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6장 10절 21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역사
그 사람들이 그 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바 금쥐는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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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우리나라는 한일 역사 교과서 문제 때문에, 크게 안타깝고, 또 답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평소에는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 양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하여, 역사는 중요한 것이요. 또 생활에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 즉 역사의 관점에 정리가 역사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일본은 식민주의적 입장에서 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저지른 난징 학살사건은 없었다고, 둘러댑니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에서 저지른 갖가지 만행은, 근대화를 돕는 과정이었다고 말합니다.
또 중국은 어떳습니까? 중화주의에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봅니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자 그렇다면 역사란 어떻습니까? 과연 다원화된 현대 세계속에서는, 자기 맘대로 바라보고, 해석해도 되는 것이 역사 입니까?
역사는 잣대도 없고 주인도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지금 사실 역사는 History 인 것입니다. 즉 His 그분의 Story, 이야기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행동하심의 기록이 역사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러한 역사의 생생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는 하나님의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고, 이제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강대한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블레셋이 처들어 오자, 자기 맘대로, 또 불신앙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훈련된 군대도 없습니다.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모두들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가 나가면, 흐르던 요단 강물이 멈추어 버립니다. 아무리 큰 성 여리고라도,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고, 깊숙에 보관하던 법궤를 들고 전쟁에 나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불신앙으로, 제 멋대로 살아가다, 위기에 처하였다고, 법궤를 들고 나갈 때, 과연 법궤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당연히 이스라엘백성은 싸움에서 크게 지고, 법궤까지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한편 블레셋은 법궤를 빼앗자, 너무너무 즐거워 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이겼다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빼앗아온 법궤를 다곤신상 앞에 놓아 둡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재앙이 블레셋이 넘치게 됩니다.
다곤 신상이 무너저 법궤 앞에서 동강동강 납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온 땅에는 독종과 재앙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제서야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이긴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범죄 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나오는 것 처럼, 멍에메지 아니한, 암소들에, 법궤 끌게 하여, 회개하면서, 이스라엘 땅으로, 법궤를 돌려 보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진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블레셋에 재앙이 임한 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함에 대한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138:6 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의 당사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어떳습니까?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블레셋의 교만을 징치하시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어떻습니까?
어떤이는 갑자기 잘되는 것, 같고, 또 어떤이들은 서로 다투기도 합니다.
사건들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그 위에서 내려다 보시고, 그 중심을 보시고,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있음을 바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2: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는, 또 역사 위에는 합당하게, 또 공평하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역사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하였습니다.
그것도 교만한 블레셋과 불신앙의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누가 승자 입니까?
교만한 블레셋 승자 입니까? 아니면 불신앙의 이스라엘이 승자 입니까?
싸움에서 지는 세대별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유치원들은: 먼저 우는 쪽인 진 것으로, 친다고 합니다...정말 그렇지요?
*초등학생: 코피 나면 지는 것으로 칩니다.
*중학생: 많이 맞은 쪽이 지는 것으로 칩니다.
*고등학생: 넘어지면 진는 것으로 칩니다.
*그럼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 먼저 때리는 사람이 지게 됩니다.
맞은 사람은, 진단서 끊어서, 경찰서에 갑니다. 나중에 몇 배를 합의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김포상도교회 성도님들은 그래서는 않되겠지만, 싸우면...
말씀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오른빰을 때리면, 왠 빰을 대어서라도, 절대로 맞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 말씀에서는 누가 이기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블레셋과, 이스라엘과 같은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연 교만한 사람이 이길 것인가?
과연 불신앙의 사람이 이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세계는 Nation God 라고 하는 의식이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자기 민족을 대표하는 신들의 싸움으로 보았고, 그래서 이기면, 우리를 대표하는 신이 더 강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블레셋이 있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이 하나님 보다 강하다고 좋아 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온땅에 독종과 재앙을 당하고 난 다음에는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참 신은 하나님 밖게 없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지도자 다섯방백은 회개하고, 속건제를 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법궤를 이스라엘 볼래 있던 곳으로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가 돌아오니 기뻐하면서, 법궤를 열어 보았습니다.
뭐 없어진 물건이 없나 하고 살폈던 것입니다.
얼마나 신앙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법궤는 기쁘다고 즐겁다고, 함부로 붙잡고 열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이, 그것도 정결하게 하고, 세마포를 입고, 법궤를 만질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그러한 율법을 다 잊어버리고, 그냥 기쁘다고, 법궤를 덥석 만지고, 함부러, 열어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동에, 그 즉시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벧세메스 지경에 사람 5만명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교만한 사람과 불신앙의 사람이 시작하였지만, 그 끝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들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건이 있습니다. 또 바른사람 하나 없이, 정의가 사라진, 다툼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만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 57:11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우리 김포상도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사건들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서만 높아지시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높이 들어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르므로, 성도는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또 한번 영광을 들어내시고, 하나님 되심을 들어내실 것을 바라보고, 안심하고, 더욱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이념의 역사가 있습니다. 왕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경제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역사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마지막 책이 사도행전 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님께서 오순절 강림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12 사도를 통하여, 또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사도행전 에는 시작은 있지만, 끝맺음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사도행전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오늘 사도행전 김포상도교회 편이 쓰여지고 있을 것입니다.
비가 오나, 김포상도교회, 교우들은 더욱 힘욱 말씀위에서 4월 9일 예배를 드리더라..
예배에는 신효식 집사님, 배난현 집사님, 예정희 성도, 최대형 집사님,..등등..
참석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더라...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의 사건에, 또 내 주위에 일어나는 사건 때문에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건들로 인하여, 꼭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고, 하나님이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성도님들은 나의 생활 가운데에, 항상 하나님만 높이기를 힘쓰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