니다.
‘상관’이란 단어는 서로상, 관계할 관..남의 일에 간섭함, 서로 관련을 가짐 이란 뜻입니다.
즉 상관없는 일에 간섭을 합니다.
내 일도 아니고,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에, 열심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이제 헛된것에 상관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이 상관하던 일을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상관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더 나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에 힘을 써야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22절에는 이렇게, 새사람이 되어, 예수님 따르는데, 단서 조항이 있습니다.
22절 상반절에 보면, ‘내가 올 때까지...“
즉 예수님이 다시 올 때 까지....새 일, 예수님 따르는 일을 힘차게 하라고 말슴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철학적 명제로 풀어서 설명하면
‘비록 내일 세계의 종말이 와도, 나는 오늘 한구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유명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말이지요..
서양철학은 신학과의 대화의 과정이라고들 합니다.
성경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진리를 이성적 언어로 풀어가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대부분의 중요명제는, 성경에서 출발 하였습니다.
“내일 예수님이 다시오실 지라도, 나는 오늘 새 사람이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부활 후 고백이 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는데, 그렇다면 나도 이제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허망한 것에 상관하던 것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일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그때가 내일이라고 해도,
오늘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을 흔들리지 않고 가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고, 부활을 통하여 주신,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심과, 영원한 소망을 주신 것을
소중하게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내일 예수님 오신다 하여도, 오늘 나는 흔들림 없이, 새 사람이 되어 믿음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이 되시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