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얻고자 달려가는자 고린도 전서 9장 24절 27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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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경쟁의 시대라고들 이야기 합니다.
경쟁은 운동경기에 비유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제네럴일랙트로닉의 유명한 CEO ‘잭 웰치’는 경영에 대하여 이렇게 강조한다고 합니다.
\'management is game\' 경영은 게임입니다.
그런데 그 게임의 대상은 바로 자신이라고 잭 웰치는 설명합니다. 그래서 경영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경쟁은 상대방과 하는 것이 경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살펴보면, 상대방과의 경쟁 이전에, 더 중요한 경쟁이 사실은 나 자신과의 경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남을 이기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이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 자신에게 져서, 그 다음 단계로 나가 보지도 못하는 경험을 하신적은 없으십니까?
또한 나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스스로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 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더 큰, 풍성한 생활로 나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신앙생활을 운동선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1. 성도는 상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인기를 얻고 있는 종교생활의 특징 중 하나는 ‘상이 없는 생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생활을 하여도, 상이 없습니다.
인기있는 이들, 동양종교나 유사종교들은 최고의 덕을 ‘자기 마음이 편안한 것’ 그것을 최고의 덕으로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정을 강조합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조용하게 가라앉도록 하는, 참선이나, 명상을 할 것을 권유합니다.
또 요즈음 웰빙 바람을 타고, 힌두교의 ‘요가’ 까지, 무분별하게, 일반화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들이 공통된 주장은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나의 마음이 편안하고, 나의 마음이 즐겁고, 나의 마음이 행복하면 최고라고 강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나의 마음이 즐거우면, 나의 마음만, 행복함을 느끼면, 된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도바울은 신앙생활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24절 말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가을에는 모든 초등학교에 운동회가 열리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부끄럽지만, 정직하게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도록, 한번도 달리기에서 상을 타 보지 못하였습니다.
10 명식 달리는데, 그 중에 1등, 2등, 3등 만, 공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항상 7등, 8등을 하면서, 상을 못타고, 어느듯 6학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6학년 마지막 운동회, 그런데 그때 세상이 뒤집어 지는 역사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앞에서부터 10명식 끊어서 출발합니다.
너무나 긴장이 되어 화장실 갖다가 오니까... 다 뛰고, 제가 있는 줄은 4명이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4명이니까...한 녀석만 이기면, 나는 3등은 된다...
그리고 땅 소리와 함께 출발했는데...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모릅니다.....
이를 악물고,,,, 힘을 다해서... 눈을 감고, 막 뛰는데...
뭐가 제 이마를 딱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깜작 놀라 눈을 떠보니, 선생님이 도장을 들고 제 이마을 빵 찍으면서 소리지릅니다. 3등.....
그래서 저는 졸업하면서, 3등을 하는 큰 영광을 누리게 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힘써서 달리면, 등수에는 들수 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달리는 사람은, 분명 여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달린다고, 다 상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명만 상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종교가 고린도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로마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제국종교에서 시작해서, 이집트의 밀의 종교... 나만 즐겁고, 나한 기쁘면 된다고 하는, 쾌락주의자들 에피쿠르스 학파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종교들이 달려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다 생명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권면합니다. 이렇게 많은 종교들은 있지만, 마지막으로, 영생에 이르는 길은 딱 한길 외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사람들은 말합니다. 길이 어디 하나, 뿐이겠습니까?
넓은 길도 있고, 좋은 길도 있고, 편안한 길도 있고 즐거운 길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맘에 즐겁고, 편안한 길로, 가면 제일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맘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넓을 길로 달음박질 하여,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 13절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달려갈 때, 넓은 길이 없는것이 아닙니다. 편안한길, 즐거운길이 눈에 보이지만, 그렇지만 그 길로 가지 않는 것이 성도의 지혜인 것입니다.
성도는 생명의 길, 십자가에 길, 주님가신 길로 달려 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 말슴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성도는 믿음으로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에수님이 가신 그 길을 뒤따라 달음박질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도는 면류관을 위하여 절제하는 신앙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요즈음 말아톤 이라는 영화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자폐증에 걸려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는, 아들에게 달리기를 하도록 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달리게 해 보았는데, 나중에 보니,
이 아이는 자폐증으로 인하여, 기질적으로 달리기에만 집중하다 보니, 달리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달리기 뿐만 아닙니다.
무엇을 하나 잘 하려면, 사실은 다른 것은 철저하게 버리고, 그것 하나에만 집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버리게 하셨습니다.
가지고 나온, 은금 패물은, 사람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버리게 하셨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사건들을 통하여, 다 버리게 하셨습니다.
또 가지고 나온 각종 물품들도, 40년이 지나는 동안 다 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달랑 천막과, 양때와 사람 뿐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게 하시고. 지극히 낮아지고, 지극히 겸손하게 만드신 이후에야,
그래서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하신 이후에야,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머리에 쓰려면, 머리에 있는, 나의 마음과 생각은 자존심과 성격을 절제하고, 버려야 합니다.
내 자존심 다 가지고, 나의 성격 다 가지고, 나의 성깔 다 가지고, 나의 주장 다 가지고 예수님을 쫓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말씀입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끄러미 보시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쫓을 것이니라.. 고 말슴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근심하면,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청년의 마음에는
“예수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아마 그런 생각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거, 내가 갖고 싶은거, 내가 원하는거 다 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갈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한 부자가, 죽을때, 돈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가 너무 간절해서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 돈은 안되고 대신 금궤는 가능하다.”
그러자, 부자는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처분해 금궤로 바꾸었습니다.
----드디어 부자는 죽어 힘들게 그 많은 금괘를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천국 문앞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마침 천국 문 앞에 있던 베드로가 부자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웬 도로포장 재로를 이렇게 많이 가지고 왔는가? 여기도 넘쳐 나는게 그건데...”
알고 보니까. 천국에는 모든 도로가 황금으로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버려도 주워가지 않고, 널려 있는 것이 황금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절제하고,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택할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꾸준히 달려가야 합니다.
26절 27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계해야할 품성 중 하나, ‘냄비근성’ 이라고 합니다.
끓어 오를때는 일 낼것 처럼 끓어 올라도, 금방 식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제자중에 이 냄비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떡중에 떡 이라는 뜻의 \'데마\' 라는 제자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한때는 얼마나 펄펄 끓는 신앙을 가졌는지, 바울이 감옥에 들어갈 때에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함께 들어갔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서와 골로세서에 보면, 바울은 데마를 칭찬하며, 감사하며,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식기 시작하는데, 나중에는 완전히 변하여, 사도바울을 버리고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 4:10에서 바울은 쓸쓸히 이렇게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한때는 향방없이 허공을 치고, 아무쪽이든지, 마구 달리는,
펄펄 끓는 신앙을 가졌지만,
곧 차갑게 식어서, 오히려 믿음 마져도 잃어 버릴때, 그 사람은 면류관은 커녕, 버리운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바른 방향으로, 또 바른 가락으로, 한발 한발, 신앙의 길을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신앙의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성화는 한순간의 느낌이나 깨달음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기도하는 자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세를 훈련하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하루하루 따라가는 그 삶속에,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성화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는 약속된 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르므로 성도는 면류관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서, 나의 생각, 나의 마음을 절제하고, 주님이 가신 좁은길 진리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장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자~
바른 믿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생명책에 나의 이름이, 또렷이 기록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