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 24절 30절 가만 두라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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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달은 성령안에서 믿음이 성장하는 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령안에서 자랄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모든 부분이 자라나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나는데 목표는 누구 입니까? 예수님을 본받아 자라나야 합니다.
말이 예수님 처럼 자라나야 합니다.
예수님 처럼 온유하게, 우리의 음성을 ‘톤 다운’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처럼 온유하게, 우리의 말씨를 ‘캄 다운’ 하여야 합니다.
도마가 예수님께서 당장 않계신다고, 손가락을 들고 목소리를 높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 보고 듣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타나셔서, 도마가 말 한 그대로, 그 손가락을 나의 손에, 나의 허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고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또 믿음이 자라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믿음이 연약하면 사탄에게 공격을 받을 때, 상처를 입고, 낙담하고, 힘들어 합니다.
반대로 믿음이 튼튼하면, 어지간한 공격을 받아도 끄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로 찬송으로, 도리어 사탄을 공격하고 물리칩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여 주셨던것 처럼, 믿음이 튼튼하여지면, 다른이를 구하여 내는데도, 힘쓰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은 ‘가만 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주위에서 ‘가만히 두세요’ 라는 말을 종종 들을 때가 있습니다.
체력도 떨어진것 같고, 몸무게도 늘어난것 같은데, 운동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두세요”~ 이 더운 여름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데, 운동은 무리입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에게 말을 합니다. “지금 공부를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두세요~” 이 더운 여름에, 불쾌지수가 높고, 집중이 않되는데, 공부는 무리인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말합니다. 시간이 광음과 같아서, 벌써 한해의 반이 지나갑니다. 감사와 찬송으로 다시~믿음에 깨어나고, 믿음이 성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두세요” 요즈음 코로나 인데, 않그래도 매일 코로나 걸릴까봐 살얼음 판인데,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무리인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분문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도 “가만 두라”고 말씀 하십니다.
자~ 누구를 향하여 “가만 두라”고 말씀 하십니까? “가라지”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가만 두라”고 말씀 하십니다.
1·. ‘가라지’는 가만히 있는 열매입니다.
26절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봄이 됩니다. 만물이 싹을 냅니다.
종들이 밭에 고랑을 만듭니다. 그리고 ‘좋은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싹이 나고 자라는데 보니까, 알곡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자라고 있습니다.
알곡은 어떤 열매입니다. 열매의 속이 꽉 차 있습니다. 너무나 귀합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이유는, 바로 이 알곡을 얻기 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왜? ‘복음’을, 뿌리시는 것입니까?
‘가라지’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알곡’을 얻기 위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에도 ‘알곡’같이, 예수님께서 귀하게 거두어 들이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같이, 예수님께서 거두어 들이지 않는 ‘불신앙’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곡같은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에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나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많습니까? 미움이 많습니까? 만약, 나의 마음속에 누구를 미워하고, 어떤 사람을 향한 미움이 더 많다면, 이러다가 알곡 않되는 것은 아닌가?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기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근심과 걱정이 많습니까? 만약 나의 마음속에 기쁨이 아니라, 근심과 걱정과 분노가 더 많다면, 이러다가 알곡 않되는 것은 아닌가? 살펴 보아야 합니다.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내 속에 충만한지 않한지, 그리스도인은 알곡신앙이 되기 위하여, 살펴 보아야 합니다.
또, 어떤 알곡--열매가 성경에 있습니가? 로마서 6:22 에는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리스도인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 영생을 얻는 자입니다.
노래 할때도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노래합니다.~ 유행가 보다는, 찬송가를 부르면 얼마나 더~ 거룩 합니까?
옷을 입을때도 거룩하게 입고,
행동을 할때도 거룩하게 하고,
대화를 할때도 거룩하게 하고
일을 하고, 결정을 하고, 사람을 만날때도 거룩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의 곳곳에는, 거룩함의 알곡--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됩니다.
거룩함에 열매가 가득한 사람은 거룩함에 알곡신앙이 되어, 마지막에서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13:15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성경에 좋은 열매들 가운데 한가지만 더, 소개해 드리지만, 입술의 열매도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 ‘항상’이라 함은, 생활속에서 끊임이, 없습니다.
길을 갈때도, 버스를 탈 할때도, 항상 입으로 흥얼흥얼 찬송을 부릅니다.
입으로 찬송하면, 자동적으로 찬송가사가 떠오르게 됩니다. 즉 생각과 마음으로도, 찬송을 않할 수가 없습니다.
찬송가사는,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에 대한 가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합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입술로 부르면, 예수님 이름앞에 악한 것은 물러갑니다.~ 평안이 찾아오고, 은혜가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삶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예배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입술로 찬송하며, 예배의 삶을 살아면,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라지 어떠 합니까? 앞에 나온 모든 말씀의 반대~ 입니다.
가라지는 겉모습은 알곡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아무것도 없는 쭉정이입니다.
예를들면, 안을 들여야 보았더니,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가라지’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속에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속에는 희락이 아니라, 분노와 근심과 걱정이 가득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함의 열매가 아니라, 거룩함에 대하여 쭉정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은 거룩함인가? 하였는데 조금만 들여다 보니까, ~
옷도 거룩하게 입지 않습니다.
행동도 거룩하게 하지 않습니다.
대화도 거룩하게 대화하지 않습니다.
또한, 입술의 열매가 쭉정이인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 18번 곡은 너무나 많은데, 찬송가는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 벨소리를 틀었다 하면, “짜잔 잔잔잔~ 짠짜라 잔잔~” 세상에 노래를 광~광~흘러나오는데, 찬송가, 복음송가, CCM...은 들려오지를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라지는 가만히 있는 열매입니다.
믿음의 여러가지 모습이, 자라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보니,
성령의 열매, 거룩함에 열매, 입술의 열매...모든 믿음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씨가 덥고, 세상이 혼란하고, 코로나로 위축이 되고...그래서 “가만히 두세요.” 라고 하는, ‘가라지의 유혹’을 이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가라지는 가만히 두는 열매입니다.
28절에서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교회 앞에 밭을 보았더니, 밭고랑에 누렇게 되어서 넘어져 있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토마토 같기도 하고, 알수가 없습니다.
옆 집에 사시는, 아저씨께 여줘 보았습니다.
“...저기, 저, 토마토는 말라서 누렇게 되어서, 넘어져 있습니다. 빨리 물을 줘야 되지 않을까요?”
“허허 목사님도, 저건 토마토가 아니라, ‘감자’입니다. ‘하지’에 캐는 감자라서, ‘하지 감자’ 라고 하는데,
캘때가 되어서, 추수하라고 저렇게 감자들이, 누워 있는 것입니다.”
“네,~ 그렇군요”
오늘 본문에도, 보니까 추수할 때가 가까워 집니다. 종들이 밭에 나가 보니까, 밭에 곡식들이 추수를 앞두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 합니다.
그런데 알곡 뿐만 아니라, 가라지도 있는 것이 보입니다.
28절 하반절에, 종들이 주인에게 말합니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렇지요. 종들이 보기에는 가라지를 뽑아야 될 것 같아 보입니다.
가라지는 괜히 땅만 차지 합니다.
가라지는 알곡 옆에서, 영양분만 축내고 있습니다.
알곡을 위해서라도, 가라지를 다~ 솎아 내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에게 말합니다. “ 우리가 가서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시 나이까?”
그런데 주인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29절에 말씀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주인의 관심도 분명, ‘가라지’가 아니라 ‘알곡’입니다.
추수는 알곡만, 추수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밭에 걸음을 주고, 밭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것은 ‘알곡’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곡옆에서, 아까운 걸음과 수고를 축내는, 나쁜 ‘가라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인은 알곡을 위하여,--- 가라지 뽑으려다 알곡이 다칠까 염려가 되어,
‘알곡’을 위하여, 가라지는 ‘가만 두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자~ 우리가 믿음생활 할때에, ‘가라지’를 종종 발견할때가 있습니다.
겉은 그럴듯 한데, 속은 완전히 텅~비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단들’ 이지요.
겉은 얼마나 그럴듯 합니까? 우리교회 보다 도, 훨씬 멋있게, 겉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겉은 얼마나 거룩한 척 하는 지 모릅니다.
겉은 얼마나 신령한 척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속을 들어다 보았더니, 완전히 비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도 없고, 예수님은 하나도 없고, 그안에는 시커면 문성명, 안상흥, 장길자, 이만히, 오만 마귀--잡것들이, 득실득실 합니다.
이러한 가라지를 볼 때, 가끔씩은 생각을 할때가 있습니다.
왜 저런 이단들에게, 불을 않~떨어뜨리시는가?
지금 당장 솎아 내어주시면, 우리가 믿음의 열매 맺는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단을 귀하게 여겨서, ‘가만 두시’는 것이 아니라, 알곡 때문에, 알곡이 다칠까 하여 ‘가만--두시’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는 불신앙의 여러가지 나쁜것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어떨때는 왜 불신앙의 나쁜것에, 불을 않~떨어뜨리시는가?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불신앙을 귀하게 여겨서, 가만--두시는 것이 아니라, 알곡 때문에, 알곡이 다칠까 하여 가만--두시는 것입니다.
자...세상에 있는, 불신앙과 이단과 믿음을 대적하는, 나쁜 여러~ ‘가라지’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 믿음 생활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가끔씩, 어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잠에 빠지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려고 할때가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가끔씩,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혼란이 올때가 있습니다.
가라지 들은 이렇게 많은데도 멀쩡한데,--- 그럼 가라지가 나쁜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라지가 일상적인 것이, 아닐까요?
알곡신앙은 너무 힘이 듭니다. 반쯤은 가라지, 반쯤만 알곡신앙으로 살아가면, 좀더 편~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가라지와 알곡의 경계선은 없는 것입니까?
가라지 처럼 살아가고, 가라지 가 되어 살아가고, 그러면서 마무리 되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종들도 헷갈려서 주인을 처다 봅니다.
알곡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가라지를 뽑지도 않고, 가라지를 헤치지도 않고, 가라지를 가만히 둔다면,
가라지와 알곡--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럴 때 주인이 말씀합니다.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주인의 뜻은 분명 하였습니다. 알곡은 알곡, 가라지는 가라지입니다.
단지, 추수때까지, 알곡을 추수하기 위하여, 가라지를 가만 두는 것, 뿐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그때는 먼저, 아낌없이 가라지를 뽑아서, 단을 묶습니다.
단으로 묶는다고 하니까, 좋은 것을 주려고 묶는가 할수 있지만, 아닙니다.
가라지는 불사르려로, 단으로 묶는 것입니다.
반대로, 알곡은 정성스럽게, 곱게 모아서, 주인의 곳간,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73편 16절-19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시편 시인이...세상에 악인이 잘 되고, 악인이 아무탈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니까, 마음의 심한 고통이 되었습니다.
“악인은 어떻게 저렇게 잘되고, 악인은 어떻게 멀쩡하게 잘~ 살아가는가?”
그러면서 예배드리러, 성소에 들어갈 때, 성령님께서 악인의 종말을 깨닫게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보았더니.... 추수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악인을 파멸에 던지십니다. 그러니까..악인의 모든 것은 황폐하게 됩니다. 악인의 끝은, 놀랄 정도로 전멸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시인은, 거룩함의 열매, 입술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알곡신앙이 되기를 다짐하며, 성소에 들어가서 감사하며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가라지는 가만히 있는 열매입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는 쭉정이가 되어 버립니다.
또한 가라지는 가만히 두는 열매입니다. 알곡을 위하여, 추수때까지 가만히 둡니다.
하지만 때가 차서, 추수하게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나누어 지게 됩니다.
알곡은 귀하게 모아 천국창고에 들이고,
가라지는 가라지만 몽땅 모아서, 밖에 던져 불살라 지게 됩니다.
성소에 나와 예배드리는,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알곡신앙~, 추수때에 귀하게 천국에 들어가는, 알곡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 합니다.
하나님, 알곡신앙을 향하여, 힘차게 성장하며, 날로 믿음의 성숙하게 하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믿음이 알곡으로 자라는 것을 훼방하는, 가라지의 많은 것들이 있는 줄로 아오니,
가라지의 훼방을 이기며,~ 우리 김포상도교회 성도들은 모두, 30배, 60배, 100배로 알곡신앙으로 자라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때가 차, 예수님을 뵈올때에는, 알곡신앙으로 칭찬받고, 귀하게 천국을 상속받는 자리에 이르도록, 우리모두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