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4장 12절 17절 부림절 삼일절
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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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는 독특한 절기가 있습니다.
바로,‘부림절’입니다.
부림절은 음가를 그대로 가지고온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뿌림’ 이라고 합니다.
시기는 ‘이른 봄’ 이고, 내용은 ‘에스더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봄에, 부림절이 되면, 에스더서를 낭독합니다.
그리고 거리로 나와서, 요란하게 축제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3.1절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오늘은 3.1 기념주일로 지키려고 합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3.1 운동을 하였습니다.
올해는 2019년 이 됩니다. 그러니까, 100주년, 3.1 기념 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실뿐만 아니라,
나라도 사랑하시고, 민족도 사랑하시는 분 이십니다.
반대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 머물렀던 나라와 민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고,
어떤 나라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1. 이스라엘 국민은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에스더서의 배경은 ‘파사시대’가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 바벨론에게 끌려 갔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곧 파사에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파사, ‘페르시아’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 되겠습니다.
당시 임금님은 아하수에로 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 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으며 살아갔습니다.
‘유대인이다~’ 그러면, 포로로 끌려온 사람, 종, 하층민 이라고, 사람들이 깔보고, 괴롭혔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장면이 아닐수 없습니다.
일제시대때,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얼마나 깔보고, 괴롭혔습니까?
‘조센징 이다’~ 그러면서 놀립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조센징 때문이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파사에서도, ‘유대인’이라고 놀렸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유대인 때문이다.’ 라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일이 터졌습니다.
왕궁에 경비를 맞던 병사, ‘모르드개’가... 태도가 불손하다고, 어느 민족이냐? 고 물었습니다.
‘저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유대인이 이니까, 저렇게 태도가 불손하지, 이 참에 유대인이란 유대인은 모두 죽여 버려랴’ 그리고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태도가 불손한 것은, 타이르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것이 이유가 되어, 아예 전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억측같은 명령 입니까?
일은 그렇게 되어, 갑자기 유대민족은, 민족자체가 모두 죽게 되는, ‘멸망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유대민족은 어떻게 대처 했는가? 바로 ‘부림절’로 대처하게 되었습니다.
즉 어떻게든 넘어 가겠지, 그리고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는 살아남지 않겠어? 요즈음 행복회로를 돌린다는 표현을 쓰지요. 나태한 마음으로 말만하고, 위안만 삼으면서, 끝나버리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부림절’로 대처하였는데,
‘부림절’의 대처는 두가지로 설명드릴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기도를 드리고, 유대민족을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두 번째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백방으로 노력하되, 에스더 왕비를 통하여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 두가지 일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매어 달렸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매어달릴때는 어떻게 매어 달렸습니까? 삼일 밤낮으로 금식철야 기도를 하며, 한사람도 빠지는 사람이 없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나님께 매어 달렸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할때는 어떻게 노력을 하였습니다.
조그만 아이에서부터, 심지어는 왕비의 자리에 올라간 에스더 까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에스더 왕비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왕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유대인을 모두 죽인다고 하면, 설마 왕비인 나도 죽이겠어? 그렇게 나태하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제 상류층이 되었는데,
손가락질 당하는 유대인의 일은 내가 알바 아니다.~ 그렇게 교만하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 왕비는 나 혼자~라는 ‘요행의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왕비가 되었든, 신분을 숨기고 있던지,
유대민족이 멸망당하면,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철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임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말씀 14절, 16절을 보면, 에스더 왕비의 책임의식이, 이 세상의 책임의식이 아니라, 믿음의 사명의식, 믿음의 책임의식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4절, 하반절에 말씀합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에스더가 왕비가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고 왕비가 되게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 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개인이 호의호식 하고, 개인이 명예와 높임을 받으라고 올라간 자리가 아니라,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하게 하시려고 섭리하셔서, 내가 부름받은 자리가, 바로 ‘나의 지금 생활의 자리’라는 이해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의식이, 생활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요셉은 에굽의 총리가 된 것이, 가뭄에 가족을 구하라고 하나님께서 먼저 보내어 주신 ‘사명의 자리’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전쟁이 났다 그러면, 외국에 있어도, 오히려 비행기 타고, 이스라엘로 가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현대 ‘중동 전쟁사’를 읽어보면,
학생이 캠핑을 갔다가, 북쪽에 시리아가 처들어 오고 있는, 한중간에 위치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얼른 피하자 그리고 도망을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반대입니다. 내가 이곳에 캠핑 온것은, 하나님께서 나라를 구하라고, 이곳에 캠핑을 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오히려 전투에 참가 하기로 합니다.
이 학생은 마침, 패전하여 후퇴하던 탱크를 설득하여, 그 탱크에 올라타고, 이틀동안 잠도 않자고, 그 탱크로 골란고원을 마구 달립니다.
이 장면을 보고, 북쪽에서 처들어 왔던 시리아 군대는, 이스라엘에서 증원부대가 온줄 알고, 대 전체부대를 뒤로 물립니다.
그 소중한 이틀의 시간 동안, 정말 증원부대가 무사히 도착하여, 적들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슴 16절에 보면, 더 대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 왕비는, 왕비라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사명을 감당할 때, 죽게 되면 죽겠습니다.~ 즉 에스더 왕비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일사각오, 죽기를 작정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럴 때, 대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을 모두 죽이겠다고 계획하던 하만총리는,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되고, 유대인들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은 유대인을 죽이려고 시도하는 사람을 오히려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큰~ 권한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젠 유대인이라고 놀리면 큰일 납니다.
유대인은 왕비의 민족이 되고,
유대인은 방어권을 행사하여 다른 사람을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큰 권한을 행사하는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완전한 대성공,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부림절은 이렇게 대 성공으로 끝났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3.1 운동도 이렇게 대성공이 되었습니까?
2. 형통하려면 영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한 여자분이, 다이어트를 하려고 병원에 갔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 살을 뺄 방법이 없나요? 제발 도와 주세요.”
의사 선생님이 대답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한달 동안 채소와 과일만 드시면 됩니다.”
“와~ 쉽네요. 근데...그건 식전에 먹는 건가요? 아니면 식후에 먹는 건가요?”
“아니, 식사를... 이걸로 하는 겁니다.”
‘절박성’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의 중요 키워드입니다.
절박하게 그것을, 내가 바라 보느냐?
절박하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느냐?
더나가서, 절박하게 내가 믿음생활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에스더는 왕비의 자리도 내어 던지고, 생명까지도 내어 던지고
유대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매어 달릴 때,
완전한 대성공, 전화위복, 하나님의 큰 역사하심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100주년 3.1 기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만, 3.1운동은 대성공으로 끝나기 보다는, 미완의 성공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을 하고, 25년이 흐른 뒤에, 일본이 원자탄 두방을 맞고,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25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3.1 운동 이후에는, 엄청난 일본의 박해가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3.1 운동을 한 사람들은 모~두 잡아 들여, 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3.1 운동을 지켜본 일본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그때부터 ‘문화말살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한글도 못쓰게 하고, 일본말을 쓰게 합니다.
특히나, 교회가 3.1 운동을 주도 하였다고 보고, 교회에 대하여...... 엄청난 탄압을 하기 시작합니다.
선교사들은 다 추방합니다.
목사들은 다 감시를 합니다.
목사들을 수시로 불러서, 신사참배를 시키고, 반항하면 잡아다 죽입니다.
그때 많은 목사님들이 잡혀가고 죽고, 교회가 폐쇄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를 폐쇄해도, 계속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아예 교인들을 교회에 불러 모으고, 문을 닫고 불을 질러서, 교인들이 다 타죽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재암리 교회 사건’이 아니겠습니가?
그러면, 교회만 이렇게 탄압을 받았느냐? 맞습니다. 교회만 이렇게 탄압을 받았습니다.
3.1 독립선언서 33인 중에, 불교는 1명, 카톨릭은 없습니다.
이탈리아는 일본과 주축국 동맹을 맺어서, 카톨릭은 일본에 적극 협력을 하여서~ 카톨릭은 일본에 압장을 섰습니다.
불교는 산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카톨릭도 가만히 있고, 불교도 가만히 있는데,
기독교는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3.1 운동을 하는데 압장서서, 갖은 박해를 받고~~
손해 입니까? 유익 입니까?
괜히 나서서 어려움만 당하고, 그래도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구약성경에, 다니엘이 온갖 훼방과 음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고 살아갈 때, 바벨론, 베데, 파사의 총리가 되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을
높혀 주십니다. 잘 되게 하여 주십니다.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3.1운동 당시, 통계를 보면, 전국에서 기독교 인구는 20만이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당시 전국민의 1%밖에 않되는, 너무나 작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3.1 운동을 하다가, 제일 많은, 탄압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20만도 않되는데, 일본으로부터 온갖 탄압과 백해를 받으면, 그러면 없어져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배우려면 교회로 가야 한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교회로 가야 한다.
계몽운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학교를 세웁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독립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학교의 대부분이, 기독교 학교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이, 기독교 교인이 되었습니다.
잘 보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눈에 익은 가사 이지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철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바로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유치호 장로님이, 예배때 부를 ‘찬미가’의 가사로, 작사를 한 ‘찬미가’가 되겠습니다.
이 ‘찬미가’가, 너무나 유명해져서, 우리나라의 애국가가 되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학교에서는 이대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서 왜 기독교의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인가?’ 바꾸자...
그래서, 그 이후에,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꾸어서, 오늘날은 부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카톨릭은 발빠르게, 성경책을 다시 펴내면서, 성경구절에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변경하여서, 요즈음에 폼을 잡으려고 하는것 같은데, 정말 몰역사적인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는 가장 미약하였지만, 그럼에도, 대한민국독립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줄로 알고, 사명을 자각하고, 사명을 감당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흥의 축복을 부어 주셔서, 이후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아도, 엄청나게 기독교만 부흥하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전국민의 1% 정도 밖게 않되는 기독교가, 이제는 기독교-유교-불교로 삼분하는, 3대 종교로써 자리를 잡게하여 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가 생활하는 것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보내 주신줄로 알고
사명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건강을 공급하여 주시고,
형통과 평안과, 재력과, 존귀하게 높아지는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개인도 마찬가지 이고,
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사명감당하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형통과 평안과 재력과 존귀하게 높아지는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참고로 현재 전세계 선교사 파송 수, 1위는... 역시 미국입니다.
하지만 2위는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선교사 파송 2위국으로서, 오늘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안심하시고,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유대민족이 하나님께 매어 달릴 때, 부림절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3.1운동의 사명을 감당할 때, 크게 부흥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각 사람도, 에스더 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아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고,
높혀 주시고, 존귀하게 사용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드립니다.