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4장 1절 9절 행복의 질문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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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달은 ‘가정의 달’입니다.
교회에서는 ‘순종함으로 행복하게 되는 가정의 달’이라는 주제로 한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행복’1탄, 말슴을 전하였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하고,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행복하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행복은 한문으로, 다행행, 복복입니다.
영어로는 ‘해피니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신명기 33장 29절에는...“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행복하게 해 주시려고, 출애굽을 시키시고,
행복하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죄악 세상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①생활에서 순종하고, ②가정에서 순종하고, ③예배에서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러주신대로, ‘나는 행복의 주인공으로 살아갈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행복2탄,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에서 어떻게 벗어날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행복을 향하여 걸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발걸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곳곳에서 방해를 합니다.
그 방해하는 것들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듯 행복은 사라집니다. 불행속에 잠기게 됩니다.
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1. 요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나서는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통 글을 보면, ‘기승전결’의 과정을 밟는다고 하지요.
보통 글에서는, 마지막 부분이 되면, 글의 결론이 나게 됩니다.
소설에서는 그 사람이 행복으로 끝나고,
수필에서는 그 글이 마무리를 합니다.
요나서가 총 4장인데, 그렇다면, 마지막 4장이 되어서, 요나서는 어떻게 끝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요나서 4장 1절 보니까,..“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4장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그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것 같습니다.
오히려 불평과 분노와 신경질적 반응이 온통, 요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을 보면, 보통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봅니다.
항상, 기도하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 희망의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선지자는, 반대입니다.
매우 싫어하는 마음이 가득차 있습니다. 성내는 마음이 가득차 있습니다.
얼마나 성을 내고, 싫어하는 마음이 가득하였으면 ~~ 하나님께서 말씀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마음은, 전혀 요나선지자에게서는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조금 더 요나 선지자를 살펴 보겠습니다.
요나선지자가 이렇게 싫어하고 성을 내고, 말씀에 순종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요나선지자를 교훈하시기 위하여, 박넝쿨을 예비하십니다.
박넝쿨이 자라납니다.
박넝쿨이 자라나니까, 해를 가리는 그늘이 생깁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벌래가 생겨서 박넝쿨을 갉아 먹습니다. 해를 가리는 그늘이 사라집니다.
해볕이 그대로 요나선지자의 머리에 내리 쬐입니다.
그러니까, 요나선지자는 또 그 성격이 발동을 합니다.
8절 하반절에 보면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혼미는 어두울 혼, 미혹할 미, 의식이 흐리다는 뜻이지요
스스로 의식이 똑바르지 못합니다. 자기가 지금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정리가 않되는 상황입니다.
그냥 그 성격이 또 발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을 하는데 무엇이라고 불평을 합니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외국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깜짝 놀란 것중 하나가...“한국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너무 쉽게 씁니다~.”
“배고파 죽겠다.” 그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배불러 살겠다”고 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베불러 죽겠다.”
‘우수워 죽겠다.’ ‘재미있어 죽겠다.’ ‘힘들어 주겠다.’ ‘날이 더워 죽겠다.’...
“한국 사람들은 온~통, 죽겠다는 말을 너무 쉽게 씁니다.”
요나는 한국사람도 아닌데, 수준이 보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이 대응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이 말씀에 요나가 즉각 대답을 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자, 요나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 하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죽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원망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내가 옳으니이다.” 완~전히, 히스테리에, 자기감정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여,
막말에 다름아닌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활하면 아무리 행복을 찾아도, 행복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요나는 불행의 길을 스스로 걸어 왔습니다.
자 그렇다면 진단을 해 보겠습니다.
요나의 이 상황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일.... 뿐입니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고,
감정 만, 잘 다스리면, 요나는 행복으로 돌아 올수 있습니까?
요나서 전체를 살펴보면, 요나선지자의 문제가, 단순히‘성격의 문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요나를 이렇게 불행하고, 히스테리컬한 사람으로 만들어 왔습니까?
요나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선지자를를 향하여,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와는 정 반대로 ‘다시스’로 가버립니다.
즉 자의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큰 사명을 가볍게, 버립니다.
또한, 요나선지자가 풍랑이 일어서 죽게 되었을 때, 바다에 던져저서,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큰물고기 배속에서 기도를 합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기도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앞으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나의 서원을 꼭 갚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그러면, 요나선지자는 기도하는데로, 생활 하였습니까?
물고기가 요나선지자를 니느웨에 토해낼 때,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에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 대로, 생활 하였습니까?
니느웨는 사흘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지만, 요나선지자는 하루동안 다니며 외치고, 끝내어 버립니다.
즉, 요나 선지자는, 기도따로, 생활따로 살아갔습니다.
정리를 해 보자면, 요나 선지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의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큰 사명을 가볍게 버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따로, 자신의 생활따로, 살아왔습니다.
요나의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생활이었습니다.
요나의 생활은 기도와 생활이 분리되어 있는, 따로따로 생활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로 살아올 때,
요나는,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느냐? 아닙니다.
니느웨에 대한 사명은 잊어버리고
박넝쿨 가지고, 죽기까지 성내는 것이 옳다고, 하나님께 성내는
불행한 성격, 삐뚫어진 감정이 소유자로, 변모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요나서는, 요나의 감정과 성격와 불행이
단순한 감정과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요나의 가치관의 문제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문제가, 기저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신신당부를 합니다.
"자, 병이 상당히 심합니다. 완치 되시려면, 약을 아침, 점심, 저녁 꼭꼭 드시고
다음 주일에는 꼭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으십시요”
그런데, 어떤 환자가 자의적으로 판단으로 가볍게 여깁니다.
귀찮게 약을, 아침 점심 저녁.... 꼭꼭 먹을 필요가 뭐가 있어요...대충대충 진찰 받으러가기 전날 밤에 한번 먹으면 되지요.
의사선생님 한테는 대답합니다. “네 의사선생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 병을 잘 고쳐 주십시요”
그리고 돌아가서는 병원에 진찰 받으러 가지도 않습니다. 겨우겨우 연락이 와서 한달후에가 갑니다.
만약 이런 환자가 있다면, 그 병이 고쳐 지겠습니까?
고져 지기는 커녕 악화 될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준 약은 나를 위하여 먹는 것이고,
진찰 받으러 가는 것도 나를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자의적 판단과, 상황적 대처는,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3.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어떤 교회 갔더니 인사를 하는데, 그 교회에서는 구호를 정하였습니다.
“크게 잘된 것입니다.
그래도 잘될 것입니다.
더 잘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도 옆사람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분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크게 잘된 것입니다., 그래도 잘될 것입니다. 더 잘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잘 구분해야 하겠습니다.
‘거시’ 라는 말은 클거, 볼시입니다. 크게 본다
‘미시’ 라는 말은 작을미, 볼시입니다. 작게 본다.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큽니다. 진리입니다. 완전 합니다.
나의 생각은 작습니다. 상황에 따라 바뀝니다. 불완전 합니다.
‘거시’에서 ‘미시’를 바라보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의 생각을 바라 보아야지,
나의 생각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 보아서는 않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실수는, 미시적 관점에서 거시적 관점을 바라보고
미시적 생각으로 거시적 판단을 결정할 때,
생활이 혼란하고, 감정과 결정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커피를 먹는 것이 행복 할까요?
오늘 버스를 타는 것이 행복할까요?
나의 입장에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요소들이 많습니다.
어떨때는 커피 먹어서 행복하지만, 잠을 못자면 불행하여 집니다.
버스를 타면 기분이 좋지만, 버스를 놓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미시적 관점으로 보면, 판단하기에 혼란스러운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행복의 길입니까?
자, 복잡한 골목에 들어가서, 길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길을 찾을수 있겠습니까?
나를 기준으로 보면, 그 골목이, 그 골목 같고, 도무지 헷갈려서 찾을길이 없습니다.
미시적 관점에서 거시적 관점을 결정지으려면 혼란의 역속입니다.
하지만 나침판을 가지고 보면, 간단하게 정리가 됩니다.
지구의 남북을 알게 되면, 그 다음은, 우리나라의 남북도 알게 되고, 그 도시의 남북도 알게 되고, 그 골목의 남북은 간단하게 정리가 됩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관점을 보면, 모든것이 명료해 지게 됩니다.
나침판을 보고, 지구의 남북을 알게 되면, 골목골목의 모양에 연연하지 않고,
남침반을 보면서, 목표한 곳에 잘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요나 선지자는, 미시적 관점에서, 거시적 관점을 바라 보았습니다.
나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미시적 판단으로 거시적 판단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지만, 나는 다시스로 가겠습니다.”~
그럴 때 부터, 헷갈리고, 꼬이고, 불평하고, 성내는 사람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자, 오늘....점심 때, 커피를 먹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미시적으로 보면, 정의가 않보이고, 이해득실이 정리가 않되고, 무엇이 행복인지 혼란스럽 습니다.
나를 중심할때는 커피를 먹을까? 말까? 고려사항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시’에서 ‘미시’를 보라는 것입니다.
크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는, 커피가 마시는 것이 어떤가? 살펴 봅니다.
커피는, 하나님 영광 가리는 것은, 괜찬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단계는 패스입니다.
그 다음 밑으로 내려가서, 한번 더 질문을 합니다.
나의 건강에는 커피 마시는 것이 어떤가?
한 두 컵은, 정신을 맑게 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도 패스입니다.
오늘 점심때, 커피, 한, 두컵 마시는 것은, 전혀 행복에 지장이 없습니다. 마음놓고 커피 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누가 않되는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가? 나의 유익이 되는가?
단계별로, 거시에서 미시로, 살피게 되면, 행복의 선택을 잘 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20 말씀을 보겠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행복할 수 있습니까?
요나 선지자는, 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불행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의 생활속에서, 거시-하나님의 말씀에서, 미시-나의 상황으로, 순서있게 살펴서,
행복한 선택,을 잘 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